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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일 2009년 10월 28일]

 

오늘 일정은 우수리스크를 먼저 답사한 뒤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둘러보기로 했다. 간밤에 조씨는 우수리스크는 자기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이틀간 강행군을 했다고 피로할 테니 느지막이 출발하자고 푹 주무시라고 했다. 하지만 예사 때와 같이 일어났다. 부인이 정성껏 차린 아침을 들고 꿀차까지 마셨다.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상쾌했다.

 

나는 역마 체질인가 보다. 해외를 구석구석 뒤지고 다녀도 크게 앓아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 특히 나의 어머니에게 감사할 일이다. 어머니는 대단히 튼튼한 체질로 달리기에는 꼭 일등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먼 곳에 계신다. 세계 곳곳의 귀한 명품들을 사다드리고 싶지만 어머니에게 드릴 수 없다. 그래서 풍수지탄(효도를 다하지 못한 자식의 슬픔)이라는 말이 생겨났나 보다.

 

우수리스크

 

08: 50, 조씨 집을 출발하다. 10:00 우수리스크 지명을 새긴 도로변 아치가 보였다. 답사자로서 이 순간이 가장 기쁘다. 곧장 차를 세우고 표지판을 얼른 카메라에 담았다. 답사자로 지명을 확인하고, 지명 표지판을 촬영하는 건 답사여행의 알파다. 그리고는 차에 올라 북상했다. 10월 하순이지만 이 일대는 완연히 썰렁한 겨울풍경이었다.

 

윤병석 교수의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에서 이곳 우수리스크 일대는 1870년 이래 한인 개척 이주지 거점이 된 뒤 안중근을 비롯한 이상설, 이동녕, 조완구, 백순, 이동휘, 김립, 박은식, 윤해, 고창일, 신채호 등 우국지사들의 내왕이 잦았다고 한다.

 

연해주 출신의 최봉준, 문창범, 최재형, 최만겸 등도 이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밝혔다. 수십 년간 러시아 일대 한인 유적을 발로 답사한 수원대학교의 박환 교수의 <러시아 한인 유적답사기>는 초행길인 나에게는 등대와 같은 지침서다.

 

솔직히 나는 사학도가 아니다. 뒤늦게 우리 역사에 눈을 뜨고는 우리의 아픈 역사들을 쉽게 풀어서 내가 미처 가르치지 못했던 제자들과 젊은 세대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한 훈장으로 이 길을 나선 것이다.

 

그래서 내 글에 나온 이야기들은 이미 역사학자들이 애써 발굴하여 이뤄놓은 사실들을 보고, 듣고, 다시 현장을 확인하면서, 틈틈이 나의 감상을 보태는 것이다. 교사 시절 수업시간에 교과서 밖 얘기를 들려주면 학생들이 얼마나 재미있어 했던가.

 

그때는 시간도 없었고, 아는 것도 적었기에 미처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를 뒤늦게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자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젊은 세대가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 나라와 겨레의 미래는 그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

 

우수리스크의 으뜸 항일유적지는 이상설의 유허지다. 10: 20,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 외로이 우뚝 서있는 이상설 선생 유허비에 이르렀다. 1917년 3월 2일 선생은 48세로 이국땅에서 운명하면서 이동녕,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 동지들에게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내 제사도 지내지 말라."

 

동지들은 선생의 이 유언에 따라 수이푼강에서 화장하여 그 재를 강물에 뿌렸다고 한다. 선생이 가신 뒤 60여 년이 지난 뒤 선생의 고혼이 맴도는 이곳에 돌을 세웠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한국 충청북도 진천에서 탄생하여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이다.

 

1907년 7월 광무(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 등을 대동하고 사행(使行)하여 한국독립을 주장하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윤병석 교수가 비문을 쓰고 이경순 작가가 비를 제작하였다고 하는데, 석재는 국내산 화강암으로 매우 단아해 보였다. 아주 빼어난 비였다. 안내인 조씨는 자기도 이 비를 세울 때 조금 이바지하였다고 하면서, 박환 교수와 함께 광복회에서 감사장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이 옆에는 선생의 한 많은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나 다름이 없이 수이푼강이 쉬엄쉬엄 흐르고 있었다. 수이푼강은 '슬픔의 강'또는'죽음의 강이라고도 하는데, 연해주 인민들에게도 그럴 만한 사연들이 많았나 보다.

 


태그:#우수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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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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