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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터 안에 만들어진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날 때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또한 경희궁 안쪽에 있던 서울중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한 이후에 세워진 서울시립미술관의 경희궁 분관 역시도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전시장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아쉽게도 경희궁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 서울역사박물관 아쉽게도 경희궁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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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법원 터에 세워진 덕수궁 옆의 서울시립미술관 역시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이곳은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곳이다.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가장 파괴가 심한 곳이 바로 경희궁이기 때문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의 건물이 함께 있었으나 융복전과 집경당은 일본의 권력자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나머지 건물들은 1910년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 귀족들의 자제들을 위해 설립된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또 다시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원래의 위치보다 좀 더 안쪽 왼쪽으로 이전 복원 되었다.
▲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원래의 위치보다 좀 더 안쪽 왼쪽으로 이전 복원 되었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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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전은 남산의 일본 절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 안의 정각원으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인 남산의 박문사 정문으로 갔다가 해방이 된 다음에는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오랫동안 쓰이다가 겨우 경희궁의 정문으로 그 위치를 옮겨왔다.
                   
경희궁이 정전인 숭정전 현재 숭정전은 동국대 내에 있는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고, 이 것은 도면대로 복원한 신품이다.
▲ 경희궁이 정전인 숭정전 현재 숭정전은 동국대 내에 있는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고, 이 것은 도면대로 복원한 신품이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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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서울시가 발굴 조사를 계속하여 복원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 장시간 동안 정부 기관인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원, 서울시교육청 등이 들어서 있어 복원의 의지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숭정전의 용상과 오봉일월도  이것도 신품이다.
▲ 숭정전의 용상과 오봉일월도 이것도 신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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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이 경희궁의 정중앙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서울시가 역사를 말할 자격도 철학도 없는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3개의 기관 정도만 자리를 비운다고 하면 경희궁은 어느 정도 복원의 틀이 이루어지는데도 말이다. 정부기관이 좋은 자리를 전부 차지하고 있으니 복원을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더 수월한데도 말이다.
                 
숭정전 천정의 용 두마리  새롭다
▲ 숭정전 천정의 용 두마리 새롭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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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동국대 안의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옮겨오지 못하고 원래의 설계대로 복원이 된 건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부가 너무 깨끗하고 용상과 뒷면의 오봉일월도, 천정의 용 문양 또한 너무 또렷하다. 새롭다는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왠지 새로움이 주는 감동은 적었다.
              
서대문이 있던 자리  돈의문 터
▲ 서대문이 있던 자리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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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을 둘러 본 다음 서울 성곽의 4대문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서대문이라고도 불리던 돈의문 터 앞에 선다. 누구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문'이다. 서울시가 최근 복원을 한다고 하니 기쁜 일이기는 하다.
        
보이지 않는 돈의문 서대문을 알리는 표식
▲ 보이지 않는 돈의문 서대문을 알리는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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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철거된 문으로 대략적인 모습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큼지막하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 지붕집의 초루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한 모양이었다고 전한다.

이제 삼성병원 안에 있는 경교장으로 들어간다. 백범 김구 선생의 개인 사저이다.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이라 하였으나, 선생이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경교장  백범 김구 선생이 쓰던 경교장
▲ 경교장 백범 김구 선생이 쓰던 경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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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주도했다.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건물의 중요성이 재평가되면서 2005년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2층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선생의 집무실이 원형대로 복원되어 기념실로 운영되고 있다.
            
스위스대사관 난파 기념관 가는 길에서 찍은 모습
▲ 스위스대사관 난파 기념관 가는 길에서 찍은 모습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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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을 나와 서울성곽의 옛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우측의 서울시교육청과 서울복지재단을 지나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전진하면 좌측에 스위스대사관이 있고 윗길로 가면 홍난파 가옥이 나온다. 난파는 일본에서 도쿄음악학교에서 공부한 후 귀국, 1920년 '애수'를 작곡하고,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이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 이화여전 강사, 경성보육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35년부터 '백마강의 추억' 등 모두 14곡의 대중가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결성된 친일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했고, 1938년에는 대동민우회, 1941년에는 조선음악협회 등에서 친일활동을 했다.
               
난파의 집 홍난파의 집
▲ 난파의 집 홍난파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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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음악가였지만, 친일 역사로 우리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난파의 집은 송월동 독일인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인들이 건축한 건물로 난파가 말년에 6~7년 간 살면서 음악 활동을 한 곳이다.

2층짜리의 아담한 난파의 집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기념관으로 평일 낮에는 자유 관람이 가능하다. 1년에 1~2차례 종로구 주관으로 음악제가 열리기도 한다. 정남향이라 햇살이 좋고, 지하층은 현대식 반지하층 개념으로 활용이 좋은 편이다. 서쪽 벽은 담쟁이가 좋다. 

난파 기념관 뒤쪽에는 구세군 영천영문교회가 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감리교 목사이던 윌리엄 부스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가 창시했다. '그리스도교 전도회'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상전도를 한 데서 기원한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자선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하였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운영하고 있다.
               
구세군 영천교회  구세군
▲ 구세군 영천교회 구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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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1908년 영국에서 파견된 로버트 호가트 정령이 이끄는 10여 명의 사관이 선교를 시작한 이래, 의료선교, 고아원, 양로원, 육아원, 교육기관을 통해 포교에 힘쓰고 있다.

영천교회를 지나 사직터널 위를 지나면 임진왜란 당시의 3대 명장인 권율 도원수의 생가 터가 나온다. 현재는 집의 흔적도 전혀 없지만, 그 자리에 4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듯하다.

권율 장군을 떠올리면 어린 시절 그의 옆집에 살았던 장군의 사위 백사 이항복 선생이 떠오른다. 백사는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를 오랫동안 전하고 있다.

어린 시절 이항복의 집 감나무가 권율 장군의 집 담장을 넘어 자라고 있어, 그 집의 하인들이 함부로 감을 따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권 대감 집 하인들이 주인의 힘을 믿고 감을 따고도 돌려주지 않았고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형국이 되었다.

화가 난 어린 이항복이 권 대감 집으로 달려가 문 속으로 손을 잡어 넣고는 "대감님 이 손이 누구의 손입니까?" 라고 물어본다. 갑자기 문종이 사이를 파고든 어린 소년의 손에 장군은 놀랐지만, "당연히 너의 손이다."라고 말한다.
                 
권율장군 생가터의 은행나무  가을에 오면 은행이 장관이다. 이웃에 권율장군의 사위인 이항복의 집도 있었을 것 것이다.
▲ 권율장군 생가터의 은행나무 가을에 오면 은행이 장관이다. 이웃에 권율장군의 사위인 이항복의 집도 있었을 것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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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어린 항복이 "그런데 왜 저희 집의 감을 대감님 집의 종들이 함부로 따 가냐"고 따진다. 이에 권 장군은 노복들의 잘못된 행동을 알게 되고, 어린 소년의 재주와 기지에 감동 하게 되어 훗날 사위로 삼는다는 이야기다.

은행나무 옆에서 임진왜란으로 전국을 누비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발로 뛰던 권율 장군과 이항복 대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시 종로/중구 걷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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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