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대협동우회는 6월 항쟁 20주년, 전대협 결성 20주년을 맞아 전대협 회원 연쇄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 대담 : 방효창 전대협동우회장(87년 항공대 총학생회장, 현 두원공과대 교수), 김영하 전대협동우회원(92년 중앙대 총학생회장, 현 중앙대 청년동문회 사무국장)
- 정리 : 안진걸(현 KYC 실행위원, 성공회대 '엔지오와 사회운동' 강사) <편집자주>
▲ 임미애 의성군의회 의원.
ⓒ 전대협동우회
여기 무척이나 경이로운 이력의 한 사람을 여러분께 소개할까 합니다. 이화여대 경제학과 84학번으로 87년 6월 대항쟁 때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었던 임미애씨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도시 처녀'가 10년 이상 시골에서 '농사꾼'으로 살았는데, 주변에서 그런 사람 찾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는 그렇게 농사를 짓고 농민운동을 하다가 먹고 살기 어려워 직접 농산물 장사도 해보고, 학원도 운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뜻한 바 있어 2006년 지방선거 때 경북 의성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군 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경북에서 현 여당으로 당선된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 아닐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특이함은 그녀가 참여했던 80년대 학생운동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사회운동을 하다 남편을 만났고,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가 부부가 농사를 지으며 농민운동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현장 투신이었던 것이죠.

그것만으로는 살기 어려워 장사도 해보고 학원 운영 등도 해보고, 드디어는 민주세력이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공이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과감하게 열린우리당 후보로 불모지인 경북에서 출마해 당선까지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정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답변은 단호하고 진지했습니다. 그 역시 현 정부에 대해서 아쉬운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노무현 두 민주정부가 성공해야만 그 값지고 아름다웠던 민주화운동 참여 세대들의 투혼이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두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결국 민주화 세대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 절박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참 대단한 일입니다. 서울의 유수한 여대를 나와서, 시골 출신도 아니고 도시 처녀가 농사꾼이 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거기서 눌러 살면서 도저히 당선되기 어려운 지역에서 여당으로 군의원까지 됐으니까요. 비록 남편은 2004년 총선에서 여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와 떨어졌지만, 그녀가 지역에서 열심히 살아오고, 지역 주민들에게 호평을 받을 만한 일을 꾸준히 해온 결과일 것입니다.

"6월 대항쟁으로부터 20년이 흘렀지만,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우리세대의 자세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 과거와 다르게 일정한 힘과 영향력도 있고, 이 사회의 중추가 되고 있잖아요.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에 처해있다 해도 무기력에 빠져있지 말고 힘내서 다시 그 시대의 열정으로 우리의 역할을 다 했으면 합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라며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 말에는 동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진한 애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음은 임미애씨와의 인터뷰 전문입니다.

- 92년부터 의성에 사셨는데 그 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88년에 대학은 졸업했고 4년 정도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을 했습니다. 88년 8·15 특사로 나온 남편(김현권·반제동맹당 사건)이 민가협에서 남은 양심수 석방을 위한 농성을 할 때 처음 만났고 그 이후 교제를 하다가 92년에 결혼하였습니다. 그때 같이 농성 했던 분들이 장기표, 이재오씨 같은 분들이었어요."

- 당시에 감옥은 안 가셨나요.
"잠깐 갔다 왔어요. 87년 8·15때 통일축전 관련 행사에 참여하다 연행돼서 구속됐다가 10월에 출소했어요. 그때는 6월 항쟁 승리의 여파로 잡혀가도 빨리 나올 사람은 빨리 나왔어요. 그래서 감옥에 있느라 전대협 1기 출범식 때 아쉽게도 참여를 못했죠. 그게 인연이 돼서 졸업 후에 민가협에 갔던 것이죠. 지금은 인권위에 있는 남규선씨, 인권운동사랑방에 있는 박래군씨 등과 같이 간사를 했었죠. 우리 남편도 출소 후에 농성하면서 간사로 있었고요. 지금도 김정숙 어머님(임종석 의원 모친), 임기란 어머님 등 민가협 어머님들과는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시부모님은 한 6개월 시골에서 살거라고 생각했는데..."

