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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담배를 핀다 칠흑 같은 바다의 어둠과 침묵 그리고 소멸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오는 허무의 꽃 꿈인지도 모른다 꿈의 꿈인지도 모른다 몽환의 화려한 꽃불 꽃가지 언제부터인가 눈에서 귀에서 검은 입 속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꽃 웃음의 끝 울음의 끝에서 환히 피어오르는 허무의 꽃 가슴 저 끝에 뿌리박은 듯 뻗어 올라 가슴 가득 뒤덮은 능소화 푸른 잎 속에 피어오르는 주황빛 저 꽃"(25쪽, '능소화' 모두)

윤재철 시집 <능소화> 시인 윤재철이 다섯 번째 시집을 냈다
▲ 윤재철 시집 <능소화> 시인 윤재철이 다섯 번째 시집을 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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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시인 윤재철의 시의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로 '마악' 접어드는 9월초가 아니라 단풍빛이 곱게 물드는 시월 초쯤이다. 시인의 나이 또한 오십대 중반이니 시인의 인생도 가을에 물들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삶과 시인이 쓴 시의 빛깔은 핏빛으로 진하게 물든 단풍나무 잎새나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 잎새처럼 선명하지가 않다.

그저 은은한 빛이다. 장미처럼 붉지도 않고, 평지나물꽃(유채꽃)처럼 노랗지도 않은 능소화 꽃빛처럼 어정쩡한 주황빛이다. 까닭에 시인의 삶과 시인이 쓰는 시는 화려하거나 반짝반짝 빛나지 않는다. 여름에 쏟아지는 땡볕처럼 뜨겁거나 '땡겨울'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차갑지도 않다. 미지근하다는 그 말이다.   

시인 윤재철은 젊은 시절부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오십대 중반의 나이가 된 지금도 교사이다. 시인은 한때 소설가 송기원, 시인 김진경 등과 함께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교직을 잃어버린 시인은 그때부터 전교조 창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던 중 복직되어 다시 교단에 섰다.    

시인의 시가 능소화 빛을 띠고 있는 것도 독특한 삶의 이력 때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마음이 포근한 노랑색이라면 해직과 투옥, 전교조 창립 등은 강렬한 붉은색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시인의 삶과 시인이 쓴 씨는 노랑색과 붉은색이 잘 섞인 주황빛을 띨 수밖에 없다.      

가을빛 물고 겨울빛 내다보는 시인

"장맛비 잠깐 그치고/  저녁 어스름 / 보랏빛 꽃잎은 어둠 속에 잠겨 간다 // 사랑한다 / 사랑한다 / 나지막히 되뇌어 보지만 / 사랑할 때 떠나고 싶다 // 수국이여, 수국".('자서' 모두)

윤재철 시인이 이번에 펴낸 시집 <능소화>(솔)에는 유난히 가을빛을 띠고 있는 시가 많다. 겨울빛을 띤 시들도 더러 있다. 가을빛과 겨울빛은 시인의 삶을 그려내는 시편들 곳곳에  엎드려 있다. 노랑빛을 띠는 시들도 수두룩하다. 노랑빛은 시인이 교단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는 모습을 그려낸 시편들이다. 

50여 편 남짓한 시 중에서 가을빛과 겨울빛을 띠고 있는 시들은 제1부에 실린 '식당 가는 길' '2교무실 앞 단풍나무' '가을 칸나'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야구 중계방송' '잠' '자존심' '죽은 시인 윤중호 생각' '젖은 꽃' '고대 구로병원' '성남동 아저씨' '댓병 소주' '저무는 바다는 왜 허무할까' 등이다.

노랑빛을 띠고 있는 시들은 제2부에 실린 '비둘기와 중간고사' '겁먹은 송아지' '세때' '작취미성' '이상' '지성이' '각축' '조경사업' '방학' '졸업식' '수능감독' '번호들의 세상' '그래도 다시 한번' '참 좋은 봄날' '숙제' 등이다.        

능소화 시인의 시의 빛깔은 능소화빛이다
▲ 능소화 시인의 시의 빛깔은 능소화빛이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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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혼자 가야 하는 그 쓸쓸한 길

"장마 얼마 앞두고
소담스럽게 핀 수국꽃에도 눈길 한번 주며
터덜터덜 구내식당 가는 길
뒤좇아 온 같은 부서 여선생님 둘이
같이 가자는 말도 없이 혼자 가느냐
치사하다 농담을 한다
그러자 대뜸 내 입에서 나온 말
그러면 죽을 때도 같이 죽을 거야 하니
깔깔 웃으며 그 말이 맞다 한다"(12쪽, '식당 가는 길' 몇 토막)


시인 윤재철은 교사다. 어느 날 교사시인은 "오전 수업 끝내고 / 오른손 중지 볼록 솟은 군살에 / 허옇게 묻은 백묵 가루 힘주어 닦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서둘러 구내식당으로 간다. 근데,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여교사가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가느냐며 농을 건넨다.

그때 교사시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죽을 때도 같이 죽을 거야"라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시인은 구내식당에 들어가 여교사 둘과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으며 문득 겨울빛(죽음)을 본다. 비록 지금은 "함께 웃으며 밥을 먹지만" 죽음으로 가는 그 길은 "끝내는 같이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 교사시인의 나이 또한 가을빛이다. 아직은 '마악'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는, 지천명(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에 접어든 삶이다. 하지만 죽음으로 가는 그 길은 부모 형제라도 함께 갈 수 없다. 게다가 그 길은 "아무도 몰래 예비된 것처럼 / 어느 날 문득 우수수 낙엽"이 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다. 혼자서 쓸쓸히.

