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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베스트셀러 -조선 후기 세책업의 발달과 소설의 유행
▲ 조선의 베스트셀러 -조선 후기 세책업의 발달과 소설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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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무엇인가, 아니 좀 더 쉽게 얘기해 보자. 대체 ‘이야기’란 무엇인가. 처음으로 소설이 유통되던 조선조 후기 사회에서 그것은 어떤 느낌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갔을까. 그들에게 소설은 어쩌면 극적으로 구성된, 그리고 남몰래 들여다보는 ‘타인의 삶’ 같은 건 아니었을까.

완고한 성리학의 세계관과 규범 아래서 억압적 일상에 묻혀 있던 18세기의 조선 사람들, 특히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에게 소설은 마치 ‘상상으로만 저지르는 염문’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회를 달구었던 소설 열풍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소설을 만나 그 낯선 세계에 코를 박았던 초등학교 적의 어느 날, 그 조바심의 시간들을 기억하며 이민희(아주대 교양학부 강의 교수)의 <조선의 베스트셀러>를 읽었다.

이 책엔 '고소설의 유통과 소설 사회사'를 공부해 온 저자의 연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조선 후기 세책업의 발달과 소설의 유행’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책은 소설의 시대, 조선 후기 사회를 느긋하고 흥미롭게 펼쳐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소설문학은 15세기 후반 김시습의 한문 단편 <금오신화>가 그 길을 열었지만, 한글소설의 출현은 허균이 <홍길동전>을 펴낸 17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새로운 문학 생산자로 등장한 서민들에 의해 ‘평민소설’이 등장하게 된 것은 그 이후였다. 물론 중국에서 유입되기 시작한 한문소설이 공전의 인기를 끌게 된 것도 같은 시기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소설을 읽고 쓰는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을 다룬 영화 <음란서생>(2006)을 들면서 당대에 그것이 가능한 상황이었겠느냐고 묻는다. 물론 답은 ‘그렇다’이다. 조선 후기 소설의 주 독자층은 남성 아닌 여성이었고, 그것도 ‘격식을 따지는’ 사대부 집안과 궁중의 여성이었다. <음란서생>에서 왕의 여인 정빈이 열혈 팬으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이 소설의 시대를 연 이들은 <장화홍련전>부터 <조웅전>까지 온갖 삶의 모습을 그 시대의 언어로 엮어냈던 이름 없는 작가들, 그리고 ‘은비녀’나 ‘놋그릇’을 맡기고 책을 빌려 읽던 부녀자 등의 열혈 독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작가와 독자의 만남을 주선했던 이들은 상업 목적의 필사본으로 서적 유통 시스템을 만들었던 서적 중개상, 즉 ‘책쾌’였다.

영화 <음란서생>(2006) 조선 후기, 한 문장가가 쓴 '난잡한 소설'이 일으킨 선풍을 다룬 영화. 소설은 결국 구중궁궐 안의 왕의 총애를 받던 정빈(김민정 분)의 손에까지 흘러 들어간다.
▲ 영화 <음란서생>(2006) 조선 후기, 한 문장가가 쓴 '난잡한 소설'이 일으킨 선풍을 다룬 영화. 소설은 결국 구중궁궐 안의 왕의 총애를 받던 정빈(김민정 분)의 손에까지 흘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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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책쾌들에 의해 시작된 세책업은 18세기 중반의 소설 열풍의 진원지라 할 만하다. 이들은 수천 종의 책을 깨끗이 베껴 쓰고 빌려주는 일을 했는데, 이는 서울에서만도 서른 곳이 넘었을 정도로 성행한 세책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무려 858종에 이르는 국내 고소설 작품이 생산된 조선 후기는 소설의 시대로 불린다. 조선 후기의 소설 붐을 연 것은 임란 이후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의 한문 소설이었다.

이 한문 소설들은 중국사를 바탕으로 영웅들의 삶과 운명, 사랑을 그리면서 가정과 세상을 경영하는 법과 처세술 따위를 다루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광적인 독서 열기가 초래한 사회적 파장도 만만찮았다.

“패관잡서(稗官雜書)는 인재(人災) 가운데 가장 큰 재앙입니다. 음탕하고 추한 어조가 사람의 심령을 허무 방탕하게 하고 사특하고 요사스러운 내용이 사람의 지혜를 미혹에 빠뜨리며, 황당하고 괴이한 이야기가 사람의 교만한 기질을 고취시키고, 시들고 느른하며 조각조각 부스러지듯 조잡한 문장이 사람의 씩씩한 기운을 녹여냅니다.” - 정약용(본문 중에서)

당대의 실학자 다산의 비판도 소설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이 조선 후기를 휩쓴 소설 선풍은 시장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억눌려 왔던 여성들의 욕구의 분출과 대리 만족의 결과였다. 소설의 출현 이래 완고한 유교 사회에서 배척되었던 국문 소설은 규방의 여성 독자를 끌어내면서 ‘문학 창작과 독서문화의 고양’으로 이어졌다.

한평생을 좁은 집안에서 갇혀 지내며 반복적 가사노동과 육아에 묶여 있었던 이 시기 여성들에게 소설은 생활의 활력소였고, 봉건적 속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던 출구였다. 여성들의 소설 탐독은 구중궁궐의 높은 담을 넘기도 했다. 왕실 도서관이었던 낙선재에서 세책점을 통해 유통되던 소설들이 다수 발견되기도 했던 것이다.