- 결혼과 함께 의성으로 간다니 부모님이 깜짝 놀라셨을 것 같아요.
"상상한 그대로죠. 서울에서 대학 멀쩡하게 나온 애가 어느 날 갑자기 농촌 가서 농사 짓 는다고 하니 좋아 할 부모님이 없죠. 제 어머니가 결혼식에서 우시기까지 했죠. 그런데, 시어머님이 그러셨다고 하데요. 다 늙은 처자 구제해주는데 뭐가 슬퍼서 우시냐고….(웃음)"

- 시부모님도 자식이 시골로 온다니까 걱정을 하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남편 말을 들어보면 처음에는 좋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에 있어봐야 나쁜 애들 꾐에 빠져 데모나 하고 다닐 거니 차라리 내려와서 농사를 짓다보면 더 이상 데모는 안할 것 같고, 그렇게 한 6개월 시골에서 살다가 대처로 나가 직장을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랬는데 벌써 15년이 지났습니다. 그 15년을 줄곧 의성에서 살았어요."

- 고향이 서울이라고 알고 있는데 농촌에서 생활 하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요.
"주로 사과, 마늘, 자두 같은 것을 하고 소도 기르고 했는데요. 농사일이 힘들지는 않아요. 아니 힘들지만 버틸 만해요. 육체적 피로라는 게 잠 한번 자면 회복되는 거잖아요. 오히려 처음 결혼 하고 나서 시어머니께서 농사일 안 시키고 새참 같은 부엌일 시키실 때가 더 힘들었어요.

제가 하는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하루는 날 잡아서 시어머니께 제가 농사일을 할 테니까 어머니가 집에서 새참 마련하는 일을 하시는 게 더 좋겠다고 얘기 드렸죠. 그러니까 어머님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머니도 서울 새댁 시집오자마자 '들일'시킨다고 동네사람들이 수군거릴 것 같아서 말을 못 하셨던 거예요. 현재 애 둘이 있고요. 농사일보다도 농사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별의별 일을 다 했죠. 수확한 농산물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팔기도 했고 나중에는 학원도 운영했었습니다. 학원으로 그나마 대략 먹고는 살았죠."

- 트럭장사 얘기가 재미있겠는데요.
"트럭장사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사과농사를 지을 때 사과 한 궤짝 당 9000원이었던 적이 있었어요. 100상자를 팔아야 90만원인 거예요. 사과농사가 잔 일손이 많이 가요. 가족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인력을 사서 써야 하는 일이거든요. 인건비도 못 건지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궁리해 낸 게 우리가 직접 판매를 하자는 거였는데 들고 다니면서 팔수 도 없고 트럭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문제가 둘 다 운전면허가 없는 거예요. 바로 남편이 운전면허 시험공부하고 한 달 만에 면허증 따고, 면허증 나오는 날 바로 1톤 트럭 빚내서 장만하고 바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 탔죠.

처음 직판을 하는 것이니 안정적인 거래처가 있는 게 아니어서, 지인들부터 찾아다니면서 판매를 시작했죠. 그해 겨울에는 진짜 발바닥에 땀나도록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직판을 하면서 얻은 경험은 소비자들 속이지 않고 꾸준히 신뢰를 만들다 보면 굉장히 안정적인 수입원이 된다는 거였지요. 그리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신뢰가 쌓이면 농산물 판매라는 주요목적 외에도 도시민과 농촌과의 일상적인 의사소통도 증진되게 됩니다."

- 도시와 농촌의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어떤 의미인지요.
"저희 집에서 생산되는 과일이나 농산물은 유기농으로 재배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유기농가를 알음알음 알게 돼서 이들 30여개 농가들과 함께 '농촌과 도시'라는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를 운영했지요. 물론 이 사이트의 주요목적은 우리 농산물을 판매하고 수익을 내는 거였지만 오히려 저는 전국에 우리와 비슷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게시판에 농정일기를 올리는 일이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제 농정일기를 본 소비자가 자기가 사는 농산물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지 확인도 하고 또 격려성 댓글도 달아주고 하니 자연스레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간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그것이 농업노동과 먹을거리의 중요성을 도시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는 것이죠."

"열린우리당 출마, 농민회와 거리 생겨 안타깝다"

- 농사일 와중에 농민회 활동도 열심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경북지역에서 농민회 활동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92년에 처음 내려 올 때부터 농민회 활동을 시작했죠. 예상하신대로 그 당시에는 의성에 농민회라 할 만한 조직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조직의 외형을 갖추는 것부터 시작했죠. 남편은 이후 사무국장, 저는 여성 농민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서 지금은 그 당시보다 많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농민회와는 일정한 거리가 생겼지만요."

