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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지난 2000년 2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시민참여저널리즘의 새 장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매년 시민들과 함께 한 참여민주주의의 현장 속에서 의미있는 뉴스의 인물들을 찾아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해왔습니다. 그들의 면면이 바로 <오마이뉴스>가 만들어낸 지난 10년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에, [창간 10돌 기념] '올해의 인물, 그 후'를 조망하는 연속 기획기사를 마련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말]
"현재 부안을 이야기 하는데 옛 사람을 찾아서 되겠습니까."

핵반대대장군과 여장군 2003년 11월 2일 부안군민들이 핵반대 촛불집회 100일째를 기념하여 수협 앞에 세운 장승이다. 이 당시 수협은 촛불집회가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 핵반대대장군과 여장군 2003년 11월 2일 부안군민들이 핵반대 촛불집회 100일째를 기념하여 수협 앞에 세운 장승이다. 이 당시 수협은 촛불집회가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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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힘없지만 강단있는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 바로 2003년 새만금 간척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65일간 '삼보일배'를 하고 부안 핵폐기장 유치 반대를 투쟁현장을 지켰던 문규현 신부의 육성이었다. 

문 신부는 2009년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단식 농성을 하던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11월에 퇴원하여 현재는 전라북도 전주에 위치한 평화동성당에 요양 중이다.

문 신부는 지속적인 <오마이뉴스>의 취재요청에도 "언론에 노출되고 싶지 않은 내 심정도 이해해 달라"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는 문 신부가 2003년 혼신을 다해 지켜내려고 했던 부안의 과거와 현재를 재조명하기로 한다.

부안 시민들은 핵폐기장 유치는 백지화했지만 상당수가 새만금 간척사업에 찬성해 2006년 방조제가 완공되었고 올해 방조제 개공식을 앞두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군민들 간에 이견이 생기면서 낭설이 나돌아 그 후유증으로 고통 받기도 했다.

부안핵폐기장 반대자들 얼굴도 못 든다고? "천인공노할 소리!"

줄서있는 택시 17일 오후 부안 읍내 터미널 앞 택시들이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 줄서있는 택시 17일 오후 부안 읍내 터미널 앞 택시들이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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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핵폐기장 반대하는 사람들은 얼굴도 못 들고 다닌다구요? 우리는 여전한데 무슨 천인공노할 소리를!"

부안시에 위치한 버스터미널. 17일 오후에 만난 터미널 앞에 서 있던 택시 운전기사 정아무개(45)씨가 기자의 질문에 펄쩍 뛰며 되물었다. 정씨는 2003년 당시 부안에서 핵폐기장 유치 반대 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전적까지 있었다.

그는 "부안사람들이 핵폐기장 유치를 막은 일은 여전히 많은 부안군민들에게 자부심이다"면서 "우리는 그 당시 핵폐기장이 지닌 위험성이나 환경파괴의 가능성을 이미 알고 있었고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절차를 어긴 채 정책을 밀어붙이려 한 정부에 저항한 것"이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날 취재 현장은 매우 흥분된 분위기였다. "부안 핵폐기장"이라며 말을 꺼냈을 뿐인데도 기자를 중심으로 정씨 외 4, 5명의 택시 기사들이 모여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택시 기사는 "현재까지도 택시기사 중 핵폐기장 유치를 찬성한 사람들은 이 부안읍 근처를 돌아다니지를 못한다"면서 "찬성했던 이들의 음식점, 상점들이 대다수 부안 시민들이 외면해 뚝 끊어져 상당수 이곳을 떠나야 했다"고 밝혔다.  

'부안 사람들이 핵폐기장 백지화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다'는 소문은 핵폐기 유치를 막은 이후부터 나돌았다. 부안에서 핵폐기장 유치가 불발로 결정된 이후 경주로 핵폐기장이 설치되면서 그 대가로 3000억의 정부 지원금이 경주에 흘러가자 부안 사람들이 심히 후회했다는 것이다.

그 소문은 올해 2월 1일 정운찬 국무총리 주재로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12차 회의에서 세종시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이용되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세종시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부안의 핵폐기장 반대 사례를 언급하면 설득력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이제는 텅빈 부안읍,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외려 상권은 죽어"

부안 수산시장  부안 재래시장에 위치한 수산 시장. 19일 2시경 수산시장을 둘러본 결과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한산했다.
▲ 부안 수산시장 부안 재래시장에 위치한 수산 시장. 19일 2시경 수산시장을 둘러본 결과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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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간척사업하면 관광명품도시 부안이 될 거라구요? 부안이 얼마나 홍보가 되었나요? 지금 당장 서울만 가도 부안 아는 사람 있습니까?"

부안 재래시장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특히 오후 다섯시 무렵이 되자 절반 이상의 상점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또 단 한 사람도 타지 않은 버스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버스 터미널 앞 택시는 멀뚱히 손님을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었다.

