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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쇠동은 서울시 강서구와 부천시 오정구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오쇠동은 서울시 강서구와 부천시 오정구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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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5호선 송정역에서 마을버스 3번을 타고 오쇠동 삼거리에 하차하면 서울과 부천, 두 지역에 모두 속하는 마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울특별시 강서구와 부천시 오정구로 나뉜 이곳은 오쇠동(리)으로 불렸다. (2008년 12월 현재, 부천시 오쇠리는 부천시 오정구 고강1동으로 편입된 상태고 서울특별시 오쇠동은 강서구 공항동(행정동)에 속해 있다.)

향나무와 들풀이 가득해 아름다웠던 오쇠동에 불행이 시작된 것은 1992년. 김포공항 옆에 위치한 탓에 공항시설구역으로 지정되어 오쇠동 주택 철거가 시작된 것이다. 골프장(9홀)을 건설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오쇠동 세입자들은 강압적인 철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한국공항공사(토지는 국가 소유, 업무 위임)를 상대로 거칠게 투쟁했다. 그런데 투쟁 중에 사고가 발생했다. 2002년 11월 25일 오쇠동 4남매가 화재로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세입자들은 방화라고 절규하며 진상규명을 촉구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결국 용역업체의 횡포와 계속되는 방화(2002년 화재 37건)로 오쇠동 주민들은 하나둘,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오쇠동은 사람들에게 잊힌 죽은 마을로 변해갔다.

죽은 마을, 오쇠동에 가다

사람들이 떠난 후 그대로 방치된 오쇠동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사람들이 떠난 후 그대로 방치된 오쇠동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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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쇠동 마을의 유래는 쇠노(쇠활)를 만들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쇠노를 만들던 시대이니만큼 먼 옛날이었을 것이다. 일터에서 쇠노를 만들던 사람 다섯 명이 도망쳤는데 그들이 이곳에 숨어들어와 오쇠동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전설을 머금은 오쇠동은 해마다 마을 향나무에 당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했다. 서울과 부천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던 마을은 크게 번창했다.

"일부가 김포국제공항 확장 부지로 흡수되었으며, 흡수되기 전에는 부천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매우 번성하였다. 아랫말, 웃말 등의 자연마을, 다리인 꽃다리, 골짜기인 도당골 등이 있었다. 꽃다리라는 명칭은 다리가에 사시사철 꽃이 피었다는 데서 연유한다. 보호수로는 수령 400년, 높이 12m, 둘레 3m의 향나무가 있는데, 김포국제공항 확장 이전에는 해마다 당산제를 지냈다." - 네이버 백과사전

지난 10일 둘러본 오쇠동에서는 그런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주택들은 하나둘 철거되고 이제는 다 쓰러져가는 주택 10여채 만이 덩그러니 남아 여기가 오쇠동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작고 아담했던 집들이 무너진 자리에는 어른 얼굴 높이의 철조망이 들어서 있었다. 사람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라도 하듯 철조망은 빼곡하게 둘러쳐져 있었다.

오쇠동에는 10분에 한 번씩 비행기 굉음이 들려왔다.
 오쇠동에는 10분에 한 번씩 비행기 굉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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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폭격을 맞은 듯 폐허가 되어 버린 집들,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진 집 속에는 버려진 가구와 가전제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런 부서진 주택 위로 거대한 비행기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올랐다. 오쇠동 인근 김포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들이었다.

오쇠동의 비극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일본 강점기였던 1942년, 일제가 대륙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곳에 군용비행장을 만들면서부터일 것이다. 군용비행장 건설에는 학동 근로 동원이라는 명목으로 어린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됐다. 나라 잃은 설움과 슬픈 역사의 피해는 고스란히 오쇠동 주민들의 몫이었다. 비행장이 건설된 후 오쇠동 주민들은 귀를 찢을 듯한 비행기 소음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었지만 오쇠동 주민들은 평화를 찾지 못했다. 1958년 4월, 일제의 군용비행장이 김포국제공항으로 개조된 것이다. 소음은 여전했고 소음공해 1급 지역이라는 오명이 따라붙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랜 삶의 터전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시끄러웠을지언정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고, 마지막 남은 오쇠동 주민들은 전한다.

1992년에 오쇠동 주변이 공항시설구역으로 지정되자 마을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골프장을 세우려는 한국공항공사와 부천시의 계획이 추진되었다. 오쇠동 주민들은 적은 보상비로 쫓겨나다시피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오쇠동에 골프장(9홀) 건설 계획이 있었다. 또 이착륙 방향에 국제기준 권고 사항인 완충목 지대를 건설하기 위해 오쇠동 주택 철거가 진행되었다. 현재 골프장은 사업 승인이 나지 않아 취소됐고 공항 완충목 지대 건설만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오쇠동 인근 지역 26가구(전부 세입자)들과 합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충목 지대 건설이 언제 실행될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다." 

