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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30주년 공연을 맞아 그의 공연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에세이 연재입니다. [편집자말]
ⓒ 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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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 끄트머리에 있는 갯마을 도두리이다. 일제강점기 때, 사람들은 갯물이 들고 나던 곳에 둑을 쌓았다. 소유와 경작의 문제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제 손으로 일군 땅에 대한 애착만으로도 너끈히 궁색한 살림의 고단함을 버텨낼 수 있었다.

마치, 식도처럼 깊숙이 육지를 파고들어온 서해의 끝자락에 도두리가 있었다. 둑을 쌓아 만든 간척지 위에 위태롭게 세워진 마을이어서 비만 오면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중에 징이 울리고 마을이 소란스러워지면 어김없이 둑이 터진 것, 어른들은 횃불로 어둠을 밝히며 가마니와 삽을 들고 터진 둑을 막기 위해 바닷가로 달려가곤 했다. 집에 남겨진 아이들은 열린 대문을 바라보며 밤새 알 수 없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고, 너나 할 것 없이 흙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동이 튼 뒤였다. 어른들은 그제야 비로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바다가 곁에 있었는데도 이 마을 사람들의 정서는 바다를 끌어안지 못했다. 고기를 잡는 대신 농사를 지었고,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곤궁을 겨우 면했다. 바다는 생활의 터전이라기보다는, 생활의 터전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정서는 어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으니, 밥만 먹으면 바닷가로 뛰어가 고기를 잡거나, 개흙 진창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곤 했다. 더러 돌투성이 돌산에 올라가 해지는 서해를 바라보며 외부에 대한 동경을 품기도 했으리라.

정태춘의 시와 노래는 이러한 도두리의 정서가 출발점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 속에 녹아 있든 간에 그의 노래에 담긴 '애절' 혹은 '울림', '자유'의 정서는 도두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절창들은 대개 유년기의 정서와 이후 청년기의 '떠돎'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그에 관한 이야기 또한 도두리를 아주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정, 박을 만나다

1집 <시인의 마을>을 내고 음악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9년 어느 날, 정태춘은 박은옥을 만난다. 이후,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부부가 함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왔는데, 어느덧 30년이란다. 무탈하며 같이 살기도 힘든 시간을 노래를 부르며 함께 지나온 것이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라, 나는 지금 3년은 너무 짧고 30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긴 탓에 오로지 외길 함께 걸으며 노래한 30년이라는 시간만이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1978년 초가을 어느 날, 아직 어린 나는 한 손에 신문지로 돌돌 말린 돼지고기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엔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케키를 들고 먼지 폴폴 날리는 아리랑고개를 넘고 있었다. 아리랑고개는 버스 정류장, 뚱뚱한 표씨 아줌마네 정육점, 다방이 있던 함정리라는 마을과 도두리를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도두리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야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고, 돌아올 때도 이 고개를 넘어 다시 선말고개와 말랭이고개라 불리던 비탈길을 두 개나 더 지나야 비로소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 아는 얼굴 하나가 비스듬히 기타를 둘러메고 개척 교회가 있던 비탈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흰 고무신을 신고, 신발이 투정이라도 부리듯 먼지를 일으키며 고갯길을 내려오던 황톳길의 기타맨, 정태춘이었다. 열두 살 소년의 눈에도 고독과 우수가 비쳤을까. 왠지 외로워 보였다. 아니, 지루해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살짝 아는 체를 하곤 곧바로 버스정류장 쪽으로 발을 끌듯 걸음을 옮겼다.

며칠 후, 나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 '시인의 마을'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찌나 신기했던지 갑자기 쌀을 씻던 엄마를 큰소리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 사랑방에서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불렀던 형 친구가 라디오에 나오다니….

이듬해, 나는 그의 얼굴을 텔레비전에서도 보게 되었고, 삼촌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의 조카를 통해 듣기도 했다. 열두 살 소년의 나이도 어느새 마흔을 넘겼으니, 벌써 30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정·박, 거짓말 같은 30년 세월

2006년 3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미군기지 확장예정지에서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국방부가 굴착기를 동원해 논에 구덩이를 파자 가수 정태춘(오른쪽)씨가 현수막을 들고 서 있다.
 2006년 3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미군기지 확장예정지에서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국방부가 굴착기를 동원해 논에 구덩이를 파자 가수 정태춘(오른쪽)씨가 현수막을 들고 서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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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이 함께 노래한 지 30년이 되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들린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늘 우리 곁에 있었기에 3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천생 시인인 한 남자와, 그 남자와 노래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밖에 모르는 한 여자가 30년 동안 함께 노래를 불렀다. 30년이란 시간을 재가며 그들의 나이를 가늠하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영원한 청년이요, 또 다른 한 사람은 한없이 부드러운 4B연필 같은 순한 소녀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들과 이야기할 때면 한참 어린 내가 더 늙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 정태춘 박은옥을 이야기할 때 초기의 서정성 짙은 노래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현실 참여적인 노래들로 연대표적인 구분을 짓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가 듣고 보는 그들의 삶은 재미없을 정도로 늘 한결같다.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듯, 수많은 예술가들이 다음 세대에게 제자리를 내어주며 사라져갔다. 하지만, 정태춘 박은옥은 '묵묵부답' 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살아서 묵묵히 제 갈 길 걷는 걸음걸이로 사표가 되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당사자가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타인이 보는 눈은 비교적 자기 자신보다 객관적이다.

몇 해 전,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문화예술운동을 함께 하며 나는 답답할 정도로 곧은 그의 의지와, 더불어 아주 작은 냉소에 힘들어하는 정태춘의 내면을 훔쳐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의 노래 인생 30주년이 되던 지난해에도 그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기념공연도 하질 못했다. 박은옥씨를 비롯한 주변 지인들이 그냥 지나치기에 너무도 서운해서 몰래 조촐한 축하 자리를 준비하기도 했었다.

박후기 시인
 박후기 시인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가 30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먹먹한 우리네 가슴 속을 읽어주는 따뜻하고 서글픈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들이 욕을 한다 해도 나는 충분히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정·박 30주년 기념공연'은 이번 한 번뿐이다. '한 고집' 하는 '외곬 정태춘'을 생각하면 다시는 그들의 공연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를 테니, 가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겨야겠다. 첫차는 모르겠지만, 떠나간 버스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므로.

덧붙이는 글 | 박후기 시인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에서 나고 자란, 정태춘의 고향 후배이다. '신동엽창작상'을 받았으며 시집으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가 있다.



태그:#정태춘, #박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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