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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6년 전, 민주주의를 얘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세상이었다. 독재자의 탄압에 맞선 언론은 광고가 끊겨 백지 신문을 발행해야 했고, 민간인 여덟 명이 '빨갱이' 누명을 쓴 지 하루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음 놓고 숨도 쉴 수 없는 세상이었지만, 모두가 움츠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75년 4월 11일, 김상진이라는 한 젊은이가 유신헌법과 독재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할복 자결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 무엇하겠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굴종과 허위의 외투 속에 안전하게 꼭꼭 숨어있을 때,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진실을 외친 것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독재는 무너지고 민주주의 세상이 왔다.

#2. 그로부터 불과 한 세대 남짓 지난 오늘날, 세상은 '민주화'되었지만 젊은이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전에는 대상이라도 분명했지만, 이번에는 실체도 알 수 없는 적이다. 이 적은 성장기부터 학업 성적에 따른 한줄 세우기로 아이들의 목을 죄기 시작한다. 40대 가장의 그것보다 더 과중한 공부 스트레스에 짓눌린 채 성장해 겨우 대학입시라는 지옥문을 통과하고 나면, 이번에는 취업을 위한 스펙 관리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다. 치열한 학점 관리 전쟁, 어학연수, 토익, 각종 자격증…. 악착같이 노력해도 십중팔구는 비정규직으로 떨어지기 일쑤. 가까스로 취업 턱걸이에 성공하고 안정된 자리를 잡으면(운이 좋은 일부의 경우) 그제야 인생 고민이라는 것을 할 여유가 생기지만, 이미 청춘은 저만치 흘러가버린 뒤이다.

한 세대 전 젊은이들은 '보다 의미 있는 삶'을 고민했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은 그저 '살아남기' 만으로도 벅차다. 젊은이다운 패기를 부려볼 기회도, 꿈을 꿀 권리마저도 빼앗는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 청년들은 '꿈'보다는 '경쟁력'을 좇아 진로를 선택한다. 그런데 세상으로부터 그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외면 받는 분야를 선택한 젊은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어떤 꿈을 꿀 수 있는 것일까?

제7회 대학생 농업·농촌 탐방에 참가한 학생들
 제7회 대학생 농업·농촌 탐방에 참가한 학생들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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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특별한' 진로를 꿈꾸는 대학생, 고등학생들

지난 12월 20일부터 사흘간, 남다른 진로를 꿈꾸는 서른 한 명의 젊은이가 경기·강원 지역의 농업 현장과 한식 전문가들을 방문하는 특별한 여행에 나섰다. 농업·식품 계열을 전공하는 대학생 스무 명과 장차 농·식품 분야 전문가를 꿈꾸는 고등학생 열한 명으로 구성된 이 여행단의 이름은 '대학생 농업·농촌 탐방'.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과 사단법인 김상진기념사업회가 공동 주최한 것으로, 2006년에 시작해 이번에 7회째를 맞았다.

호기심과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가득 찬 이들의 발걸음은 경기도 양평에 있는 '선재사찰음식연구소' - 2001년 한국 최초로 '무농약 마을'을 선언한 강원도 홍천의 '뫼내뜰영농조합법인' - 2463평 규모의 친환경농산물 유통센터인 횡성의 '명일영농조합법인' - 평창 '강원도감자종자진흥원' - 봉평 '허브나라농원' - 횡성에 위치한 '국순당' 공장 - 경기도 남양주 '슬로푸드문화원'을 차례로 밟았다.

선재 스님이 시연해 보인 음식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선재 스님이 시연해 보인 음식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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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학교에서 환경 수업을 들으면서 인스턴트 음식, 일반 과자 안 먹기, 밀가루 음식 자제하기 등을 꾸준히 실천할 정도로 건강한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아요. 이번 탐방에서는 한식과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해 많이 알아보고 싶어요."

