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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소련의 혁명 지도자 레닌은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혁명파인 적색군이 왕정파인 백색군을 상대로 치열한 혁명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알렉세예프스크를 함락시키고 스보보드니(자유시)로 바꾸어 해방구를 선포해 놓고 있었다. 이것을 아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군들이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가자는 주장을 폈다. 오갈 데 없고 먹을 것 없는 간도 독립군들에게 이 방법은 유일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해 11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군 부대는 이미 소련의 자유시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에서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이탈한 이동휘와 문창범이 주도하는 무장대였다. 문창범은 간도 독립군이 주둔해 있는 밀산에 사람을 보냈다. 문창범의 사령 한창해는 간도 독립군 간부들을 설득했다. 그는 소련에 가서 공산군과 협조하여 일본군을 격퇴시키면 조선인 자치와 해방구를 얻을 수 있으니 어서 들어가자고 했다. 거의 모든 이들이 한창해의 제의에 찬성하는 것 같았다.

한창해는 간도 독립군의 길잡이가 되어 흑룡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들어가고 있었다. 간도 독립군들은 자치주를 허락 받아 일본과 독립전쟁을 치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한창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자유시 입구에 이르렀다. 그들에게는 무기가 공급되었다. 소련의 도움으로 재무장을 이룬 것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소련이 태도를 바꿨다. 모든 한국인 독립군을 소련 공산 혁명군 휘하에 복속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동휘 계열은 공산군 지휘 하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공산 혁명군의 방침을 간도 독립군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며 이에 따를 것을 종용했다. 공산 혁명군으로 들어오지 않는 독립군들은 모두 무장 해제시키겠다는 최후통첩이 전달되었다.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적군과 한국 공산군은 무장 해제를 거부하는 한국 독립군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과, 설마 공격까지야 하겠느냐는 요행심을 함께 갖고 있던 한국 독립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당황한 독립군들은 강으로 뛰어들었다.

소련군은 강물에 빠진 독립군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 결과, 한국 독립군의 피해는 사망 272명, 실종 25명, 포로 97명에 익사 31명이 추가되었다. 이른바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이라고 하는 이 일로 인해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 무장 투쟁 전열은 거의 흐트러지고 말았다. 이는 한국 독립 운동사의 최대 비극이었다.

20여 년 동안 한국 독립운동사를 빛냈던 홍범도의 부대는 삽시에 없어졌다. 호랑이 잡던 포수 출신 독립군 대장 홍범도는 찬바람 이는 러시아의 소도시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죽었다. 소련에게서 백만 루불의 자금을 받았던 공산주의자 이동휘도 몰락을 거듭하다가 시베리아에서 병사했다. 일본 정예 육사 출신 장군 지청천은 소련군에게 체포, 투옥되었다가 훗날 임시정부의 석방 노력으로 풀려나게 된다.

여기에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음습한 야합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본과 소련 혁명정부는 북경에서 이미 밀약을 맺어 놓고 있었다. 일본은 물자가 부족한 소련에게 캄차카만 연안 일대의 어업권을 넘기는 대가로 소련 영내 한국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해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귀신처럼 야합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속성이었다. 언제나 그들은 약한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물질을 나눠 먹는 식으로 합의 보는 방법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민비와 고종이 러시아를 이용하려다 뒤통수를 맞아 일본에게 목숨과 주권을 빼앗겼던 역사가 지척에 있었는데, 독립운동가들마저 또 소련을 이용해보려다가 일본의 공작에 궤멸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만 것이었다.

바이칼의 나그네

김좌진과 이범석은 말 위에서 흑룡강 물줄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황강을 탄 김태수가 있었다. 말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인지 김태수는 두 장군에 못지않은 기백과 위용이 있어 보였다. 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들어가는 독립군의 대열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던 김좌진은 조용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김태수가 찾아와 권고하지 않았더라도 소련에 들어갈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무대를 소련으로 옮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외국 영토에서 벌이는 독립운동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독립운동을 중단하는 일과 같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김태수가 찾아와 작은 칼을 내밀며 인사하더니 대뜸 소련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는 충고를 한 것이었다.

김좌진과 이범석은 김태수를 이름 모를 호숫가에 있는 빈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풋고추와 된장을 먹었다. 그들은 밥 대신 냉수로 배를 불렸다.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헤어지기로 했다. 일본군의 정찰과 추적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범석은 당분간 중국군 부대에 가 있겠다고 했다. 김좌진은 다시 독립군을 결성하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나중에 부르면 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범석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좌진은 김태수에게 부쩍 삼엄해진 경비가 느슨해질 때까지 상해에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김태수는 준비해 간 자금을 9 대 1로 배분해 김좌진과 이범석에게 주었다. 그러자 김좌진은 허탈하게 웃으며 "이제 드릴 칼도 없다"고 말했다. 그 대신 그는 윤이 나게 잘 닦여진 작은 권총 한 자루를 김태수에게 선물로 주었다.

며칠 후 김태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휴양지의 한 별장에서 눈을 떴다. 창밖으로 낮은 구릉이 펼쳐져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가진 이 도시는 이름과 달리 중소 도시의 규모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일찍부터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진출해서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한 도시였지만 의외로 조용한 항구였다. 김태수가 이곳을 찾은 것은 김좌진의 충고 때문이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안전한 도시이니 그곳에 가서 며칠 형세를 관망해 보라고 조언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철도가 출발하는 곳이기도 했다. 김태수가 지체 없이 이곳으로 온 것은 철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끝없이 가고 싶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가면 중국 장춘으로 연결되는 철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에게는 상해에 꼭 다시 가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백주원 곁에 더 머무르는 것도 그의 기질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백주원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려 온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설령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여전히 백주원을 열망했지만 동정이나 배려에 의한 사랑은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가슴 쓰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규식에게 북간도행을 자청한 것이었다. 아니,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백주원에게 매력적인 사내로 남고 싶었다. 그런데 상해에서 하는 일 없이 머물며 그녀의 눈빛이나 살피는 일은 그의 기질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구걸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가장 경멸하는 것은 구차한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훌훌히 그녀 곁을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상해를 떠나기 전 그는 민필호에게 봉투 하나를 남겼다. 그는 자신이 100일 이내에 오지 않으면 뜯어 봐도 된다고 말했다. 민필호는 눈만 꿈벅이며 말없이 봉투를 받았다.

그는 떠나면서 백주원과 아주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는 김태수의 뒷모습을 보며 의외의 것을 물어보았다.

"아직도 나를 생각하시나요?"

김태수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것은 변하는 게 아니오."

순간 백주원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날카롭게 스치는 것을 김태수는 보지 못했다.

"제발 무사히 다녀오세요. 오시면 쑥대머리를 들려 드릴게요."

김태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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