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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선운사의 처마 끝에 달린 풍탁은 세월 앞에 바람판은 온데간데없고 덩그러니 자취만 남기고 있다.
 전북 고창군에 위치한 선운사의 처마 끝에 달린 풍탁은 세월 앞에 바람판은 온데간데없고 덩그러니 자취만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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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빚는 소리, 바람이 남긴 흔적…. 바람이 부는 대로 쳐대고 바람이 쉬고 싶을 때야 비로소 고요히 소리를 멈추는 아련함. 고즈넉한 산사의 건물이나 석탑 처마 끝에 매달려 청아한 소리를 내며 사람의 인기척을 그렇게 느끼게 했던 풍탁의 잔상….

가끔 산행 길에 무심코 들른 산사에서 처마 밑 잠시 눈길을 잡아끄는 게 풍탁이다. 바람판은 온데간데없고 종의 모양만 덩그러니 처마 한 귀퉁이를 딸그락거린다. 그래도 어지간히 반갑다. 흔하지 않아 반갑고 가끔 마주쳐 다시 봐지고,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진국 같다. 오랜 세월 때 묻은 흔적들이 그리 말해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풍탁보다는 풍경이 더 익숙하다. 그래서 풍탁을 이해하기 전에 풍경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싶다. 풍탁은 학술적 의미에서 익숙하고 풍경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친숙하고. 그래도 다 같은 말이고 풍령이라고도 불린다. 같은 말인데도 시대적인 흐름에 있어 경계선을 만든다. 이것 또한 사용의 빈도차가 아닐까. 풍탁이라는 말은 법당 안에서 스님이 예불을 모실 때 쓰는 목탁을 응용해 생긴 용어로 '바람이 불어 와서 종을 친다'는 말이다. 바람이 두드리는 목탁이라는 뜻이다.

풍탁은 학술적 의미에서 익숙하고 풍경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친숙하다. 그래도 다 같은 말이고 풍령이라고도 부른다. 풍탁은 바람이 두드리는 목탁의 의미를 담아 불심을 전했다. 늦가을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석탑 끝 풍탁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풍탁은 학술적 의미에서 익숙하고 풍경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친숙하다. 그래도 다 같은 말이고 풍령이라고도 부른다. 풍탁은 바람이 두드리는 목탁의 의미를 담아 불심을 전했다. 늦가을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석탑 끝 풍탁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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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탁,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함께 전래

우리에게 낯익은 풍탁은 물고기가 익숙하다. 풍탁은 작은 종처럼 만들어 가운데 추를 달고 밑에 쇳조각으로 붕어 모양을 만들어 매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맑은 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조선시대 이후에 흔히 쓰였던 것이 지금도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온다.

절집에서 동물을 기르는 것은 금기였지만 물고기는 예외였다. 사찰 연못에 물고기를 놓아 기르고 물고기가 연못에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니는 모습은 일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경지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풍경 끝에는 물고기를 매단 것이었고 또 다른 이유로는 물고기는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나 눈을 감지 않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하여 수행자도 물고기처럼 항상 부지런히 도를 닦으라는 불심의 뜻이 깊이 새겨진 의미 때문이다.

풍탁은 불교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론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기에 그리 짐작하는 사람이 많지만 역사적인 고증을 통해서라면 풍탁은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함께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풍탁은 중국 한나라 때(기원전 206년~220년) 음악에 쓰이는 편종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삼국 초기에 무덤에서 많이 출토된 말방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편종은 소리의 쓰임새에서, 말방울은 모양새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설이다.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동풍탁은 우리나라 종(鐘)의 시원양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풍탁의 상대·하대에 띠를 두르고 몸통 중간부분의 당좌가 장식된 모습이 흡사 신라 성덕왕에 조성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오대산 상원사 동종과 닮은꼴이며 금동풍탁이 상원사 동종보다 시대적으로 앞서 있기 때문이다.
▲ 금동풍탁/익산미륵사지출토·백제시대·높이14cm·원광대학교마한백제문화연구소 소장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동풍탁은 우리나라 종(鐘)의 시원양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종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풍탁의 상대·하대에 띠를 두르고 몸통 중간부분의 당좌가 장식된 모습이 흡사 신라 성덕왕에 조성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오대산 상원사 동종과 닮은꼴이며 금동풍탁이 상원사 동종보다 시대적으로 앞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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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출토 금동풍탁, 우리나라 종(鐘)의 시원양식으로 추정

백제의 풍탁에는 사비시기(538~660년) 수도였던 부여 부소산 폐사지에서 출토된 풍탁의 금동 바람판, 성왕을 위해 567년 창건된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풍탁의 금동바람판과 철제풍탁도 백제의 풍탁으로 손꼽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종(鐘)의 시원양식으로 추정되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동풍탁은 현재까지 발굴된 종에서 가장 시대를 앞서고 있어 그 역사적 의미를 남다르게 보고 있다.