사찰 음식 전문가이자 한식 세계화에도 앞장서고 있는 선재 스님의 사찰음식연구소에서, 류근엽군(금산간디학교 3학년)은 스님이 시연을 통해 직접 만들어 건네는 배추찜을 앞에 나서서 받아 먹는다. 장래 희망이 '농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근엽이는 이번이 두 번째 참가이다. 지난 여름에 있었던 6회 탐방이 너무 좋았던 근엽이는 이번에는 같은 학교 친구 지혜까지 데리고 왔다. 우리 전통 음식과 특히 우리 떡에 관심이 많은 지혜는 이번 7회 탐방의 소주제가 '한식 세계화'라는 말을 듣고 주저 없이 지원했다. 지난 2년간 학교에서 한식 공부를 해온 지혜는 장차 관련 분야로 진로를 잡고 있다.

"불경을 보면 부처님은 음식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내가 먹는 음식이 우리 마음을 만들어주기 때문이에요. 모든 자연이 나와 하나이기 때문에 자연을 대할 때는 꿀벌같이 하라고 하셨죠. 벌은 꿀을 취해도 꽃을 해치지 않고 종자 번식을 시켜줘요. 요리의 기본은 더럽히지 않는 것이에요. 항생제 범벅 고기, 농약 범벅 채소, 가공 식품…. 모두 병을 만드는 것들이에요. 나 하나 먹고 살자고 지구를 더럽히면 그것은 곧 나를 더럽히는 것이지요."

나와 자연, 그 자연에서 나온 음식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 사상과 함께, 계절과 체질에 맞는 음식 먹는 법을 설명해주시는 선재 스님.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학생들의 진지한 태도에 스님의 얼굴에도 배시시 웃음꽃이 피어난다. 스님이 전날 밤부터 정성껏 준비한 고구마묵, 콩나물잡채, 설탕 대신 홍시를 갈아 넣은 김치 등 맛깔 나는 사찰 음식으로 점심을 들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 홍천의 '뫼내뜰영농조합법인'으로 향했다.

선재 스님이 학생들을 위해 마련해 준 맛깔나는 사찰 음식으로 점심을 함께 했다.
 선재 스님이 학생들을 위해 마련해 준 맛깔나는 사찰 음식으로 점심을 함께 했다.
ⓒ 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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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좀 더 받으려고 유기농업 하는 것 아닙니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연익흠 대표(63)가 직접 나와 학생들을 따뜻하게 맞아준다. 유기농산물 전문유통 생협인 '한살림'과 계약 재배를 하고 있는 뫼내뜰은 2001년 60여 마을 농민들이 모여 마을의 농약을 모두 불태우고 '농약 없는 마을'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유기농업 하는 것 아닙니다. 남·북한강 일대와 경기도가 모두 유기 농업으로 바뀌면 서울 시민이 먹는 수돗물 정화비가 몇 십 조원 줄어듭니다. 어린 시절 냇물 떠서 밥 해먹던 그 시절로 최대한 돌려보자,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을 최대한 보존하자는 것이 유기농사꾼의 꿈입니다."

연 대표는 "대통령이 열 번 바뀌어도 경제 논리로는 절대 농업을 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농업을 살리는 것은 서로 믿고 신뢰하는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라는 것이다. 한살림은 계약 재배를 하기 때문에 일 년 내내 주문해 먹으면 오히려 시중의 일반 농산물보다 저렴하다. 믿고 찾아주는 소비자들이 있기에 생산자들은 싼 값으로도 믿을 수 있는 유기농산물을 생산한다. 유기 농업을 하면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뫼내뜰은 의외로 누적된 적자로 고민이 많다. 생산·가공·유통을 모두 하기 때문에 창고 시설에만 12억 원, 수송용 탑차에 1억 원 등 목돈 들어가는 데가 많지만 돈을 더 벌기 위해 값을 올려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뫼내뜰 시설 현황을 설명하는 연익흠 대표와 학생들
 뫼내뜰 시설 현황을 설명하는 연익흠 대표와 학생들
ⓒ 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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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강연을 마치고 연 대표가 직접 시설을 보여주겠다며 일어선다. 학생들은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수첩과 볼펜을 쥐고서 우르르 따라간다.

