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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쓴 <운명>
 문재인이 쓴 <운명>
ⓒ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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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30일 아침. 대통령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대검청사로 출석하게 됐다. 치욕스런 날이었다. 대통령이 오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많은 사람이 모였다. 여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눈물을 참고 있었고, 대통령은 담담했다. 대통령을 격려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위로는커녕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애를 썼다.

대통령이 사저를 나섰다. 오랜 시간 꾹 참고 있던 여사님이 대통령의 뒷모습을 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만 울음을 쏟고 말았다. 대통령이 가던 길을 돌아와 여사님을 다독였다. 대통령이 탄 버스 위로 줄곧 취재 헬기가 떠다녔고, 많은 취재 차량이 뒤를 따랐다. 버스 안엔 무거운 정적만 흘렀다. 모두 침울한 가운데 대통령은 가는 내내 담담하게 계셨다.

- 문재인의 <운명> 중에서

이 시간 서울 서초구에 있는 대검찰청 중수부는 갑자기 '오늘 소환 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연차 회장의 대질신문이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발표한다. 이에 대해 홍만표 중수부 수사기획관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원래 누명을 쓴 사람은 대질신문을 원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교묘한 말이었다. 전례에 비추어 볼 때, 검찰이 직전 대통령을 소환·조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인데, 하물며 직전 대통령을 형사피고인과 대질신문까지 시킬 것이라고 기정사실처럼 흘린 의도는 대관절 무엇이었을까?

우선 검찰은 이런 말로 인해 치욕을 느낄 사람과 쾌감을 느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또한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대질신문에 응하지 않을 것임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날 저녁 검찰이 박연차 회장을 수사실로 들이밀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인사만 나누었을 뿐 대질신문에는 응하지 않았다.)

정작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대질신문에 응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대질신문이 있을 것이다"는 말로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리고 누명을 쓴 사람은 대질신문을 원하는 법이라고 말한 것에는 '노 전 대통령이 누명을 썼다면(즉 죄가 없다면) 대질신문을 원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대질신문을 거부한다면 그는 누명을 쓰지 않은 사람, 바꿔 말해 죄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미리 개념화해 놓으려는 저의가 담겨 있었다고 본다.

마침내 오후 1시 노 전 대통령 일행을 태운 리무진 버스가 대검찰청에 들어섰다. 버스에는 청사 정문을 통과할 때 보수단체 회원들이 투척한 계란 자국이 묻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을 맞이한 사람은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이었다. 중수부장은 노 전 대통령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국민이 지켜보고 있으니 진실을 위해 수사에 협조해 달라고 말했다.

문재인의 <운명>과 이인규의 '변명'

"그는 대단히 건방졌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중수 1과장이 조사를 시작했다. … 이인규 중수부장은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과 함께 CCTV로 수사 상황을 지켜보며 수시로 수사를 지휘했다." - 문재인 <운명>에서.

최근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자서전 <운명>(가교)에서 노 전 대통령을 수사했던 중수부장 이인규(현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를 "건방졌다"고 평가하면서, 당시 대검 중수부의 수사가 매우 불순하고 비열했다고 비판했다.

2009년 4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 도착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뒤편 리무진버스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던진 계란세례 자국이 남아 있다.
 2009년 4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 도착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뒤편 리무진버스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던진 계란세례 자국이 남아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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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당시 조사 전후에 노 대통령께 충분히 예의를 갖췄다"고 반박했다. 이 전 중수부장은 16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나는 수사하는 사람으로서 직분을 다했을 뿐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내 심정이 어떻겠느냐? … 노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마쳤을 무렵에는 내가 직접 중수부 특별조사실로 올라가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하고는 20분 정도 선 채로 있었다. 그 때 노 대통령은 앉아 계셨고 나는 예를 차리려고 최대한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문재인 이사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진술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고 주장한 데 대해 "그날 조사 당일 오후 5시께 미국의 '핀센'이라는 기관에서 노 대통령의 딸 정연씨가 미국에서 주택을 구입한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일종의 단서가 우리 수사팀에 도착했었다"고 말했다.

"박연차 전 회장과 대질하려는 발상 자체가 대단히 무례한 것이었다"는 문 이사장의 주장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말이 틀리니까(다르니까) 어느 쪽이 진실인가 밝히기 위해서는 당연한 절차 아니냐.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말을 들은 문재인 이사장은,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의 미국 뉴저지 주택 구입 사실을 언급한 데 대해 "이미 다 나온 내용을 들어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며 "문제는 노 전 대통령이 알았느냐 여부인데, 알았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가 없으니 (검찰이)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즉각 재반박했다.

또한 문 이사장은 이 전 중수부장이 노 전 대통령 소환 조사 당시 "예우를 다했다. 공손하게 잘 모셨다"고 말한 데 대해 "겸손이 뭔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겸손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이인규의 반박에 담긴 진실

같은 사안에 대해 왜 이렇게 다른 판단이 나오며 또 누구 말이 옳은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피상과 본질의 차이라고 본다.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노 전 대통령 앞에서 겸손하게 행동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온갖 짓을 다 했으면서도 공개석상에서는 차를 대접하고 선 채로 말을 듣는 등 사뭇 점잔을 부리는 중수부장이 문 이사장에게는 오히려 더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인이 돈 받은 것을 노 전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고, 아들이 돈 받은 것을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다. 이것은 상식의 틀이다."

