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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의 창
'만화'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진 인물'에 대한 그동안의 기록을 쓱싹쓱싹 만화로 쉽게 풀어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 책은 그 어느 역사책보다도 촘촘히 질곡의 우리 현대사를 짚어내고 있다.

눈높이를 확 낮춘 어린이용 역사책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다.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많은 386들은 이 책의 출간을 반기면서도 읽지는 않을 수 있다. 그저 자녀들에게 약간의 무용담을 곁들이며 "아이야, 너도 꼭 알아야 하는 역사란다"라며 건넬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읽어야 한다. 어른이 먼저 봐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은 그 어느 역사책보다도 엄하게 우리의 망각을 꾸짖고 있다.

<만화 전두환>이다. 백무현 화백은 지난 2005년 5월 <만화 박정희>를 출간하면서 차기작을 언급했다. 예상가능한 바, '전두환'이었다. 주위의 기대와 바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2년 여 지나 백 화백은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만화와 영화, '화려한 휴가'는 뭐가 다를까

<만화 전두환>(시대의 창 펴냄)이 세상에 나왔다. 모두 두 권으로 엮였다. 1권에는 '화려한 휴가'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이름과 같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흥행으로 '그해 5월 광주'가 보다 너른 광장에서 얘기되고 있던 때, 이제 <만화 전두환>까지 가세한 것이다.

2007년 여름, 사람들은 무더위와 함께 느닷없이 찾아온 전두환과 다시 맞닥뜨려야 한다. '그 날' '그 사람들'과 다시 만나야 한다.

<만화 전두환>에서 그린 그 해 광주의 사건들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핏빛 역사의 복원이다. 첫번째 희생자 장애인 김경철의 죽음, 중상자를 태워 병원으로 향하려다 진압군에 저지당하는 택시기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가 끝나면서 시작된 발포 그리고 죽음·대치·항전·진압…. 숨 가쁘게 흘러간 광주에서의 '불과 며칠'을 두 작품 모두 잘 살려냈다.

그러나 영화 <화려한 휴가>의 배경이 '평온했던 도시' 광주에서 펼쳐진 갑작스런 5월이었다면, <만화 전두환>은 그 앞뒤 상황들을 집요하게 좇아 올라간다. 백무현의 '화려한 휴가'는 '왜 광주였는가'에 천착해 이를 비켜서지 않고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영화에서 '전 장군'으로만 짧게 언급되고 만 전두환이 80년 5월 광주를 비롯, 우리 현대사를 얼마나 꺾고 비틀었는지가 충실한 자료검토를 거쳐 432쪽에 걸쳐 묘사된다. 배후에서 전두환을 적당히 눈감아주고 적절히 이용했던 미국의 속셈 역시 샅샅이 파헤쳤다.

광주항쟁 당시 '핵심 주동자' 설정도 영화와 다르다. 영화에서는 전역 대령 박흥수(안성기)를 시민군의 구심으로 삼았지만 만화에서는 역시 실존인물 윤상원(시민군 대변인)을 비롯한 민초들이 맨 앞이다. 백무현 화백은 영화 <화려한 휴가>의 박흥수의 '활약'을 보고 "많이 불편했다"고 한다. 불가능한 설정이라는 것이다.

'익명'의 사람들이 민주화의 주인공이다

▲ '아 광주여 우리의 십자가여'. 백무현은 <만화 전두환> 1권 '화려한 휴가'를 통해 '왜 광주였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 시대의 창
야만과 반동 그에 맞서는 민중들의 분노와 투쟁을 다룬 2권 '인간에 대한 예의'는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전환점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새 역사 창조에 바쳐 일하라는 국가적 소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보고 사심 없이 주어진 책무를 완수하겠다"는 전두환의 당선 담화로 시작한다.

사심이 없다? 그러나 한 독재자 개인이 국가를 쥐락펴락하며 욕보였던 전두환 시대 야만의 조각들이 2권에 적나라하게 모여 있다.

장영자 사건·KAL 007 폭파사건·국제그룹 해체 사건·건국대 사태·평화의 댐 사기극·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우리 현대사를 뒤흔들었던 사건들을 통해 몸서리쳐지는 전두환의 야욕을 목격할 수 있다.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빠짐없이 등장했던 미국의 실체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책의 또 다른 가치는 '발굴'이다. 민주화는, 데모 지도부 혹은 대열 맨 앞에서 화염병을 정확히 꽂은 사람들보다는, 남몰래 시위대에 돌을 주워다 줬거나 익명으로 대자보를 써 학교나 시내 곳곳에 붙였던 사람들이 이끌어왔다. 백무현도 <만화 전두환>을 통해 이런 민주화의 숨은 주역들을 찾아 나섰다. 바로 한재동 교도관 같은 사람들이다.

한재동 교도관. 그가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중이었던 이부영에게 볼펜과 종이를 넣어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완전 조작됐다'는 이부영의 쪽지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면, 역사는 굴절된 채 흘러왔을 것이다.

