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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유러피언드림 세 번째 이야기는 바로 볼로냐 경제모델의 비밀이다. 인구 40만이 채 안 되는 이탈리아 북동부 중소도시 볼로냐. 1970년대 경제위기와 불황 속에 한때 빈민의 도시로 전락하기도 했던 곳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삭막하고 치열한 경쟁 대신 협동과 연대의 정신이 오늘날 볼로냐를 이끌었다. 일부 소수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경제에도 볼로냐가 던지는 시사점은 많다.

경제전문가와 협동조합 연구자 등으로 구성된 볼로냐 취재팀은 농업을 비롯해 소비자, 건설 등 각 분야 협동조합과 기업 등을 방문한다. 또 사회경제의 권위자인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볼로냐 대학) 등 주요 전문가들의 심층 인터뷰도 진행할 예정이다. [편집자말]
취재정리 : 이승훈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 이탈리아편> 특별취재팀

내리 쬐는 태양을 자양분 삼아 알이 굵어지는 포도와 그 열매를 매달고 있는 키 작은 나무, 건물 3층 높이는 족히 돼 보이는 거대한 와인 저장 탱크들.

볼로냐에서 북쪽으로 이탈리아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아우토 스트라다 디 솔레'를 1시간 가량 달리자 낯선 풍경과 마주쳤다. 이곳은 에밀리야-로마냐 주 캄페지네 지역. 세계 4대 와인협동조합인 '리유니트 & 치브'(Riunite & Civ, 이하 리유니트)의 본부가 있는 곳이다.

리유니트에서 생산된 와인은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 50여개국에 수출된다.
 리유니트에서 생산된 와인은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 50여개국에 수출된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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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짜리 아담한 건물 로비의 벽은 리유니트가 생산한 와인들에 수여된 '상장'들로 가득했다. 이탈리아의 와인 콩쿨에서 받아온 것들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재밌다. 마틸데 카노사(Matilde Canossa) 콩쿨. 중세 시대 이 지역을 지배했던 여성 귀족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럴 만한 것이 카노사는 물려받은 영지를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주고 노예 해방을 주장하는 등 에밀리아-로마냐 주의 협동조합 시스템의 밑바탕이 된 연대와 협동이라는 문화적 전통을 형성하는 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와인을 포장하는 공장 안은 달콤 쌉싸름한 와인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공장 밖은 물론 안쪽에도 최소 5000ℓ부터 최대 6만ℓ 들이 와인 저장 탱크 200여개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서는 리유니트에 속해 있는 각 양조장들이 생산한 와인이 모여 맛과 색을 균일하게 맞추는 등 마지막 출고 준비가 이루어진다. 병에 담겨 포장을 끝낸 와인은 '리유니트'라는 문구가 선명한 라벨을 달고 소비자들과 만나게 된다. 이 공장에서만 1년에 4500만 병의 와인이 생산된다. 

신뢰와 연대... 농민이 만든 와인협동조합 리유니트

생산된 와인은 '리유니트'가 로고가 박힌 라벨을 달고 소비자들과 만난다. 리유니트는 한해 1억1000만병의 와인을 생산한다.
 생산된 와인은 '리유니트'가 로고가 박힌 라벨을 달고 소비자들과 만난다. 리유니트는 한해 1억1000만병의 와인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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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유니트는 농민들이 출자해서 만든 와인협동조합이다. 1953년 9개의 양조장의 연합체로 출발한 리유니트에는 현재 25개 양조장연합과 2600명의 포도 재배 농민들이 가입돼 있다. 리유니트 전체로 따지면 와인 브랜드만 9개, 한해 1억1000만 병의 와인을 생산한다. 연간 매출액은 1억4000만 유로에 달한다. 생산된 와인들은 이탈리아는 물론 미국, 독일, 영국 등 전 세계에 수출된다. 저렴한 가격과 와인의 높은 질을 인정받은 덕이다.

리유니트가 생산한 와인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은 데는 상호 신뢰와 연대를 기반으로 한 협동조합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영세한 규모로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만들어 와인을 유통시킬 힘이 없었던 농민들과 개별 양조장들은 이윤은 물론 손실까지 모두 나눠 갖는 공동운명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된 농민들은 단순히 양조장에 포도를 납품하고 마는 생산자가 아니라 조합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참여하는 주체가 됐다. 조합원들은 조합의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총회에서 1인 1표의 권리를 행사한다.