- 농민회와 거리가 생겼다는 의미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말하시는 것 입니까.
"네. 그런 것도 있고요. 2004년 총선 때 부터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저희 부부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농민회 사이의 정치적 견해차이라고 봐야겠지만 총선 전에는 농민회의 사업방향에 대한 이견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IMF이후에 많은 30~40대 도시민, 직장인들이 귀농을 선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 귀농인을 대상으로 어떻게 사업을 할지에 대한 이견이 생기곤 했지요. 저희 부부는 농민회가 귀농하는 사람들의 안정적 정착을 위해서 우선 농사기법 같은 실제 귀농민이 필요로 하는 교육과 농촌 생활에 적응을 돕는 것에 힘쓰고 차근차근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여나가자고 주장한 반면 농민회는 그 당시 농촌의 중심 사안이었던 수매관련 투쟁이 워낙 다급하니 그것을 중심으로만 사업방향을 사고하더라고요. 회원 등록받고 집회 데리고 다니고…. 처음에 적극적이었던 귀농민들도 나중에는 생활자체가 너무 어렵다보니 대부분 다시 도시로 떠나갔죠. 그것도 빚 잔뜩 얻어가지고.

이런 이견들이 사안별로 계속 제기되고 그런 게 쌓여 나가다가 2004년 총선 때 남편이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 것이 결정타였지요. 남편이 농민회 사무국장 할 때 모시고 있던 회장님부터 시작해서 우리와 함께 농민운동을 했던 많은 분들이 선거 때 참 많이 공격했지요. 그래서 선거가 더 어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나라당 후보의 공격은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면 되지만 민노당이나 과거 동지들의 공격에는 마음이 무척 아프더라고요."

- 그런데 경북에서 어떻게 열린우리당으로 나올 생각을 했어요? 당선이 목적이라면 무소속이 오히려 유리 할 것 같고, 운동과의 인연을 생각한다면 민주노동당이 있었는데요.
"먼저 제가 2006년 기초의원 출마를 결심하던 시기가 정치활동의 처음은 아닙니다. 원래 남편과 저는 개혁당 시절부터 생활인으로 간접적으로 정치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2002년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리고 말했던 것처럼 남편은 2004년 총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를 했었고요. 무소속이 더 편할 수도 있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마음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희 부부가 열린우리당을 선택한 이유는 저희가 생각하는 사명과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우리 민주세력의, 우리 세대의 정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정권이 국민의 신임을 어렵게 받아서 국정을 운영하게 됐는데 실패하면 우리 민주세력 모두에 대한 역사와 국민의 평가가 부정적이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들 정권의 성공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들이 개혁당과 열린우리당에 참여한 것이나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이 두 분을 지지한 것도 밑에서부터 이들을 도와주고 성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가 지방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런 경우를 자주 봅니다. 제가 보기엔 중앙정권에서 내놓는 좋은 정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책들이 지역으로 내려오면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인식되고 구현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의 역할은 이런 것을 우리 의성지역에만큼은 올바로 구현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의성군민 모두에게 좋은 정책의 혜택들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중앙정치보다 지역정치가 중요한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역의 정서 때문에 우리 같이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나서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지역의 정서가 뭐든 간에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고 묵묵히 그 일을 우리가 하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요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를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저도 참여정부 핵심들의 국정운영능력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내지는 않습니다만 그것 때문에 우리 민주세력 전체가 마치 무능력자로 몰리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참여정부 평가를 보면 가슴 아파"

- 그런 사명이 있다 해도 지역 분위기상 선거 때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제 선거는 기초의원 선거라서 범위도 좁고 정치적 쟁점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라서 그리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 선거가 힘들었지요. 총선은 정치적 쟁점, 다시 말해 후보가 속한 당이 중요한 선거니까 더 힘들었지요. 제 남편이 의성 김씨인데 종친회에서 노란 옷(열린우리당 상징색) 입고는 돌아다니지도 말라며 타박 할 때, 그렇게도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종친회에마저 지역 정서를 우선하는 것을 보고는 참 서글펐죠. 또 선거운동 비용 문제라든지, 선거 후 동네주민들이 돈에 대한 억측을 할 때도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 '돈에 대한 억측'이라니 그것은 무슨 내용입니까.
"남편이 출마했을 때 중앙당으로부터 받은 선거 보조금이 딱 30만원 이었어요. 농사짓던 사람이 빚내서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었죠. 선거 끝나고 나서 먹고도 살아야 하고 선거비용 정산도 해야 하고 해서 좀 전에 제가 말했던, 저희 부부가 운영하던 학원의 건물 임대보증금을 빼서 일부는 선거비용 정산하고 일부는 먹고 살기 위해 소를 몇 마리 장만했죠.

