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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인 12일과 13일 불교문화유적 답사팀과 함께 1박 2일 청송(靑松)답사를 다녀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 본 청송 지방. 청송 하면 으레 '청송보호감호소'가 먼저 떠올라 왠지 황무지 같은 삭막한 느낌부터 떠올랐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이라니.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마루가 첩첩이 중첩되어 있는 산골, 이 골짝 저 골짝 연초록 청정 계곡물이 앞 다퉈 흘러내리는 광경은 선경이 따로 없었고 '사과' 주산지답게 온 야산과 밭두렁을 빼곡히 메운 사과나무의 행렬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주산지'
ⓒ 조명자
'청송보호감호소'라는 어두운 이미지를 간신히 회복시킨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 주산지부터 찾았다. 아침부터 오락가락 하던 빗줄기가 잠시 소강상태를 빚은 오후. 엷은 안개비가 주산지를 감싸 안은 산등성이 위로 모락모락 몰려가고 있었다.

영상에서 보던 주산지의 사계. 신선이 살고 있음직한 비경은 예전에도 앞으로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선경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의 완결판이었다. 비고인 웅덩이를 비껴 2Km쯤 올라가니 드디어 주산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너무 기대가 컸던 걸까? 꿈속에서도 보고 싶던 주산지의 풍경은 깊은 산골마을 어딘가에는 꼭 있음직한 아주 평범한 규모의 저수지였다. 조선 경종 원년(1721년)에 시작해 1년 2개월 만에 완성됐다는 주산지는 길이 100m, 넓이 50m에 수심이 8m라는 아담한 규모였다.

주왕산과 주산지 그리고 소헌왕후

▲ 주산지의 150년 된 왕버들
ⓒ 조명자
▲ 비안개에 촉촉한 왕버들 고목
ⓒ 조명자
그러나 고요한 호수 속에는 150년의 연륜이 켜켜이 녹아있는 왕버들 고목 20여 그루가 의연하게 버티고 있어 주산지의 비경을 온 몸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래 여기쯤이 암자 대문이 있던 자리였겠고 저기 왕버들 고사목 옆 자리가 암자터였겠지. 물위에 떠있는 봄, 여름의 암자 모습을 그려가다 보니 어느 덧 상상했던 주산지의 비경이 온전하게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청송을 대표하는 명산 주왕산과 주산지 그리고 특산물로는 청송사과와 청정 고추가 있겠다. 그리고 다음은... 그렇다. 청송은 조선의 왕비를 배출한 '청송 심씨'의 본향이다. 세종대왕의 비 청송 심씨 '소헌왕후'가 바로 이 곳 태생이니 '심씨' 빼고 청송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세종대왕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소헌왕후. 소헌왕후는 왕비가 된 대가로 부친 '심온'을 잃게 된다. 바로 외척의 발로를 경계하는 태종의 의지 때문이었다. 외척이라는 이유로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된 장인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세종. 권력의 냉혹함과 비정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되질 않는가.

청송 군청이 자리한 다운타운에는 세종 10년 당시 군수가 창건했다는 2층 누각 '찬경루'가 있다. 찬경루란 보광산에 있는 '청송 심씨 시조묘'를 바라보며 찬미한다는 뜻이니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좇는 관리들의 잔머리 수준은 일러 무삼하리오.

▲ 청송 심씨 '송소 고택'
ⓒ 조명자
▲ 송소 고택 큰 사랑채
ⓒ 조명자
경주에 12대 만석꾼 '경주 최부자집'이 있다면 청송에는 9대 내리 만석꾼 '청송 심씨'가 있다. 파천면 덕천리에 있는 99칸 대저택 '송소고택', 영조 때 만석꾼으로 불린 심처대의 7대 손 '송소 심호택'의 저택이다.

홍살이 설치된 솟을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니 왼쪽으로 큰 사랑채가 버티고 있고 그 오른쪽으로 안채와 작은 사랑채가 이어져 있다. 안채와 큰 사랑채 사이에는 자그만한 헛담이 있는데 내외의 구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의 풍습이 엿보이는 구조이다.

7개동 99칸,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가의 건축양식을 한 '송소고택'은 관광객들에게 고택체험을 할 수 있도록 민박을 내어주고 있다.

▲ 평산 신씨 종택 본채
ⓒ 조명자
송소고택을 나와 옆 마을 준평리로 발길을 돌렸다. 고려 왕건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충신 신숭겸 장군의 시조인 '평산 신씨 판서공파' 종택이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천여 평 대지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의 본채 건물이 있는데 정면이 길어서인지 지붕 용마루 비슷한 게 양쪽에 두 개나 있는 모양이었다. 이 건물은 임란이후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란다.

연세 드신 어르신들도 무리없이 오를 수 있는 주왕산

▲ 주왕산 제1 폭포
ⓒ 조명자
아, 그리고 국립공원 주왕산(周王山)이 있다. 720m의 주왕산은 7천만 년 전의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산으로 기암괴석이 빼어난 산이다. 국립공원 주왕산 계곡에서 경치가 가장 빼어나다는 대전사- 주왕암- 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 코스를 선택하기로 했다.

▲ 큰바위 얼굴처럼 보이지 않나요?
ⓒ 조명자
▲ 주왕산 제2 폭포
ⓒ 조명자
왕복 3시간 정도의 마춤코스였는데 무릎 시원찮은 아줌마가 걷기엔 거의 환상적인 수준이었다. 폭신폭신한 흙길을 따라 걷는 산길 양쪽에 삐죽삐죽 솟아오른 기암괴석하며 손을 담그면 그대로 연초록 물감이 들 것 같은 계곡물은 말 그대로 선녀가 하강한 선녀탕이었다.

게다가 길은 또 얼마나 순한가. 설악산이고 지리산이고 왕년에 명산깨나 다녀봤지만 이렇게 평이한 명산은 또 처음이었다. 가파르게 오르고 내리는 곳이 없으니 아프다고 앙앙대는 무릎인대가 보챌 일이 전혀 없었다.

금강산은 못 가봤지만 금강산에 비추어도 손색없을 것 같은 산이었다. 외국의 모모한 국립공원 또한 댈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 연세 드신 어르신들도 무리없이 오를 수 있는 산, 주왕산 가까이에 사는 청송 사람들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 같았다.

당대(唐代)에 주왕이라는 사람이 왕권도전에 실패하고 은둔해 살았다 하여 주왕산으로 불렸다는 전설이 있는 산. 그래서 주왕이 숨어 살았다는 주왕굴을 비롯하여 무기를 숨겼다는 무장굴, 신라군을 막기 위해 쌓은 주방산성 등 주왕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기도 하다.

5월 초에는 주왕산에서만 자생한다는 '수달래' 축제가 있다는 데 수달래는 이미 저버리고 흔적이 없었다. 진달래보다 약간 더 짙은 색깔에 20여 개의 검붉은 반점이 꽃잎에 새겨 있다는 꽃. 신라 마장군의 칼에 맞아 죽은 주왕이 흘린 피에서 솟아나왔다는 전설이 있는 꽃 수달래.

내 언제 다시 청송을 찾아 슬픈 전설의 꽃 '수달래'를 꼭 만나리라. 청송, 아름다운 고장을 떠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수려한 산수가 어우러진 청송이 여태껏 '청송보호감호소'라는 음울한 이미지로 대표되는 현실에 청송 출신 사람들의 분통이 얼마나 터졌을까? 혐오시설(?) 반대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얼핏 이해되어 웃음이 났다.

태그:#청송, #주왕산, #소헌왕후, #보호감호소, #수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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