광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고초를 겪은 안병하 전남 도경국장이나 '전차 동원'을 명령하는 황영시 참모차장의 요청을 거절한 이구호 기갑학교장 역시 반드시 역사가 기억해야 할 사람. 백 화백은 조용히 이 사람들을 그림으로 불러냈다. 백 화백은 "이런 사람들의 목숨 건 용기야말로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거침없는 주장 "KAL 858기 폭파사건은 명백한 조작"

▲ <만화 전두환>에서 KAL 858기 사건은 '명백한 조작'으로 그려진다. 백무현은 이를 전두환이 스위치를 누르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 시대의 창
<만화 전두환>을 통한 백무현의 주장은 거침이 없다. 1987년 대선을 코앞에 두고 일어난 KAL 858기 실종 사건. 백무현은 이 사건을 전두환과 안기부의 '확실한' 조작으로 결정내 버린다.

만화 장면을 보자. 노태우가 밀리고 김대중이 여의도에서 100만 명을 동원해 세몰이를 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위기를 느낀 전두환과 '검은 선글라스'들이 갑자기 바쁘게 움직인다.

백무현은 모든 준비를 끝낸 전두환이 스위치를 '꾸욱' 누르는 것으로 이 사건이 조작임을 암시한다. KAL기는 공중에서 폭발하고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김현희는 선거 하루 전날 서울로 이송돼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결정적으로 돕는다.

유족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이 요원했고, 지난 7월 11일에야 진실 화해 과거사 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발표한 사건.

에둘러 표현하거나 여지를 남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백무현은 정공법을 택했다.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백무현은 "각오하고 있다"고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소송 등 사회적 논란이 일어 진상규명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난 1983년 8500m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된 KAL 007기 역시 냉전의 희생양이었으며 사건 이후 레이건과 슐츠 등이 모여 "궁지에 몰려있던 차에 아주 잘 터져주었다"며 크게 웃는 장면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슬프고 아이러니한 현대사의 자화상 그리다

▲ <만화 박정희> 출간 2년여 만에 <만화 전두환>을 펴낸 백무현 화백.
ⓒ 오마이뉴스 남소연
<만화 전두환>은 우리 현대사의 추악한 장면들도 빼놓지 않았다. 그동안 얄팍하게만 알려졌던 내용들을 독자들에게 다시 각인시키고 있다.

"온 국민과 더불어 경축하는 이 새 출발 국운이여 영원하여라 청렴결백한 통치자 참신과감한 통치자 이념투철한 통치자 정의부동한 통치자 인품온화한 통치자…(중략)…이 새로운 영토 오 통치자여 그 힘 막강하여라 아 이 새로운 영토 이 출발 신념이여 부동불굴하여라"

이 낯뜨거운 전두환 대통령 당선 축하시를 쓴 사람이 다름 아닌 시인 조병화란 것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

청와대 만찬장에서 노태우 대통령 앞에서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과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이 충성경쟁 끝에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은 '기가 막혀 웃음도 안 나오는' 우리 현대사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외에도 권력과 언론이 참으로 묘한 관계를 이뤘던 그 시대의 풍경들이 여러 자료를 통해 다시금 그려진다.

89년 6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방북으로 야기된 공안정국. 그러나 같은 시기, 박철언 대통령 정책비서관과 강재섭(현 한나라당 대표) 의원이 평양에서 허담 북한 노동당 대남비서와 밀담을 나누고 있는 장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전두환, 그는 여전히 꼿꼿하다

그러나, '전두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연희동은 새해 벽두마다 문턱이 닳는다. 선거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의 단골코스다. 온몸을 조아리고 덕담 앵벌이에 여념이 없다. 경남 합천에서는 기어이 '그 분'의 호를 딴 공원을 조성했고 급기야는 '전사모'라는 열혈 팬클럽까지 등장해 전두환을 오늘에 다시 아로새기려 하고 있다. 애처로울 정도다. 끝나지 않은 '전두환 시대'다.

무엇보다도 전 재산 29만원, 그가 여전히 꼿꼿하다. 백무현도 이를 강조하기 위해 1권 프롤로그와 2권 에필로그에 골프를 치는 전두환과 일해공원 조성 소식을 겹쳐 놓았다. 에필로그에 이어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경으로 아픈 현대사 몇 장면이 지나간다. 백무현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전두환 시대를,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 아직 남아있는 수많은 전두환을 통해 고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백무현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심하다고 했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아픈 역사려니, 지나간 과거려니, 극복해야 할 상처려니 하면서 잊고 있는 사이 백무현은 밤을 낮 삼아 찾고 쓰고 또 그렸다. 우리가 그저 부끄러워하고 있는 사이 백무현은 이렇게 조금씩 역사에 그 빚을 갚아 나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를 잊으면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만화 전두환> 두 권은 과거와의 무분별한 동거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의 무감각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있다. 겸손하게 이 책을 집어 들어야 하는 이유, 만화라고 함부로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만화 박정희 1~2 세트 - 전2권 - 왜곡된 신화, 영웅인가 기회주의자인가

백무현 지음, 박순찬 그림, 민족문제연구소.뉴스툰 기획, 시대의창(2016)


태그:#백무현, #만화전두환, #광주, #만화박정희, #화려한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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