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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30주년 공연을 맞아 그의 공연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릴레이 에세이 연재입니다. [편집자말]
 가수 정태춘, 박은옥씨가 2일 저녁 서울 중구 신당동 서울패션아트홀에서 열린 제3회 수다공방 패션쇼 '참신나다'에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가수 정태춘, 박은옥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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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만나야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는가 보다. 정태춘 박은옥 선생도 그랬다. 그러니까 2001년 내가 영국 런던에 있을 때였다. 당시에 나는 런던 남쪽 지역에 있는 한 농과대학에서 늦은 나이에 생태농업을 공부하고 있었다.

3월 어느날인가 서울의 민가협 총무로부터 전화가 왔다. 가수 정태춘씨가 딸(정새난슬)을 런던으로 유학 보냈는데 아이를 낯선 곳에 보내놓고 부모가 몹시 걱정하고 있다며 내가 좀 돌보아주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나 역시 런던에서 곁방살이 하는 처지였지만 우리시대의 음유시인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언들 못하겠느냐며 그러마 했다.

전화를 통해 슬이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그 후 며칠 동안 아무리 노력을 해도 통 연락할 수가 없었다. 뭔가 사연이 있으려니 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여름이 되기 전에 또 다시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엔 정 선생 부부가 직접 런던에 가니 안내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내게 정태춘은 그냥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70년대 말 엄혹한 시기에 서정적인 노래를 들고 가수로 데뷔했지만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가수라기보다 기타를 둘러맨 치열한 사회운동가였다.

더욱이 나 같은 양심수 출신에겐 친근한 벗이요 동지기도 했다. 그가 사회운동가로 입문할 무렵에 나는 기나긴 감옥살이를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좋아하고 만남을 원한다 해도 인연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정선생의 맨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출소했던 해 겨울에 열린 양심수 석방을 위한 인권 콘서트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연출연자와 관객으로 만난 것이어서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 다음해에 나는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초청으로 유럽으로 가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이역만리 외국 땅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마도 정선생 부부는 여름방학을 맞아 딸의 안부도 물을 겸 간만에 외유를 하는 듯 싶었다. 공항에서 만난 두 분은 평소에 사진으로 보던 소탈한 모습 그대로였다. 만나자마자 내가 부탁받은 임무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사연을 늘어놓으니 우리 딸이 원래 그렇다면서 허허 웃는다. 녀석은 제 아비와 관련된 사람은 무조건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해에 성공회대학에 입학을 해놓고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짜고짜로 영국엘 왔단다. 자세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유명한 아버지를 둔 슬이의 심경과 신세대 자녀를 둔 아비의 걱정이 어렴풋이 잡히는 듯 했다. 이틀 동안 나는 정선생 부부와 런던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오래간만에 제법 관광다운 관광을 했다. 첫날은 시내와 박물관 등지를 방문하고, 둘째날은 공원과 궁전을 둘러보았다. 떠나기 전에는 런던 한인학생회 모임에 얘기손님으로 초대받아 유학생들과 친교의 시간도 가졌다.

정선생은 성격대로 번듯한 관광지보다 시끌벅끌한 시장구경을 좋아했다. 이미 <인사동>이라는 노래를 통해 선생의 골동취미를 짐작한 바 있으나 외국에까지 와서도 이렇게 열심인 줄은 몰랐다.

시장을 거닐다가 만물상처럼 난전을 펼친 곳은 빠짐없이 들러 유심히 바라보기에 무엇을 찾느냐고 했더니 칼을 찾는단다. 오래 전부터 칼을 수집하고 있었다나. 그나저나 도검류는 비행기 반입이 어려워 수집 품목으로서 적절치 않을 텐데 참 유별나기도 하네. 가슴에 칼을 품고 사는 시대의 반항아로서 자연스러운 수집취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선생 부부와 함께 돌아다니다 보니 두 사람의 취미와 성격이 너무도 달라서 내심 놀랐다. 그동안 막연히 부부 듀엣이면 여러 가지로 비슷한 점이 많을 거란 추측이 여지  없이  부서졌다. 정선생은 선이 굵고 수줍음이 많은 전형적인 조선 남성인데 비해 박선생은 세심하고 인내심 많은 조선 여인이었다.