1974년과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미륵사지 동탑지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14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금동제 풍탁이 세상 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나라의 풍탁은 중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일견 종과 같은 형태이나 종의 몸통이 원형 단면인 것과 달리 타원형이며 하단 부분이 굴곡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금동풍탁을 종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는 풍탁의 상하에 띠를 두르고 어깨 부분에는 연곽 내에 연뢰를 두고 몸통 중간 부분의 당좌가 장식되었기 때문이다. 당좌란 종이나 금고 등을 칠 때 때리는 자리를 정해 장식해 놓은 곳을 일컫는 말인데 금동풍탁이 편종과의 차이점을 보이고 종의 시원으로 보는 이유를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종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종인 오대산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과 닮은꼴이다.

신라 성덕왕 24년(725년)에 조성된 상원사 동종은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으로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며 당좌는 8판 연화문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금동풍탁과 매우 흡사하다. 시대적으로 금동풍탁이 앞서고 있으며 중국에서 전해진 근거로는 하단부분의 모양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원사의 종은 하단 부분이 일자형인데 비해 금동풍탁은 굴곡형이며, 이는 중국의 종이 굴곡형인 것과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반추해 볼 수 있다. 또한 금동풍탁의 당좌가 백제후기 양식의 연꽃 문양의 연화문으로 표현되어 이는 불교적인 재해석에도 근거가 되고 있다. 미륵사지 동탑지에서 출토된 이 풍탁은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나온 풍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경주 감은사지에서 출토된 청동제 풍탁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풍탁은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평면형태가 사각형 원형 마름모꼴 등으로 표면이 삼국시대에 비해 다양화된 모습이다.
▲ 금동풍탁/창녕 말흘리유적·통일신라·높이15.6cm·국립김해박물관 소장 풍탁은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평면형태가 사각형 원형 마름모꼴 등으로 표면이 삼국시대에 비해 다양화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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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풍탁 연결구/창녕 말흘리유적 출토·통일신라·길이10.6~12.7cm·국립김해박물관 소장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흔들리는 장식인 바람판은 고려시대 이전에는 구름이나 나뭇잎 모양이었지만 요즘 볼 수 있는 물고기모양은 근대 이후 흔히 볼 수 있어 조선시대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금동풍탁 바람판/창녕 말흘리유적 출토·통일신라·길이19~21.5cm·국립김해박물관 소장 금동풍탁 연결구/창녕 말흘리유적 출토·통일신라·길이10.6~12.7cm·국립김해박물관 소장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흔들리는 장식인 바람판은 고려시대 이전에는 구름이나 나뭇잎 모양이었지만 요즘 볼 수 있는 물고기모양은 근대 이후 흔히 볼 수 있어 조선시대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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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고려-조선, 다양화-불교 상징성 두각-유교 영향으로 단순화

풍탁은 통일신라시대로 오면서 평면형태가 사각형, 원형, 마름모꼴 등으로 다양화되고 표면에는 종과 같은 문양이 있는 것과 만(卍)자형 문양, 문양이 없는 것 등 삼국시대에 비해 다양해진 모습을 담고 있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는 원형과 마름모형, 육각형의 평면 형태와 표면에는 사찰의 이름이 새겨진 것, 범어문 불상 등이 주조된 것이 특징적으로 여러 가지 문양을 투각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때에 풍탁은 불교의 상징성을 뚜렷이 드러내며 실체화 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풍탁에서는 불교의 상징성을 뚜렷이 볼 수가 있다. 사찰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며 범어문, 불상 등이 주조된 여러 가지 특징적인 부분을 살필 수가 있다. 사진 속의 풍탁은 원이삼점문양으로 원이삼점은 불교에서 원융을 상징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풍탁에서는 불교의 상징성을 뚜렷이 볼 수가 있다. 사찰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며 범어문, 불상 등이 주조된 여러 가지 특징적인 부분을 살필 수가 있다. 사진 속의 풍탁은 원이삼점문양으로 원이삼점은 불교에서 원융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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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숭선사지 금동풍탁은 몸통과 구름모양의 바람판, 연결구를 온전하게 갖추고 있다.
▲ 금동풍탁/충주숭선사지 출토·고려·높이3.6cm·충청대학교박물관 소장 충주 숭선사지 금동풍탁은 몸통과 구름모양의 바람판, 연결구를 온전하게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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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노기환 학예연구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려시대의 풍탁은 범어와 부처의 모습을 새기며 불교의 상징적인 의미를 실체화한 시기이지요. 특히 고려시대의 금동풍탁에는 창살 문양이 표현된 것이 인상적인데요. 아마 집을 표현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려시대 다른 금속공예품들과 같이 신앙과 예술품으로서 기능을 추정해 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부처를 모시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겼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에 반해 조선시대의 풍탁은 유교적인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장식적인 것보다는 선비 같은 요소가 짙고 깔끔해진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풍탁은 고려시대보다 한층 단순해져 사각형, 일반적인 종의 모습과 둥근 테가 있는 모자 형태, 종의 형태에서 변형된 윗부분은 좁고 아래쪽은 넓은 나팔형이 있다. 특히 물고기 모양의 바람판은 근대에는 보이는 반면 고려시대 이전에는 구름이나 나뭇잎 모양이 드러나 아마도 조선시대 이후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풍경과 연관되는 상징성으로 물고기 모양을 흔히들 떠올린다.