18세기 중반 이후 성행한 세책본 고소설의 고객은 주로 사대부 여성 독자였으나 점차 상인 계층과 천민 신분의 여성과 노비 계층까지 확장된다. 이들은 이제 중국 소설에 이어 이 시기의 베스트셀러였던 <구운몽> <임장군충렬전> <소대성전> 등의 국문 영웅소설에 심취해 있었고, 이 열기는 방대한 분량의 국문 장편소설을 낳기도 했다.

영웅소설에 이어 판소리의 인기를 업고 나온 <춘향전> <심청전> 등의 판소리계 소설, <사씨남정기>류의 가정소설도 스테디셀러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 소설들은 이본(異本)의 종수로 베스트셀러임을 증명했다. <춘향전>(358종), <조웅전>(295종)과 <구운몽>(292종) 등이 각각 수백 종의 이본이 있었고 이본의 수가 100종이 넘는 작품도 수십 종이었다고 한다.

<흥부전> 서울대본 '막필로 썼으니 보시는 양반님네들은 글씨 흉을 보시지 마시고 눌러 보시고 글씨 잘못 쓴 죄를 용서'라는 필사자의 변이 적혀 있다.
▲ <흥부전> 서울대본 '막필로 썼으니 보시는 양반님네들은 글씨 흉을 보시지 마시고 눌러 보시고 글씨 잘못 쓴 죄를 용서'라는 필사자의 변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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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 서울, 전주, 안성 등지에서 상업적으로 간행한 목판 인쇄물, 이른바 ‘방각본’ 소설은 책값이 상대적으로 싸서 하층민들이 즐겨 읽었다.

그러나 세책점에서 빌려 주었던 고소설은 대체로 필사본이었다. 이 필사본 고소설은 여러 사람이 읽어야 했으므로 튼튼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연히 세책본의 단가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필사본을 즐겨 찾은 이들은 주로 사대부가 여성 등 중산 계층이었다.

지속적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세책점에서는 장편소설을 선호한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세책점의 대여 목록에는 186권에 달하는 <윤하정삼문취록>이나 139권의 <임하정연> 같은 국문 대하소설과 10책짜리 <춘향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림에서 보듯 이 필사본 세책은 대체로 한 권당 서른 장 내외의 부피였는데 한 면에 들어가는 글자는 150자 내외로, 일반 필사본이나 방각본의 반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대여되는 책에는 독자들이 남긴 낙서도 심심찮았다. 도발적 낙서에 붙인 주인의 댓글도 만만치 않다. 사람들의 사는 모양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상부터 세책에 오탈자가 많다든가 세책료가 비싸다는 불평과 항변, 욕설과 음화(淫畵)에 이르기까지 세책에 남은 옛 사람들의 자취도 각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책 주인 들어보소. 이 책인 단권인 책을 네 권으로 만들고 남의 재물만 탐하니 그런 잡놈이 또 어디 있느냐?” - <김홍전>

“이 말이 짧으나 한 권으로는 너무 많은 고로 부득이 이십여 장씩 두 권으로 묶었으나 세전을 더 받고자 함이 아니니 보는 이는 허물치 마시오.” - <만언사>

조선 후기 사회사를 살피는 작업이기도 한 이 책은 자료의 한계를 뚜렷이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현재까지 전하는 세책본과 관련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조선 후기 문인들과 일부 외국인의 글을 통해서 당대의 풍경을 재구성하는 일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또 여러 장으로 나눈 서술체계의 중복도 분명한 구분과 이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과 소설의 유행을 마치 여러 장면의 영화처럼 제시해 주는 것은 이 책의 미덕이다. ‘조선 후기의 독서 풍경’, ‘조선의 문화 상품’, ‘향목동 세책 거리를 걷다’ 등의 소제목에서 보이듯 숨은 그림 투성이인 당대의 문화 지도에서 지은이는 당대의 소설 사회사를 힘겹게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 ‘세책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란 주제로 이웃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의 세책 이야기까지 다루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등장한 소설 문학이 독자를 만나는 형식은 나라와 지역을 넘는 보편적 문화였던 셈이다.

세책업은 대중의 취향 변화와 인쇄술의 발달 등으로 20세기 초까지 성행하다가 쇠퇴했다. 그러나 세책본을 매개로 한 독자들과 세책업소의 만남은 국문 소설의 저변을 넓히며 소설을 시대적 문화상품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었다. 물론 값싼 방각본 소설을 공급하여 하층민들의 독서열을 채워주었던 방각업소도 빼놓을 수 없다.

지은이는 이 세책본과 방각본 고소설 덕분에 우리 소설사가 ‘다면적이고 역동적인 자취와 면모를 보이며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아울러 세책 문화를 알아가는 작업이 ‘우리가 잊고 방기해 왔던 소중한 삶의 지혜와 유산들, 이를테면 선인들의 독서생활 문화를 복원해내는 일’이라는 저자의 결론 앞에서 독자들은 머리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의 베스트셀러, 2007년 10월, 프로네시스,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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