가을빛을 물고 있는 시인은 지금 저만치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겨울빛을 내다보고 있다. 그 외롭고도 쓸쓸한 길 위에 미련 없이 올라서기 위해 홀로서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 아는 모습은 곱게 물드는 저녁놀처럼 아름답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죽지 않으려 아둥바둥하는 모습은 얼마나 추한가.  

겨울빛 너머 새로운 세상이 있다면

"십수 년 전
이것저것 의문 나는 것을 캐묻는 내게
팔 안거를 했다는 어느 스님은
문지방에 턱 괴고 앉아 낙숫물 바라보며
죽는 건 죽는 겨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겨
내세가 어딨남
현세도 모르는디 중얼거렸다."(33쪽, '죽은 시인 윤중호 생각' 몇 토막)


가을빛을 물고 겨울빛을 바라보고 있는 교사시인 윤재철은 젊은 때 이것저것 물어보던 노스님의 "죽는 건 죽는 겨"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때에도 시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시인은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겨"라는 노스님의 말이 자꾸 목에 걸렸다. 겨울빛 너머 새로운 세상이 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시인은 삶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때문에 시인은 노스님에게 "그래두 워치게 그렇게 끝난대유"라며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성철 스님께서는 "산은 산이구 물은 물이구"라고 했다며 "내세라는 말이 있으면 그게 / 그래두 있는 거 아뉴"라며 떼를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노스님은 입을 닫아버렸다.

교사 시인은 문득 마흔아홉이란 나이에 이 세상을 등져버린 시인 윤중호를 떠올린다. 그렇게 저 세상으로 가버린 윤중호는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 "영동 어느 포도 과수원 집이든가 / 공항동 이주단지 아니면 일산 아파트 / 툭닥거리면서도 서로 좋아 죽겠는 / 어느 젊은 맞벌이 부부 집" 갓난아기로 태어났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 노스님의 말이 맞다. 하지만 저만치 머무는 겨울빛이 교사시인에게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삶을 끝내기엔 너무 허망하다. 게다가 교사시인은 아직도 아이들을 위해 할 일이 너무 많다. 저 세상이라도 있다면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못다 한 꿈을 꼭 이뤄보련만.

선생과 아이들은 어머니와 갓난애처럼 한몸이다

"하루 종일 몸살에 온몸이 들쑤시는데
지금은 몇 교시 지금은 무슨 시간
학교 시간 대로 틈을 놓지 않고 지나가다
7교시 일과가 끝나고서야 마음이 놓이는데".(78쪽, '선생' 몇 토막)


윤재철 시인은 하늘이 내린 선생이다. "어쩌다 지독한 몸살을 만나 결근하던 날 / 미음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면서"도 학교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편히 쉬지 못한다. 선생과 아이들은 젖먹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처럼 잠시라도 떼놓을 수 없는 한 몸이라는 것이다. 까닭에 "깜빡 잠들었다" 눈을 떠도 "지금은 몇 교시 쉬는 시간"이 눈에 밟힌다. 

교사시인은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어도 아이들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깊은 잠에 들지 못한다. 그렇게 아이들의 7교시 수업이 끝난 뒤 마음을 놓고 깊은 잠에 빠지면 이번에는 꿈속에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1번부터 38번 아무개까지 / 하나 하나 번호 번호 / 얼굴이 지나가고" 그 아이들의 가정환경과 특기가 불쑥불쑥 떠오른다.

시인 윤재철 시인 윤재철은 '하늘이 내린 선생'이다
▲ 시인 윤재철 시인 윤재철은 '하늘이 내린 선생'이다
ⓒ 윤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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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꿈속에서도 하늘이 내린 선생이다. 교사시인은 꿈속에서도 "누구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 누구는 컴퓨터 게임에 도사고 / 누구는 9시면 락카페 쟁반 들고 알바 나가겠구나", 온통 아이들 걱정뿐이다. 교사시인의 삶이 곧 아이들과 아이들 가정의 삶이고, 아이들의 삶과 아이들 가정의 삶이 곧 교사시인의 삶인 것이다.

교사시인의 아이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낸 시편들은 수두룩하다. "교복을 벗은 몸이 참으로 아름다워"(청춘)라거나 "학교가 너를 병들게 만들었구나"(겁먹은 송아지), "아이들아, 너희가 다 동백이다"(동백꽃 피는 학교), "쉬는 시간이면 왁자지껄 / 공부보다 즐거운 장이 선다"(매점) 등이 그러하다.

특히 아이들이 중간고사를 보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운동장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비둘기를 바라보며 "아무 표찰도 시험도 없는 저 사랑을 / 나는 아이들에게 /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비둘기와 중간고사)라며 고민하는 교사시인의 마음은 너무나 아름답다.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김영호의 지적처럼 시인 윤재철은 "천생 선생"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시인 윤재철은 195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1982년 <오월시> 동인에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메리카 들소>(청사, 1987)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창비, 1992) <생은 아름다울지라도>(실천문학사, 1995) <세상에 새로 온 꽃>(창비,2004)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오래된 집>이 있으며, 1996년 신동엽 창작상을 받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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