한국공항공사 관계자는 오쇠동 철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결국, 승인되지 않은 골프장 건설 때문에 오쇠동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찾은 오쇠동의 삼거리 도로 앞 건물에서 세입자대책위원회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책위원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웃한 단층 상가 건물들 역시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양화점·닭갈비집·중화요리집이 있던 그곳은 사람들이 떠난 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오쇠동은 말 그대로 죽은 마을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려 보였다.

오쇠동의 과거를 추억하는 마지막 주민들

부서진 오쇠동의 한 주택. 철거가 끝난 후 공항 완충목 지대가 들어설 계획이다.
 부서진 오쇠동의 한 주택. 철거가 끝난 후 공항 완충목 지대가 들어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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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되어 인적이라곤 없을 것 같던 그곳에 남아 있는 세입자들이 있었다. 하나둘 부서져 이제 겨우 십여 채 정도만이 남아 있는 오쇠동의 주택에서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태극기가 현관문에 크게 걸린 대문 아래로 작은 개가 요란하게 짖었다. 쥐죽은 듯 고요한 오쇠동에 유일한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집에 남아 있던 사람은 조아무개(46)씨였다.

오래되어 낡았지만 조씨에게 오쇠동의 집은 어떤 곳보다도 마음 편한 안식처였다. 방 앞에 가득 쌓인 연탄은 그의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하지만 조씨는 내년 9월까지 집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다.

"20년 넘게 오쇠동에서 살았어. 예전 오쇠동은 많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지. 그런데 이제 10여 가구만 남고 말았어. 나도 내년 9월까지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걱정스럽다."

한국공항공사는 오쇠동 세입자들에게 20만원에서 300만원의 보상비를 주고 세입자들을 내보냈다고 했다. 그나마 300만원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년 이상 된 세입자들만 받을 수 있었다. 그 이외의 세입자들은 20만원의 이사비만 받고 쫓겨나야 했다.

처음에는 세입자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투쟁했지만 용역업체의 횡포와 계속되는 방화 앞에서 하나둘 떠나고 이제 단 10여 세대(한국공항공사 추정 26가구)만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조씨의 얼굴에 걱정스런 빛이 역력했다. 혼잣말처럼 "나는 못 나간다"는 말을 연이어 내뱉었다.

"나는 갈 데가 없어. 300만원의 보상비로는 어디 갈 곳이 없잖아. 그 돈으로는 고시원에서나 생활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잖아? 철거를 한다니 결국 어쩔 수 없이 쫓겨나야겠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보상을 해줬으면 좋겠어."

오쇠동의 마지막 주민인 조씨에게 2008년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쓰라린 겨울로 기억될 것이다.
 오쇠동의 마지막 주민인 조씨에게 2008년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쓰라린 겨울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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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오른손에는 담배 한 개비가 쥐어져 있었다. 담배 연기가 퍼져 나가듯 조씨는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에게 이번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쓰라린 겨울로 기억될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오쇠동의 2008년 겨울은 차디찼다.

"오쇠동은 아름다운 마을이었어. 지금은 건물들이 흉측하게 부서져서 그렇지만 집 앞의 향나무에서는 매년 당산제가 열렸고 사람들도 친근하고 그랬었지. 비록 항공기 소리가 시끄럽긴 했지만 그랬어도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었어. 내년 봄에 한번 이곳에 와 봐. 오쇠동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인지 알게 될 거야."

조씨는 문득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철거가 시작되기 전 오쇠동 이야기였다. 그는 집 앞에 있는 큰 나무를 가리키며 당산제가 열렸던 향나무라고 했다. 향나무에 얽힌 사연을 말하는 조씨의 얼굴에 미소가 엿보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미소는 슬퍼 보였다. 조씨에게 오쇠동을 떠난 사람들과 연락이 되는지 물었다. 그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갈 때 뿐이야. 아무리 친한 사람도 연락이 없어, 한 달 동안은 연락이 되는데 그 후론 연락이 통 없어."

친구도, 이웃도 다 떠나버린 오쇠동 마을을 조씨는 10여가구 세입자들과 함께 지키고 있다. 담배 가게와 슈퍼마켓이 없어 불편하다는 조씨는,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고 옛 오쇠동을 추억하고 있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마을의 과거를.

▲ 오쇠동 영상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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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태그:#오쇠동, #철거,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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