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미FTA 협상이 결국 타결되었다. 협상 결과에 골몰하던 한 주간의 끝에서 나는 지난 3일에 방송된 MBC <프라임>을 보았다. '100세 청년 프로젝트 - 불로장생에 도전한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 날의 주제는 불로장생이라는 인간의 오랜 욕망과 100세까지 청년처럼 건강하게 살기 위한 현대의 과학적 노력에 관한 것이었다. 보다보니 벌컥 화가 났다. 한미FTA와 불로장생이 무슨 관계가 있냐고? 불로장생 하자는데 왜 화가 나냐고?

'100세 청년 프로젝트'의 키워드는 신약?

태고적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는답시고 지독한 횡포를 부렸다. 자기 혼자 볼로장생 하겠다고 수많은 백성을 죽도록 괴롭힌 것이다(당연히 그는 자신보다 백성을 더 위했던 어진 군주로 기억되지 않는다). 물론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군주를 섬기는 사회도 아니고. 또 불로장생의 염원은 군주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가 꿈꾸는 사회가 되었다. 그런 자신감은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달에 기인한다.

<프라임>은, 진시황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불로장생이 인류의 오랜 염원이었음을 언급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이 가까운 과거와 비교해서 현재 얼마나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말한다.

예를 들면, 15년 전의 의수가 단지 팔의 빈 자리를 메워주는 공간 대체물에 불과했다면, 현재의 의수는 미세한 팔의 움직임까지 실현하는 실제 인체 조직에 매우 가까워졌다는 것. 그리고 그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것이라고 하니, 앞으로 15년 후에는 정말 불로장생을 약속하는 캡슐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희망도 가능하겠다.

이런 미래긍정적인 태도는 프로그램 내내 지속된다.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는 레진씨가 치료 신약을 좀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더라면 그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정도의 안타까움만이 있을 뿐이다. 반면 신약 임상시험을 통해 일찍 약을 접한 하네케씨의 경우 현재 얼마나 멀쩡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이 두 사례의 비교를 보니 이 프로그램의 태도가 너무 명료해진다.

'100세 청년 프로젝트'의 키워드는 '신약'이었다. 레진씨와 하네케씨의 사례 비교에서 신약을 쓰지 못하면 불행해지고 신약을 쓰게 되면 행복해진다는 단순한 비교가 이루어질 때부터 프로그램을 보는 나의 시선이 아주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 두 사례를 비교하기 전에도 신약으로 시한부를 극복한 국내 사례들이 두루 소개되었지만, 그저 여러 갈래의 이야기 중에서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 프로그램의 내용은 계속 신약이 불로장생의 열쇠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의 위험에 대해서는 입다물면서...

프로그램이 소개하는 국내 사례 중에는 정식 승인 받기 전 임상 시험 중인 신약을 먹고 암 4기 환자가 병을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임상 시험은 말 그대로 시험 중인 것이다. 그런데도 신약을 빨리 접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임상 시험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불로장생을 위해 병원의 임상 시험에 적극 참여하라고 유도하는 듯한 이 내용은 제작진의 순진무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고도의 세련된 홍보인지 헷갈릴 정도다.

물론 프로그램은 100세까지 청년처럼 사는 것의 가치를 단지 생존에 두지 않고 삶의 질에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노년의 삶의 질을 담보하기 위해 치매를 예방하고 활동을 유지할 필요에 대해서 폭넓게 다뤄질까 기대하며 잠시 안도했다. '그렇지, 인류의 꿈이 신약에 달려있다니… 그것도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신약이라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맞으라고 말하는 프로그램이라니 말이 안 돼지'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나는 이내 더욱 놀랐다.

치매 백신을 맞은 해외의 어느 노인의 사례를 소개하며 백신을 맞은 후 치매의 공포에서 벗어났다고 다시 희망적인 신약 예찬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신약을 먹지 않으면 병을 고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지만, 신약을 먹으면 인간답게 오래도록 살 수 있다는 논리는 순진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어리석다.

신약 단 한 가지에 불로장생의 오래된 염원을 기대려고 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한미FTA 협정으로 국내에서 소고기 값이 떨어질지 몰라도, 의약품 값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미국 제약사들이 신약을 독점적으로 판매하면서 신약이냐 죽음이냐의 절박한 갈림길에 놓일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이 고통받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의료는 상품이 아니라 복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TV 프로그램마저 신약 먹고 오래 살자고 도통 사정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고, 복지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엄살이 늘었다며 의료급여를 줄이겠다고 한다. 한미FTA 협정으로 의료의 상품적 가치가 더욱 한국민을 위협하게 되었는데, 불로장생이니 노년의 삶의 질이니 하는 것들을 다루면서 고작 신약이라는 핵심어만 뱅뱅 돌고 있으니 깊이 있는 내용이나 폭 넓은 맥락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정부와 제약회사, 정말 믿기만 하면 될 일인가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의 전문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부, 제약회사, 환자의 신뢰 관계가 중요하다" 정부와 제약회사는 돈 없는 사람은 신약에 근접도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데 환자에겐 그저 믿으라고, 신약의 가격 원리에 대해서도 믿고 임상 시험의 성공률도 믿고 정부의 의약 정책도 믿으라고 한다. 한미FTA 타결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제작진의 의도가 너무 순진한 건지 지나치게 세련된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오랜 인류의 욕망이라는 불로장생은 저기 먼 창공의 달처럼 잡히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지 끝에 달린 달처럼 잘만 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이 현실적으로 논의된다. 그러나 현실은 더 중층적이다. 중층적인 현실의 겹을 외면한다면 이렇게 어이없는 내용이 공허하게 남는다.

다른 측면에서 또 하나의 불만은 이런 것이다. 불로장생이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노화와 죽음이라는 자연적인 과정의 속도를 느리게 하거나 아예 되돌리겠다는 욕망이다. 단지 젊게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의 속에 인간이 자연의 원리를 바꾸고 조정하겠다는 욕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을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뤄야 할 한 존재로 보지 않고 자연을 조정하는 특별한 존재로 보는 근대적인 관념으로 인해, 오늘날 환경의 파괴와 생태계의 파괴 등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 인간에게 자승자박의 무서운 파멸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 여전히 불로장생이 인류의 오랜 염원인가? 아니, 과연 인류가 모두 자연의 원리를 거슬러 죽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제할 수 있는가? 과학의 발달이라는 한 방향의 결과에만 의존하는 근대적인 전제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내재한 딜레마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보고 싶다.

내 미래를 신약에 맡길 순 없어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이것이다. "신약은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열어줄 것인가?" 나도 그것이 궁금하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이 제시하는 해법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미래를 예상한다. 신약은 약의 효능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약의 가격으로도 존재한다.

신약의 계급성을 살짝 가린 채 과학적으로만 설명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맹장 수술 할 돈도 없는 나로서는 치매를 예방하기 위해 두뇌와 신체를 충분히 움직이는 훈련을 할지언정, 치매 백신을 맞아가며 100세까지 살고 싶지 않다. 그때까지 살기 위해 치매 백신 말고 또 어떤 신약들을 얼마나 더 맞아야 한다고 할 것인가?

혹여, 의료 복지 시스템이 현저히 개선되어 가난 때문에 치료를 못 받는 일이 없어지고, 노인들도 한 사회의 시민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주어진다면 100세까지 사는 것이 기대될지 모른다. 그러나 100세까지 살기 위해 죽어라 돈을 모아 놔야 한다면, 그 때문에 골병들기 전에 그냥 곱게 늙어 죽겠다. 이것이 신약이 보여주는 나의 미래이다.

덧붙이는 글 | 티뷰기자단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