특히 기이한 현상 중 하나는 해안가에 위치한 부안의 어시장에서 부안산 어패류를 찾기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방조제 완공 후 갯벌이 마르자 더 이상 특산품이던 '부안산' 백합, 가무락 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9일 오후 만난 수산물 소매업을 하는 김아무개(51)씨는 "갯벌이 메마른 이후 부안 어시장에서 부안산을 찾기가 어렵다"고 밝혔다. "맨손 어업을 못하는 계화도 주민들이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진 후 재래시장을 찾지 않아 시장 경제도 악화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새만금 간척사업을 하면 부안이 관광도시로 거듭날 것이라는 정부 주장에 대해 "새만금 방조제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게 되면 부안에 들르지 않고 더 큰 도시로 가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며 "벌써부터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부안을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고 전했다.

반면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민들도 있었다. 부안 재래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서 아무개(79)씨는 "부안이 지금은 경제가 어렵지만 20년 이후에는 새만금 사업으로 발달하지 않겠느냐"며 "계화도나 해안가 사람들 경제가 어렵긴 하지만 우리 세대가 조금 손해를 보면 다음 부안민들은 보다 잘 살게 될 것이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그러나 서씨 역시 현재는 새만금 간척사업의 영향으로 상권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씨는 "솔직히 갯벌이 마르기 전에는 부안을 찾아 돈도 종종 쓰고 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 부안 읍내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10여 명의 부안 주민들을 인터뷰한 결과 '새만금 간척사업'의 경제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상황이었다. 부안 재래시장의 한 떡집 주인 A씨는 "새만금 간척사업이 부안 경제에 도움이 될 줄 알고 찬성했는데 정작 외지 사람들만 혜택을 보고 있다"며 "이 지역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새만금 간척사업에 기대를 걸었지만 지금은 다들 믿지 못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안 읍내  부안재래시장의 저녁 6시경 풍경. 절반 이상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 부안 읍내 부안재래시장의 저녁 6시경 풍경. 절반 이상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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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핵폐기 백지화,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남겼다"
[인터뷰]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위 사람들

부안 핵폐기 사태 이후 7년여가 흘렀다. 언론이 그들을 잊은 그 시간 동안에도 부안군민들은 부안에서 살았고 같은 지역민끼리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부안 핵폐기장 백지화의 핵심 세력이었던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위'(이하 대책위), 그들에게서 2003년 부안사태, 투쟁, 2006년 새만금 방조제 완공 과정에 대해 들어봤다.

[고영조 전 대변인] "방조제 완공 이후, 간척사업 회의 느끼는 사람 많아"

고영조 전 대변인 17일 오후에 만난 고영조 전대변인의 활짝 웃는 모습. 고씨는 "이날 정치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 했다.
▲ 고영조 전 대변인 17일 오후에 만난 고영조 전대변인의 활짝 웃는 모습. 고씨는 "이날 정치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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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핵폐기장 백지화에 성공한 이후 대책위 사람들은 어떻게 지냈나.
"다들 본래 그들의 삶으로 돌아갔다. 나는 과일가게를 하고 있다. 김종성 집행위원장은 생업이었던 농사에 전념하다가 6월 지방선거 구의원 출마를 현재 준비 중에 있다. 다만 당시 대책위가 부안 핵폐기 백지화에 성공했지만 부안 지역민들 간에 찬성, 반대로 나뉘어 진통과정을 겪으면서 정작 부안을 위한 현실적 대안을 내놓는데 집중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그 점이 지금도 아쉽다."

- 문규현 신부님과 어떻게 인연이 닿아 함께 핵폐기장 백지화 운동을 하게 되었나.
"2003년 여름 문 신부님께서 삼보일배를 하고 계실 당시 부안에는 핵폐기장이 설치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이미 돌고 있었다. 그 당시 부안군민들 주체로 대책위를 결성했고  문 신부님께 도움을 청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삼보일배로 평택에 계시던 문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외지사람이 그런 일을 해서 되겠느냐'며 거절하셨다.

그 후에 문 신부님께서 허락하셔서 우리가 부안성당을 근거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성당에서 매일 30여명의 사람들이 자고 밥 먹고 그랬다. 그 당시 문 신부님은 종교인으로 성직자로서 불편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색을 한 번도 안 내비치셨다. 특히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인 가정사와 대소사를 일일이 챙겨주셔서 그게 기억이 많이 남는다."  

- 부안 사람들이 환경, 종교단체에 의해 이끌려서 핵폐기장 유치 반대를 했고 대다수 부안민이 후회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사실인가.
"그 당시에 부안민들이 환경, 종교 단체에 이끌려 핵폐기장 유치를 반대했다는 주장은 부안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놀아나는 꼭두각시 정도로 생각하는 논리다. 2004년 핵폐기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를 했을 때 부안군민 72%가 참여를 했고, 91.9%가 반대표를 던졌다. 지금도 부안핵폐기장 결정은 시민이 주체적으로 움직여 합의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당시에 환경 단체나 서울의 시민 사회에 섭외를 한 것도 지역 주민들인 대책위원회가 먼저 시도한 것이다.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부안군민이었고 지금도 대다수 부안군민들은 그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핵폐기장 백지화는 부안민에게 민주주의의 실현 그 자체였다.