수사 당시 검찰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듯이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씌우려고 한 혐의는 '포괄적 뇌물죄'라는 것이었다. 이 혐의는 무엇보다도 청탁의 대가를 실현해 줄 실력이 있는 당사자가 뇌물을 받아야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회장에게 뇌물을 받은 사실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통령 재임 기간에 주변 사람이 뇌물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조차도 검찰은 입증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검찰은 기자들을 상대로 근거가 약한 정보를 흘리는 이른바 '흑색수사전'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기자 대부분은 화끈한 것을 참 좋아하는 '경박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때 기자들은 검찰의 의도대로 예외 없이 받아 써 버렸다.

노 전 대통령의 수사와 죽음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깝고 황당한 것이 피아제 명품 시계 논란이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16일 최근 출간한 '문재인의 운명'을 들고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로 들어서고 있다. 지난 14일에 발간된 '문재인의 운명'은 문 이사장이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 및 참여정부 5년의 기록, 비화 등을 담은 책이다.
▲ 노무현 대통령 묘소로 들어서는 문재인 이사장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16일 최근 출간한 '문재인의 운명'을 들고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로 들어서고 있다. 지난 14일에 발간된 '문재인의 운명'은 문 이사장이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 및 참여정부 5년의 기록, 비화 등을 담은 책이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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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2일 KBS 등에서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2006년 9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갑을 앞두고 명품 시계 2개를 선물했다. 그 손목시계는 '스위스 P사 명품시계'이고, '보석이 박혀 있어 개당 1억 원'짜리다. 국내 5~6개밖에 없는 명품 중의 명품으로 박연차는 노 대통령으로부터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검찰 조사에서) 밝혔다"고 보도했다. 다음 날인 4월 23일 <조선일보>는 문제의 P시계가 '피아제'라고 보도하며 사건을 비화시켰다.

이에 대해 문재인 이사장은 "선물 받은 경위는 박연차 회장이 시계를 노건평씨에게 줬고, 노씨가 한참 후에 권 여사에 전달한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은 언론보도를 보고야 알았다. 이는 검찰이 원래 문제 삼았던 100만 불, 500만 불 의혹이 뚜렷하게 범죄로 증명되지 않고 노 전 대통령이 강하게 부인하니 이런 이야기를 흘려서 모욕하고 압박한 것으로, 질이 아주 나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측이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말까지 흘리자 이에 뒤질세라 언론은 노 전 대통령이 증거인멸까지 기도했다고 보도했고, 여기에 부화뇌동한 일부 누리꾼들은 "금속탐지기를 가지고 봉하마을에 가서 시계를 찾아내자"는 글을 올렸다. 또 이것을 언론이 보도하는 등 '추악한 시리즈'가 연이어 생산되기도 했다.

4월 24일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노 전 대통령 측이 기분 나빴을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검찰 관계자가 그런 말을 흘렸다면 인간적으로 형편없는 '빨대'다. 색출해 내도록 하겠다"는 말로 빠져나갔다.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의 수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에 그 '빨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이 자신 있는 부분은 공식브리핑으로, 다른 부분은 '수사관계자'로, 또 다른 어떤 부분은 '익명의 검찰관계자'로 내보냈다 … 또한 검찰이 줄곧 피의사실 공표를 해왔지만 수사기획관이라는 사람이 노골적으로 매일 오전 오후 브리핑한 예는 없었다." - 문재인 <운명>에서.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가장 '검새스러운' 인물

노 전 대통령이 투신한 지 2년이 지났다. 당시 검찰 수사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알게 된 사람이 많아진 것은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여전히 노 전 대통령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당시 임채진 검찰총장과 이인규 중수부장은 노 전 대통령의 수사에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그럼에도 이인규 전 중수부장만은 왜 유독 노 전 대통령 수사의 당위성을 고집하면서 노 전 대통령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작년 9월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차명계좌가 나와서 뛰어내렸다"는 조현오 경찰청장의 발언에 대해 "틀린 것도 아니고 맞는 것도 아니다"라고 모호하게 평했다. 그때 그는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꼭 차명계좌라고 하긴 그렇지만, 실제로 이상한 돈의 흐름이 나왔다면 틀린 것도 아니지 않으냐"라고 말했다. 이것은 피상적인 것은 부인하면서 본질은 시인하는 교묘하고도 야비한 방식으로, 한국 정치 검사들의 전형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이제는 지극히 특이한 사람들, 예컨대 김동길·조갑제 같은 수구인사가 아닌 다음에야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뒤늦게나마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전에 노 전 대통령을 그리도 험악하게 비난했던 한나라당 의원들까지 노 전 대통령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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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인규라는 인물은 대체 어떤 유형일까? 그를 수구형 인물로 볼 근거는 아직 없다. 오히려 그는 실리추구형의 인물이다. 중수부장을 그만둔 그는 법무법인 '바른'에 들어갔다. 그런데 법무법인 '바른'은 그가 수사했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변호를 수임한 대형 로펌이다. 

그는 여전히 자기 행위가 옳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대질신문 시도를 정당화하면서,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가 말했다는 점에서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그는 "나는 검찰을 떠난 사람이지만 당시 수사팀 중에는 검찰에 있는 후배들도 있는데, 참담한 느낌"이라며 "우리는 검사로서 일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현직 변호사인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제1의 '검새스러운' 인물이다.


태그:#이인규, #문재인, #노무현, #중수부, #검새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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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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