뿐만 아니라 리유니트 조합원들은 다른 와인 생산 업체에 포도를 공급하는 것보다 더 높은 값을 받는다. 물론 생산된 포도나 와인의 질에 따라 값이 결정되지만 품질 평가는 전문가는 물론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별도의 품질평가위원회에서 투명하게 이루어진다. 생산물에 대한 대가는 물론 와인 판매에 따른 수익금의 일부도 분배 받는다.

조합원들은 다양한 지원 혜택도 누린다. 포도밭 확장, 새 농기계 구입, 포도 품종 전환에 드는 비용을 조합에서 시중보다 2%p 싸게 빌려준다. 농민들이 레스토랑 등 새로운 사업에 진출할 때도 마찬가지다. 양조장들도 새로운 시설 투자에 들어가는 자금을 조합으로부터 조달할 수 있다. 조합원에게 분배되지 않은 나머지 수익금은 조합 내에 재투자해 경쟁력 강화에 쓰인다. 

협동조합의 힘... 품질은 올리고 가격은 내리고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 캄페지네 지역에 위치한 세계 4대 와인협동조합인 리유니트 본부. 거대한 와인 저장 탱크들이 늘어서 있다.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 캄페지네 지역에 위치한 세계 4대 와인협동조합인 리유니트 본부. 거대한 와인 저장 탱크들이 늘어서 있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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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보통의 기업들과 달리 협동조합 리유니트의 존재 목적이 이윤 극대화가 아니기에 가능했다. 리유니트의 경영책임자(General Directer) 루세띠 반니씨는 "리유니트는 조합원들이 생산한 상품, 즉 포도나 와인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조합원의 만족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1년에 20여 톤의 포도를 생산하는 영세한 농민 조합원간의 수평적 네트워크와 생산-가공-유통을 아우르는 협동조합의 수직적 네트워크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조합원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리유니트의 규모는 꾸준히 커졌고, 이를 통해 품질은 올리면서도 대량 생산을 통한 비용 절감이 가능해지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된 것이다.

여기에 독자 브랜드화와 조직적 마케팅이라는 날개를 달면서 리유니트는 다른 기업보다 원재료에 높은 원가를 지불하면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리유니트가 1953년 설립 이후 57년 동안 한 번도 위기를 겪지 않은 것은 이 같은 협동조합 시스템이 발휘하는 힘 덕분이었다.

루세띠씨는 "역사적으로 볼 때 와인 생산은 협동조합 시스템이 최적의 방법"이라며 "리유니트의 조합원들, 즉 포도를 생산하는 농민들과 양조장 등 모든 구성원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물론 조합원들이 누리는 혜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조합원은 개인 매출액의 2.5% 출자금으로 내야 하고 만약 손실이 생길 경우 부담을 나눠져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 리유니트가 경영상 위기를 겪은 적이 없어 조합원들이 허리띠를 졸라맨 적은 없었다.

에밀리아-로마냐의 협동조합이 성공한 이유

농민들이 출자해 만든 와인협동조합 리유니트에서 만든 와인들. 이 제품들이 세계 시장에서 품질을 인정받은 데는 협동조합 시스템이 큰 힘을 발휘했다.
 농민들이 출자해 만든 와인협동조합 리유니트에서 만든 와인들. 이 제품들이 세계 시장에서 품질을 인정받은 데는 협동조합 시스템이 큰 힘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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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에서의 와인협동조합의 순조로운 정착에는 문화적 전통과 정치적 조건들도 큰 영향을 미쳤다. 카노사의 사례처럼 중세 때부터 내려오는 연대와 협동의 문화, 정치적으로 주류를 형성한 좌파 정치 세력의 지원은 든든한 힘이 됐다. 

마티아 미아니 페라라 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볼로냐가 속해 있는 에밀리아-로마냐 주는 중세시대부터 토지 공유 전통 등 연대와 협동을 바탕으로 한 신뢰라는 사회적 자산이 형성돼 있었다"며 "특히 2차 세계대전 후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파 정당들이 협동조합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순항을 거듭하던 리유니트도 2008년 유럽의 금융위기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내수 침체로 인해 이탈리아의 와인 소비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리유니트는 해외시장 진출 확대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경영책임자 루세띠씨는 "우리는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왔다"며 "최근에는 러시아와 중국으로 수출 물량이 늘어나고 있어 내수 시장에서의 부진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 이탈리아편> 특별취재팀: 현지 취재 : 김종철 기자(팀장) 이승훈 기자, 편집 자문 : 정태인 경제평론가, 신성식 경영대표(아이쿱 생협), 정원각 사무국장(아이쿱 생협연구소)


태그:#리유니트, #볼로냐, #유러피안 드림, #이탈리아,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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