연 대표를 붙잡고 질문하는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던 최진원군(경상대학교 농학과 3학년)은 "여태껏 농업을 하나의 사업이라고 보고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는데, 연 대표의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며 "돈을 벌기 위해 농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식량자급도를 올리고 지키겠다는, 국민에 대한 일종의 봉사로 생각하는 태도에 놀랐다"고 소회를 밝혔다.

졸업 후 육종 연구를 위한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인 최군은 외국에도 팔 수 있는 우리 종자를 연구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최군은 "IMF 이후 우리나라의 종자 회사들이 외국계 회사로 합병되면서, 청양고추 등 우리 씨앗을 종자로 사용할 때마다 외국 회사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며 "우리도 좋은 종자를 연구해서 거꾸로 외국에 내다 팔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꿈을 말했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백억 대 사업가가 된 CEO

많은 학생들이 인상 깊은 방문지로 꼽았던 곳 중 하나가 '녹정원'을 운영하고 있는 '명일영농조합법인'이다. 농산물 생산에서 저온저장, 유통, 판매까지 모든 과정이 가능한 녹정원은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2463평 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2000톤(20kg 박스 10만 개) 규모의 저장고를 자랑하는 녹정원은 양상추, 브로콜리, 콜라비 등 고급 양채류를 농가와 계약 재배하여 예냉, 저온저장 후 이마트 등 대형유통업체에 납품한다. 연간 매출액은 100억 원대.

이곳에서도 역시 CEO인 '명일영농조합'의 김동석 사장(46)이 직접 나와 학생들을 환영하고, 자상한 설명과 함께 시설을 안내했다. 그냥 두면 금방 상하기 마련인 채소를 오직 저장만으로 장기간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예냉(precooling) 기술. '미리 냉각한다'는 뜻의 예냉은 수확한 채소가 도착하면 저장고에 넣기 전에 미리 지정한 온도로 급속히 냉각시키는 일이다.

차압식 예냉 시설을 설명하는 김동석 사장과 학생들.
 차압식 예냉 시설을 설명하는 김동석 사장과 학생들.
ⓒ 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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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온도가 0℃로 유지되고 있는 브로콜리 저장고에 들어서자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진다. 높이가 족히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창고 안에 브로콜리가 가득가득 담긴 20kg짜리 박스가 탑처럼 쌓여있다. 이렇게 저장된 채소는 양상추의 경우 20일, 브로콜리는 60일까지 신선도가 유지된다고 김 사장은 설명했다. 이밖에 바다의 항구에서만 볼 수 있는 독(dock) 설비를 물류 창고에 도입해 트럭에 물건을 싣고 내릴 때 수월하도록 노동 효율을 높인 것도 녹정원만의 특색이다.

견학 후 사무실 한쪽에 자리를 마련하고 가진 면담 시간. 김동석 사장은 서울 가락시장에서 맨주먹으로 유통업에 뛰어들어 모은 돈으로 고향인 둔내에 녹정원을 세우고 오늘에 이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미래의 농업 CEO를 꿈꾸는 학생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전용필(경상대학교 농업경제학과 4학년)군은 "'생산자는 생산만, 유통업자는 유통만' 하자는 김 사장님의 말씀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며 "생산자는 안전하고 신선한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더욱 노력을 기울이고, 유통업자는 유통효율을 증대시켜 농민과 소비자에게 믿음을 준다면, 농산물 유통업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서로 상생하면서 농산업이 더욱 발전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군은 또 녹정원 근무자들 중 해외 인력이 많은 것을 지적하며 "농촌에 젊은이가 없어서 해외 인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며 "농업이 더 발달하고 각 분야에서 성공하는 전문가들이 많이 나오면 젊은이들도 농업·농촌에 눈을 돌릴 것이고, 고질적인 청년취업 문제 해결에도 한 몫을 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예냉실에서 신선하게 보관된 브로콜리와 양상추는 대형 유통업체를 통해 시장에 유통된다.
 예냉실에서 신선하게 보관된 브로콜리와 양상추는 대형 유통업체를 통해 시장에 유통된다.
ⓒ 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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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올해 등록금 얼마고?"