- 부안군민들이 핵폐기장 유치는 반대한 반면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지역이기주의라는 비판이 많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부안 핵폐기장 설치와 새만금 간척 사업은 환경이 파괴될 수 있다는 측면으로 보면 동일선상에 있어 일면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역 주민 입장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새만금 간척 사업은 근 20년간 부안 지역에서 논의되었던 문제였던 반면 핵폐기장의 경우는 부안군민의 의견수렴 과정이라는 민주적 절차를 생략한 것이었다. 그 당시 김종규 전 부안군수가 계속 핵폐기장 유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다가 하룻밤 사이에 입장을 바꿔버리자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부안사태가 벌어졌다. 개발콤플렉스가 있었던 전라도민 사이에서 전라북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에 '새만금 간척사업'은 당시에 호소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 2006년 방조제가 완공되었고 2010년 4월에 부안에서 첫 새만금 방조제 개공식이 열린다고 들었는데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지역민의 여론은 어떤가.
"초창기 새만금 간척사업을 찬성했던 분위기와 달리 현재는 많이 회의적으로 바뀌었다. 새만금 개발 결정이 난 때는 80년대 후반이었고 그 당시에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거나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방조제가 완공된 이후로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아졌다.

현재 새만금 간척 주변 땅은 대다수가 외지인들 소유다. 대다수 어민들은 간척사업 때문에 외려 본업을 그만두고 식당 종업원, 일용직, 청소부로 살아가고 있다. 외지인들은 부안지역에 투자는 할 지 모르지만 소비를 하지는 않는다. 그 탓에 정작 부안지역 내의 소비 주체였던 어민은 빈민으로 전락하고 부안 지역민들의 삶은 더 곤궁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역 순환 경제구조가 깨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종성 전 위원장] "보따리 들고 출근하듯 집회 오신 어르신들에 감동"

김종성  김종성 전집행위원장의 모습. 그는 이날 '핵폐기 보따리'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 김종성 김종성 전집행위원장의 모습. 그는 이날 '핵폐기 보따리'이야기를 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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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폐기장 백지화 운동할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2003년 여름 부안 사태가 벌어지고 부안민들이 고속도로 점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뙤약볕이 심해서 굉장히 뜨거웠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까지 지팡이를 들고 오셨다. 그때 수 천명이 모였는데 핵폐기장을 막아야겠다는 군민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촛불집회를 할 당시에도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서는 '핵폐기 보따리'라는 게 유행했다. 보따리 안에 깔개, 무릎덮개, 따뜻한 보온병, 머리띠 등 시위용품이 있었고 매일 보따리를 들고 오가는 시민이 하루에 3천여명 됐다. 250여회의 촛불집회에 개근한 시민도 있었고. 그 보따리를 들고 출근하듯이 오는 어르신들을 뵈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

- 오늘 새만금 간척지인 계화도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왜 다녀온 것인가?
"계화도 주민들의 상태가 매우 심각해서다. 2006년 물막이 공사 이후에 특산품이었던 '생합'이 사라졌고 상대적으로 바지락이 많아졌다. 특히 바지락은 작년에 많이 나왔는데 멸종 위협을 느끼면 번식을 위해 그런 현상이 벌어진다고 한다. 실제로 방조제 때문에 갯벌에 물이 항상 차 있으니까 한 달에 한두 번 물 빠질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물 있는 상태에서 선주들이 흡입기계로 바지락을 빨아들여 싹쓸이를 해간다. 그 탓에 흡입기계를 살 수 없는 맨손 어업자들은 한 달에 한두 번 갯벌에 나서는데 그마저도 어폐류를 찾기가 어렵다. 메마르지 않은 갯벌조차도 자생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가 분열되어 약자인 맨손어업자들의 생계가 더욱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계화도 지역 주민이 적은 포스트잇  계화도 지역 주민이 적은 포스트잇. 수산업 불가능, 수산자원 고갈, 바다가 미쳐서 모기가 많다 등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한 지역주민의 고민이 적혀있다.
▲ 계화도 지역 주민이 적은 포스트잇 계화도 지역 주민이 적은 포스트잇. 수산업 불가능, 수산자원 고갈, 바다가 미쳐서 모기가 많다 등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한 지역주민의 고민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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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안이 현재 군민 간의 분열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나름의 해결방안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달라.
"핵폐기장 반대 운동을 할 당시에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반발이 심했고 그 대립구도가 사실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지역 주민간 자치, 연대의 흐름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는데 1년간의 다툼 과정에서 서로의 연대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이어진 2006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핵폐기장을 찬성, 반대했던 이들이 나뉘면서 주민들끼리의 내부분열이 더 가속화되었다. 이번 지방선거에도 핵폐기장 유치를 하고자 했던 김종규 전 부안군수가 군수 후보로 출마를 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찬반 대립 구도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부안사태가 보여준 민주주의의 가능성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앞으로 자치역량을 높이고 연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엄민 기자는 11기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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