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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4월 21일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영국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3세. 다음날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는 이런 부고 기사를 내보냈다.

 

"(케인스에) 비견되는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를 찾으려면 우리는 아담 스미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그는 공공선이라는 대의에 진정으로 헌신한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당시 케인스의 라이벌이자 현재 한국 뉴라이트 세력의 사상적 지주의 한명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런 조사를 남겼다.

 

"그를 잃은 세계는 이제 더욱 초라해질 것이다."

 

케인스 사망 63년 만에 '불멸의 케인스 전기' 한국어판 출간

 

그리고 37년 후인 1983년 경제학 교양이 풍부한 한 역사가의 손에 의해 <배반된 희망, 1883-1920>이라는 이름으로 케인스 전기 1권이 출간됐다. 이후 <구원자로서의 경제학자, 1920-1937>(1992년), <영국을 위한 투쟁, 1937-1946>(2000년)이 출간됨으로써 케인스 전기 3부작은 모두 완결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케인스가 부정당했던 신자유주의 시기에 그의 전기가 출간됐다는 점이다. 어쩌면 저자는 '케인스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현재 영국 워릭대 정치경제학 명예교수인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역작인 케인스 전기가 18일 한국에서도 나왔다. 방대한 분량의 3부작을 40% 정도 줄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 1883-1946: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2003년)의 한국어판(고세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이 두 권으로 출간된 것. 케인스가 사망한 지 63년 만이다.

 

전세계적 금융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케인스의 전기가 한국에서 출간됐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위기극복의 구원자로 케인스를 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케인스는 전쟁과 대공황 속에서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통해 스스로를 조절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상식을 뒤엎고 '정부의 개입'을 강조함으로써 경제학의 관심사를 '시장'에서 '국가'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역자의 말대로 그동안 케인스주의는 "인플레이션, 공공부문과 노동조합 권력의 팽창, 비효율, 정부 실패 등과 동일시되며 조소와 경멸의 언어"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미국발 서브프라임사태를 시작으로 현실화된 전세계적 금융위기와 함께 케인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철학자적인 그의 면모에 더 주목하라?

 

스키델스키의 전기는 케인스의 진단과 처방을 현재의 금융위기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보다 케인스의 철학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에게 더 필요함을 일깨운다.  

 

"경제성장은 그것이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향상시키는 한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개인주의 철학이 전 경제체제를 지배해서는 안된다" 등을 비롯해 다음과 같은 '현대자본주의 비판'은 지금도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자본주의는 철저하게 불경하다. 내적 결속은 사라졌고, 공공정신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재산 소유자들과 이윤 추구자들로 뒤엉킨 단순한 집괴(集塊)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체제는 그저 웬만큼 성공해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

 

특히 케인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모두를 위한 부의 생산이라는 약속을 신속히 이행할수록 인류가 선한 삶, 즉 미래보다는 현재를, 수단보다는 목적을, 효용보다는 만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기가 그만큼 빨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저자인 스키델스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어느 지점까지는, 경제학과 윤리학이 서로 보조를 맞추지만, 일정한 소득수준을 넘어서면, 이 둘은 갈라지기 시작한다. 오늘날, 문화와 정신적 가치가 '돈에 대한 사랑'에 제물로 바쳐지는 서방세계의 무분별한 상업주의는, 그를 말할 수 없이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스키델스키는 편지·일기·비망록 등 방대한 자료들과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제대로 된 케인스의 모습을 되살렸다. '경제학자'와 '정치가'의 면모는 물론이고 그것의 밑바탕이 된 ‘철학자’의 면모도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시장의 역할도 맹신하지 않았고, 정부의 역할도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케인스의 관점은 정부개입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에 나선 전세계 정부에 의미있는 성찰을 던져준다.

 

그런 맥락에서 역자가 "케인즈 경제학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개입이 있어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국가개입이냐의 문제였다"고 지적한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영국 노동당 전문가가 4년간 공들여 번역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영국 노동당 전문가인 고세훈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가 4년간 들인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영국 노동당사>와 <복지국가의 이해>, <국가와 복지>,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등의 저서가 있으며,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번역한 바 있다.

 

고세훈 교수는 4년 전 미국의 한 대학도서관에서 케인스 전기 3부작을 읽고, 저자인 스키델스키에게 한국어 번역 의사를 밝혔다. 이에 스키델스키는 3부작 전기보다는 그것을 압축한 단행본을 번역해 보라고 권고해 지금 결실을 맺은 것이다.

 

고세훈 교수는 "내가 보기에 이 책은 경제학 비전공자들에게 경제학적 사유에 눈을 뜨게 할 만큼 충분히 경제학적이며, 경제학자들에게 자신들의 학문적 지식·가정·방법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인생관과 역사를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할 계기를 줄 정도로 충분히 교양적"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두 권에 걸친 1600여쪽의 방대한 분량이 독서하는 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 하지만 '제대로 된 케인스'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량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특히 지난해 1000여쪽에 이르는 <더 레프트 1848-2000 : 미환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뿌리와 이파리, 5만원)가 3000부 이상(1만원으로 환산했을 경우 1만5000부) 팔렸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케인스 전기의 선전도 기대해볼 만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1 - 경제학자.철학자.정치가

로버트 스키델스키 지음, 고세훈 옮김, 후마니타스(2009)


태그:#존 메이너드 케인스, #로버트 스키델스키, #고세훈,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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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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