사장님과 임직원들의 배려로 마을회관에서 하룻밤을 신세지면서 밤 깊은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직은 서먹하지만 한편으론 비슷한 또래라는 유대감이 금세 친밀감을 만들어낸다. 여학생들은 서로 이름과 학교를 소개하다가, 이내 가장 커다란 관심사인 주제가 튀어나오고야 만다.

"지현이 이번에 대학 들어간다꼬? 니 학교 입학금하고 등록금 얼마고?"

서먹했던 대화가 갑자기 열기를 띤다. 국·공립대보다 사립대, 지방대보다 서울·수도권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의 표정이 더 어두워진다. 서울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에 12학번 신입생으로 입학할 예정인 윤지현양은 입학금 40만 원을 포함해 첫 해 등록금으로 800만 원을 준비해야 한다.

"지금 세상이 대학교 졸업은 거의 의무잖아요. 필수적으로 나와야 하는 건데, 그렇게 많은 돈을 내야만 한다는 것이 솔직히 이해가 안 가고, 정말 그만한 가치의 공부를 하는 걸까 의문도 들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하면…. 부모님한테 미안한 것이 제일 크죠."

등록금 얘기가 나오자, 또래 중에서는 언니에 속하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식품영양학과 3학년 남현영양의 목소리가 제일 커진다.

"우리 학교도 한 학기 등록금이 400만 원이다. 그것도 내년에 동결될지, 또 오를지 모르는 일이다. 공대는 430만 원이고…. 니들 대학 진학 잘 생각하래이. 이 악물고 노력해서 꼭 국·공립대 가야지 사립대 가면 부모님 등골 빼묵는 짓이다."

학생들은 모든 탐방 일정을 앞다투어 기록하며 진지한 자세로 임했다
 학생들은 모든 탐방 일정을 앞다투어 기록하며 진지한 자세로 임했다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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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갓 스무 살 안팎. 한참 희망찬 비상을 준비해야 할 이들 앞에 놓인 세상의 현실은 가혹하기만 하다. 말 그대로 등록금 천만 원 시대. 한 가정을 뿌리째 뒤흔들만한 대가를 치르고 졸업해도, 대학 교육이 안정된 일자리나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농업 계열 학생의 경우 고민은 더욱 크다.

"농업을 전공하면 사실 갈 수 있는 데가 별로 없고, 길이 좁아요."

한경대학교 원예학과 김유영양은 이제 곧 진로 고민이 심각해지는 4학년이 된다.

"친구들은 기껏해야 농촌진흥청 같은 국가 기관 취업에 매달려요. 갈 수 있는 사기업이 별로 없거든요. 농업에는 투자한 만큼 돌려받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교수님들도 학생들이 70~80%는 다른 길로 간다고 말씀하세요. 하지만 저는 꼭 이 길로 가고 싶어요."

김양은 "농대생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농사짓는 것만 생각하지만, 농대를 다녀보니 꼭 농사를 짓는 것만이 아니라 더 많은 공부를 해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사람들이 농업을 자신과는 거리가 먼 것, 그저 은퇴 후 돌아갈 곳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농대를 나와도 농업계를 외면하는 현실

마찬가지로 군 제대 후 올해 마지막 학년을 맞는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오지훈군은 "주변 친구들도 신입생 때는 농업에 열정을 보이지만, 졸업이 가까워지면 대부분 '현실에 맞춘' 진로를 선택한다"며 "경제 쪽 전공만을 살려서 농협을 비롯한 금융권으로 취업하거나, 사법시험, 행정고시를 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학교 측에서도 '농'자를 뗀 경제 위주로 은근히 방향을 잡는 분위기가 있다고. 오군도 현실과 향후 진로를 고려해 행정고시를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실제로 농대를 가보면 오군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년간 농업을 전공하고도 진로는 다른 곳에서 찾는다면, 농대의 존재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다. '대학생 농업·농촌 탐방'을 기획한 '김상진기념사업회'의 고민도 여기서 출발했다.