변변한 수입 없이 소위 '운동권 가수'로 살아온 정선생 곁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직업상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나름의 인내심과 남편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았다. 길거리를 많이 걷다 보니 박선생이 몸 여기저기가 저리고 아프다며 푸념을 하기에 정선생더러 좀 주물러 드리라고 권유하고 서울에 가서도 계속 좀 부인을 위해 서비스 하시라고 했더니 박선생은 펄쩍 뛰며 저 사람은 그런 짓 절대 안 한다며 눈을 흘긴다.

정선생 부부와 헤어지면서 품 안에 간직하고 있던 귀중한 CD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노르웨이의 민중가수 안네 그레테가 한국의 민중가수 정태춘에게 꼭 전해주라고 받은 물건이었다. 그녀는 내가 엠네스티 초청으로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며 인권 관련 증언과 강연을 하고 있을 적에 노르웨이에서 만난 여인이다.

노르웨이 국영방송은 1년 중 하루를 완전히 비워두고 그 해에 선정된 건실한 시민단체에게 방송권을 주는데 2000년에 노르웨이 엠네스티가 선정되어 하루종일 방송을 이용하여 모금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TV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국영방송이 시민단체에 일일방송권을 주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프로그램 중간 중간 방송되는 라이브 공연을 위해 스튜디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출연자들이 모두 노르웨이 최고의 인기가수들인데 무료출연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당시에 그들은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인권다큐를 만들어 방영하고는 생방송을 통해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위문편지를 보내준 엠네스티 지부 회원들과의 깜작 상봉을 연출했다. 그들과 감격적인 만남을 가진 뒤 진행자와 짤막한 토크쇼를 하고 무대를 내려오니 웬 장신의 여성이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건넸다. 자신이 그날 하루 종일 울려 퍼진 엠네스티 로고송을 만든 가수라며 자기 집에 나를 꼭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다. 키가 어림잡아 2m는 되어 보이는 그녀는 한 시절 노르웨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가수라는데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부른 노래의 가사를 읽어보니 우리의 <오월의 노래>보다 더 과격했다.

며칠 뒤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짐작대로 독신이었고 집은 초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응접실 벽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큰 그림이 마음에 걸렸다. 어린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의 머리를 들고 서있는 그림이었다. 우리 눈으로 보면 지독히 반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그림이었다. 그런 그림을 집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걸어 놓을 정도로 그녀는 기성사회에 대해 도전적이었다.

서재엔 가수답지 않게 사회관련 서적이 빼곡했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소수자의 인권 옹호를 위해 활약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정선생을 떠올렸다. 칠레에 빅토르 하라가 있고 노르웨이에 안느 그레테가 있다면 한국에는 정태춘이 있다며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건넌방에서 자신의 CD를 들고 와서는 손수 서명을 한 뒤 한국에 돌아가거든 이 CD를 그에게 꼭 전해주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선생은 어찌 알았을꼬? 내가 한국엘 돌아가려면 아직 멀었는데 미리 영국에 와서 받아갔으니!

귀국 이듬해에 펴낸 <야생초 편지>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내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즈음에 만난 정선생이 농담 섞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정태춘은 가고 황대권의 시대가 오는가."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 나는 그저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과 이렇게 사적인 농담을 나눌 만큼 교분을 튼 것만도 큰 영광으로 알고 있는 것을. 소원이 있다면 언젠가 우리 농장에서 환상적인 저녁노을이 펼쳐질 때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가 기타를 튕기며 직접 부르는 <시인의 마을>을 듣고 싶을 뿐이다.

- <야생초 편지> 저자.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

덧붙이는 글 | 정태춘 박은옥 공연은 10월 27일-11월 1일 정동이화여고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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