조선시대 풍탁의 형태는 유교적인 영향 탓에 장식적인 효과보다는 선비 같은 요소가 짙으며 고려시대보다 단순해지고 둥근 테가 있는 모자형태, 윗부분은 좁고 아래쪽은 넓은 나팔형이 있다.
▲ 청동풍탁/양산 통도사 출토·조선·높이14.2cm·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풍탁의 형태는 유교적인 영향 탓에 장식적인 효과보다는 선비 같은 요소가 짙으며 고려시대보다 단순해지고 둥근 테가 있는 모자형태, 윗부분은 좁고 아래쪽은 넓은 나팔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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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탁 특별전, 백제문화 재조명
풍탁과 관련한 순수 학술 논문은 현재 우리나라에 없다. 풍탁에 관해 역사적으로 훑어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은 지난 10월 20일부터 11월 21일까지 한 달간에 걸쳐 '풍탁'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풍탁 150여점 중 학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90여 점과 풍탁의 용도 등을 알 수 있는 문헌자료인 불경 등을 전시한 자리였다.

풍탁에 관해 연구된 자료가 미비해 전시 3일 전까지도 각 지역의 박물관을 뒤지며 찾아낸 유물들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흔적을 담아냈지만 여기에는 시간을 초월해 1400여 년 전 백제문화의 우수성이 담긴 우리지역의 유물을 지켜내고 싶다는 사람들의 뜻이 모여 있기도 하다. 좀 가치 있다 싶은 유물들은 어김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에 외지에 보관 중인 우리지역 문화재급 유물 등을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이나 마한관 등에 기증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묵언 같은 외침이 담겨 있다.

백제사회에 대한 재조명, 백제의 숨결을 시간은 지나쳐 왔어도 그 자리에서 그렇게 간직하고 싶은, 그래서 우리의 후손에게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를 가르치고 역사적 숨결을 마음으로 배우라는 의미 때문이다.


익산 미륵사지에 위치한 미륵탑 중 동탑의 모습이다. 사리장엄이 발굴된 탑은 서탑으로 현재 보관 중에 있다.
▲ 전북 익산 미륵사지 미륵탑 익산 미륵사지에 위치한 미륵탑 중 동탑의 모습이다. 사리장엄이 발굴된 탑은 서탑으로 현재 보관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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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한 소리에 한시름 위안이 되고

문득, 1400년 전의 백제 금동풍탁은 마주 보이는 미륵산을 등 뒤로 무왕의 간절한 바람을 귀담아 들었을지도 모른다. 무왕은 익산에 백제의 왕궁터를 짓고 백제의 선을 가진 석탑을 만들며 이곳에 백제의 꿈을 심었을 것이다. 정치라는 게 그렇듯 서자 출신의 버려진 왕족이 큰 뜻을 펼치기에는 녹록치 않는 세월이었을 게다. 해서, 큰 사찰을 지으며 탑 끝, 처마 밑에 무왕은 소박한 바람을 담아 풍탁을 드리우고 불심을 빌어 잠시 지나칠 때마다 마음의 위안을 삼았던 게 아닐까.

숱한 세월 감내해 온 추녀 끝 풍경소리, 수많은 마음과 영혼을 쓰다듬어 온 풍탁은 가뜩이나 힘들고 어려운 세상 그렇게 사람들에게 때로는 위안이 되고 때로는 잔잔한 평온함으로 마주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 고단함에 마음 둘 곳 없는 시절, 가끔 고즈넉한 산사를 찾아 처마 끝 바람의 청아한 흔적이 담긴 풍탁에 의지해 한시름 그 바람과 함께 실어 보내도 좋으리라.

미륵탑 끝에 달린 풍탁 뒤로 백제의 숨결을 담고 있는 미륵산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미륵탑 끝에 달린 풍탁 뒤로 백제의 숨결을 담고 있는 미륵산의 모습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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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익산교차로신문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풍탁, #금동풍탁, #미륵산, #풍경, #모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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