"민주주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학생 신분으로 생을 마감한 김상진님은 서울대학교 농생대 축산과 68학번이었습니다. 그는 전공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학생이었으므로, 30여 년이 지난 지금쯤에는 한국 농업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련의 시대적 상황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김상진님의 뜻을 기리는 길은, 지금의 농업 발전에 기여할 인재를 양성하는 사업이라고 보아 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봉평 허브나라 농원에서 이호순 대표의 강연 후 기념사진.
 봉평 허브나라 농원에서 이호순 대표의 강연 후 기념사진.
ⓒ 안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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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부터 7회째를 진행하면서 전국의 농생대 계열 대학생, 고등학생 등 약 160명이 참가했고, 50여 개 업체를 방문했다. 탐방 단장을 맡고 있는 김원일 김상진기념사업회 이사는 "해가 거듭될수록 한국 농업의 리더를 꿈꾸는 학생들의 호응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이 탐방을 통해 진로에 대한 고민을 새롭게 하게 됐다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2회 이상 탐방에 참가하는 학생들도 있다. 가능한 많은 학생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한 번 참가해 탐방을 체험해 본 학생들은 그 다음 번 탐방에 너도나도 지원을 한다.

2, 3, 6회 참가자인 김태호(건국대 생명환경과학대학 입학 예정)군은 자신이 얻은 소중한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 싶어 7기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 나섰다. 충북 청원군에 있는 '상수 허브랜드' 방문이 인상적이었다는 김군은 "허브라는 아이템을 가지고 일차로 생산, 이차로 가공, 삼차로 마케팅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모습은 농업을 단순히 생산의 측면에서 생각했던 나를 깨우치는 소중한 순간이었다"면서 "탐방을 통해 도시농업 전문가가 되어 도시민들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알리고, 도시에서 농업을 접하기 쉽도록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군은 후배들에게 "이 탐방은 그저 2박3일의 여행이 아니라, 한국 농업의 어떤 흐름에 참가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탐방을 통해 생각의 전환과 아이디어를 얻는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번 7기 탐방을 마친 학생들이 밝힌 소감은 김군의 이런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 식물생산산림과학부 1학년 이충근군은 "그동안 농업 관련 학문을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고민했는데, 각계각층의 농업 종사자들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 농업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실감했다"면서 "이제는 농업이 다른 분야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거나 소외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겠다, 이제 당당히 나의 분야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군은 또 "또래 참가자들이 뚜렷한 꿈을 가지고 진지한 고민을 하는 모습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고, 친구지만 존경심이 들었다"며 "기회가 되면 또 참가하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이제 당당히 나의 분야를 말할 겁니다"

'향토음식 사업'으로 20대 CEO를 꿈꾼다는 고려대학교 식품자원경제학과 1학년 김정태군은 "학교에서는 농·식품 계열로 진로를 설정하는 친구나 선배가 없어서 많이 외로웠는데, 이번 탐방에서 농·식품 분야의 선구자로서 자신만의 인생을 펼쳐나가고 있는 멋진 분들을 만나고,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형·누나, 동갑내기들, 동생들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눈 것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김군은 또 "이번 탐방을 통해 앞으로 해보려고 하는 향토음식 사업에 대해 값진 영감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평소에 해왔던 고민도 어느정도 해결되어서 정말 유익했다"고 덧붙였다.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 예정인 새내기 박종혁군은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 어떤 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탐방을 통해 그 인프라는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식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식을 세계화 할 수 있으며, 그들을 지원하고 장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큰 인프라 구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구체적인 소감을 밝혔다.

박군은 "우리가 만난 분들은 모두가 고개를 젓고 피하는 농업 분야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새로운 블루오션을 개척한 사람들"이라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야말로 새로운 선구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본받고 싶다"고 말했다.