그런데 동네에 '선거 한번 하고 소 장만 했네.'라는 식으로 소문이 난 거예요. 시골 동네에서는 집권여당의 국회의원 후보였으니 선거가 끝나고 한몫 챙겼을 거라 생각 한 거죠. 세상이 변한 걸 확실히 모르는 거죠. 시골이 그렇습니다. 아직 농촌의 조합장 선거 같은 것을 하면 아직도 돈이 많이 돌아요. 그러니 농촌 어르신들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판단 할 만하죠. 나중에 저희들의 검소한(?) 생활을 보면서 자연스레 해결된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많이 마음이 상했죠."

- 그래도 열린우리당으로 군의원 당선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당연히 쉽지 않았죠. 하지만 시대적 소명감에 일부러 열린우리당을 선택했기에 감당할 수 있었어요. 선거라는 게 그렇잖아요. 내가 표를 얻을 대상을 정확히 정하고 움직였어요. 그래야 상대적으로 상처도 덜 받아요. 지역의 엄마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92년부터 의성에서 농민으로, 성당의 신도로, 학원 선생님으로 살아오면서 주민들과 나름대로 정성껏 소통해온 것이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도와줬던 엄마들에게 참 고맙죠."

- 올해가 87년 6월 항쟁 20주년, 전대협 결성 20주년입니다. 감회가 어떠세요.
"참 새롭죠. 남편은 87년에 감옥에 있어서 항상 저에게 '그 때'가 어땠냐고 물어보곤 해요. 그럴 때 저도 설명을 잘 못해요. 워낙 강렬해서, 제가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그런 기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어떻게 보면 지금 제가 농촌에서 이렇게 살아가게 하는 힘도 그 당시 제가 느꼈던 느낌, 깨달음 같은 것이 여전히 동력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87년 당시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을 할 때 학우들로부터 엄청 사랑을 받았어요. 과분한 사랑이었죠. 그때는 지금의 총학생회처럼 학생복지 같은 것 신경도 못썼어요. 아니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그런 거 신경 쓸 생각도 없었어요. 오로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제가 농성을 하거나 하면 학우들이 엄청나게 지지를 보내줬어요. 직접 사탕, 초콜렛 사가지고 지지 방문도 해주시고, 호헌철폐 범국민대회 같은 거 하면 수천 명이 모여 시내에 진출하고. 그 시절 그 분들의 그런 성원이 여전히 제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시 품은 좋은 뜻을 그 분들 때문에라도 저버릴 수 없는 것이죠."

- 마지막으로 87년 6월 항쟁 20주년, 전대협 결성 20주년을 맞이해서 과거의 동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시죠.
"87년 6월의 경험은 우리세대에게 새로운 과제와 역할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학교를 졸업하면 학생운동가들은 노동현장으로 투신해서 일하는 게 당연시 됐었잖아요. 그런데 우리 6월 항쟁을 경험한 세대부터 새롭게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노동현장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회 어디서건 우리사회의 올바른 변화를 우리로부터 추동하자는 것이었죠. 그것은 노동현장도 될 수 있고, 농촌도 될 수 있고, 사무직 근로자일 수도 있고, 공무원 일 수도 있다는 거였지요.

87년 6월을 경험하고 나서 생긴 사회진출의 다변화인데요, 그러한 다변화속에서도 노동현장에 투신했던 선배들 못지않게 우리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엄청났었죠. 6월 대항쟁으로부터 20년이 흘렀지만,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우리세대의 자세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 과거와 다르게 일정한 힘과 영향력도 있고, 이 사회의 중추가 되고 있잖아요.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에 처해있다 해도 무기력에 빠져있지 말고 힘내서 다시 그 시대의 열정으로 우리의 역할을 다 했으면 합니다. 그런 믿음이 제게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전대협 세대 연속 인터뷰 6번째입니다. 참고로 전대협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약자로 87년 6월 대항쟁이후 8월달에 충남대에서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시민입니다. 현재 참여연대(www.peoplepower21.org) 실무자로 '민생희망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생들과 다양한 강좌 프로그램도 종종 진행하고 있습니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희망의 되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