슬로푸드 문화원에서의 유기농 한과 만들기 체험.
 슬로푸드 문화원에서의 유기농 한과 만들기 체험.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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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생각하기에 스무 살이면 무척 어릴 것 같지만, 실제 만나 본 학생들은 결코 어리지 않았다. 자신의 삶과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나아가 가족과 주변 친구들, 자신을 둘러싼 사회 현실에도 무관심하지 않았다. 꿈을 찾아 매진만 하기에도 부족한 시기에, 이들은 농업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라는 또 다른 장벽과도 싸워야 한다.

경상대 최진원군은 "저는 정말 농업에 뜻이 있어 농학과를 갔는데, 막상 입학해보니 세상의 편견이 만만치 않고, 심지어 같은 과 친구들도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보고 한동안 방황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같은 젊은이들의 고민에 탐방 마지막 날 방문한 경기도 남양주 '슬로푸드문화원'의 김병수 대표가 명쾌하게 답한다.

"우리나라는 농림부 장관마저도 '농업은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라지요. 국회에서는 농촌 지원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날마다 떠듭니다. 하지만 농업·농민을 불쌍한 존재, 도와주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은 한마디로 '시건방진' 생각이에요. 먹는 것은 누구의 문제지요, 여러분?"

김 대표가 학생들을 둘러보고, 잠시 침묵이 흐른다.

"먹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문제지요. 바로 내 문제인데, 내 문제를 소홀히 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앞뒤가 바뀐 것이죠."

농업을 홀대하는 분위기는 OECD 가입국 30개국 중에서 식량자급을 못하는 단 두 나라가 일본과 우리나라라는 사실로 드러난다.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26%, 일본의 식량자급률은 46%. 하지만 일본은 주곡 5가지의 경우 자급률이 76%선이고, 브라질과 필리핀 등 대규모 해외 농업 이민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상황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선진국일수록 농업을 우선 순위에 두고, 식량 자급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붓는다"고 김 대표는 지적한다. 농학과 등 농업을 전공하는 학생들 중에는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상진이 살아있다면 농업 현실을 고민하는 CEO가 되어있을 것"

"제 자신도 농대를 다닐 때 느낀 것인데, 학교에서는 현장 체험의 기회가 없고 교과서 위주의 교육을 하지요. 농업에 대한 본인의 사명의식이나, 뭘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계기를 주지 않습니다. 저희가 하는 일은 아직 작은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현장 교육을 보완해주면 농업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김원일 이사는 "김상진이 살아있다면 지금쯤 아마도 농업 CEO가 되어 건강한 농업을 고민하며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을 것"이라며 "이 탐방은 각지에서 농업에 기여하고 있는 '살아있는 김상진'을 찾아가보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고 설명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친구들은 또래라는 이유만으로 금방 친해졌다.
 전국 각지에서 온 친구들은 또래라는 이유만으로 금방 친해졌다.
ⓒ 오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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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사업회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수의 학생들에게 현장 경험을 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탐방을 시작했다고. 처음에는 의외로 학생들이 많이 지원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다.

"농업을 공부하는 학생 자신들이 정작 농업에 관심이 적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지요. 하지만 탐방 후 아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정말 보람있었다',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할 때, 또 몇 년 전 탐방을 다녀간 학생이 이 체험을 계기로 농업 컨설팅 회사에 입사했다는 말을 들을 때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김 이사의 바람은 이 탐방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처럼 오래 계속되는 것이다. 여건이 되면 장차 해외 탐방을 나갈 계획도 있다. 보통 해외 농업 연수는 네덜란드, 미국, 일본 등 농업 선진국들을 가는 경우가 많은데, 김 이사는 연해주, 중국의 동북3성, 중앙아시아 등 동북아 탐방을 생각하고 있다.

"모두 우리 동포들이 나가 사는, 드넓고 기름진 땅입니다. 우리는 영농 기술은 뛰어난데 땅이 부족하죠. 반대로 그쪽은 땅은 넓은데 영농 기반이 부족해서 아직 노는 땅이 많아요. 학생들과 탐방을 가서, 그 넓은 땅에서 보다 큰 농업을 꿈꾸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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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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