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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황희(黃喜, 1363~1452년) 정승은 오늘날 청백리(淸白吏)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미복(微服) 차림으로 황희 정승의 집을 방문한 세종 임금이 그의 청빈한 삶에 감탄을 마지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일국의 정승이 집안에서 멍석을 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먹던 밥상에도 누런 보리밥과 된장, 고추밖에 없어서 임금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또 이 일화는 관료집단의 부정부패를 견제하는 데에도 적용되고 있다.

황희, 그는 정말 가난했나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50년 넘게 관직생활을 하고 영의정만 18년을 넘게 지낸 인물이 그처럼 가난하게 살았다는 게 과연 사실일까? 또 후세의 양반 지식인들이 그의 이야기를 대대로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세종 임금이 황희 정승의 청빈한 삶에 감탄사를 터뜨렸다는 건 적어도 진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부에서는 황희에게 재상급 수준의 과전(科田)을 지급했다. 더군다나 과전을 빼앗긴 황희에게 과전을 돌려준 장본인이 바로 세종 임금이다. 그 점을 아래 <세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세종실록> 한글판. 출처 : 동방미디어 한국학 D/B.
ⓒ 동방미디어
위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4년 3월 18일에 세종 임금은 유배에서 복직된 황희에게 과전을 돌려주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세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황희는 충녕대군(세종) 대신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을 지지하다가 교하(交河)와 남원으로 유배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이 자신을 반대한 황희를 복권시키면서 그에게 과전을 돌려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정치적 관용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세종 자신이 황희에게 재상급 수준의 과전을 지급하도록 명령했는데, 막상 황희가 가난한 집에서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감탄사를 터뜨리기보다는 의아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50년 넘게 관직생활을 하고 18년씩이나 영의정 생활을 한 사람이 평생 지독하게 가난한 삶을 살았다면, 그것도 어딘가 통념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황희 정승이 실제로 가난했는가 하는 문제와 그가 초라하게 살았다는 문제는 분명 별개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이 방문하였을 때에 그가 초라하게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기에 그는 정부로부터 과전을 지급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청렴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는 왜 대외적으로 청빈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그리고 조선시대의 양반 지식인들은 왜 그의 청빈을 대대로 기념하였을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정치상황이 상호 유동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과 미국의 정치·경제상황이 상호 긴밀한 관련성을 보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14, 15세기의 조선-명나라 관계도 그러한 연관성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조선 초기는 역대 한중관계 중에서 사대주의가 가장 강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주식시장이 미국 주식시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듯이, 조선의 정치상황도 명나라의 정치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던 것이다.

황희는 왕권과 신권의 대결에서 탄생

그럼, 당시 명나라의 정치상황 중에서 조선에 영향을 미칠 만한 특기할 만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명나라에서 재상직을 폐지하고 1382년에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설치한 일이었다.

명나라의 대학사는 황제의 자문 기관에 그치는 자리였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년)은 재상 호유용(胡惟庸)의 반란을 명분으로 재상직 폐지라는 혁신적 결단을 내렸다. 주원장이 재상을 폐지하고 전각대학사를 설치하였다는 점을, 중국 25사(史) 중의 하나인 <명사> 본기3 홍무 15년조(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명 태조 홍무 15년(1382년)에 명나라는 재상직을 폐지하고 전각대학사를 설치하였다. 출처 : 대만 중앙연구원 25사(史) D/B.
ⓒ 중화민국(대만) 중앙연구원
명 태조 주원장이 재상직을 폐지한 것은 관료 집단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황제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에게도 민감한 사안이었다. 다른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조선시대에는 군주권(왕권)과 신권(臣權)이 대립·갈등을 보였다. 여기서 신권 즉 기득권 양반관료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리가 바로 재상직이었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서 재상직이 폐지되면, 이는 양반 관료집단의 이익에 대한 침해가 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박정희의 독재에 대한 ‘불쾌한 기억’ 때문에 황제 독재나 군주 독재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정치체제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것은 바로 황제독재 혹은 군주독재가 기득권 관료집단을 견제하는 동시에 일반 민중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신권이 강화된 시기에는 기득권 집단의 이익이 강화되는 동시에 민중의 삶이 어려워졌고, 반대로 군주권이 강화된 시기에는 기득권 집단이 반발하면서 민중의 삶이 상대적으로 나아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재상직이 폐지되었다는 소식은 조선의 정치구도에 영향을 주고도 남는 것이었다. 이는 관료집단을 견제하고자 하는 군주에게는 희소식이요, 군주권을 견제하고자 하는 관료집단에게는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양반 관료집단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을까?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재상직을 사수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그리고 재상직을 사수하자면, 양반 관료집단 안에서 비교적 청렴하고 또 자기세력이 별로 없는 사람을 재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청렴한 사람이 재상이 되어야만 재상 직책의 존폐 논란이 최소화될 수 있고, 또 세력이 없는 사람이 재상이 되어야만 재상직에 대한 군주의 견제가 완화되는 동시에 재상이 된 동료 관료의 권력 독점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에서 재상직을 폐지한 직후인 15세기 초반에, 조선에서 특별한 정치기반이 없는 한편 강직하기로 소문난 황희가 좌의정·영의정에 오른 데에는 그러한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조선-명나라의 정치상황이 상호 연동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명나라의 재상제 폐지는 조선의 재상제 폐지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조선의 양반 관료집단은 황희라는 인물을 내세우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재상직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희 역시 실소득과 관계없이 청렴한 생활을 대외적으로 과시함으로써 양반 관료집단의 기대에 부응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재상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사치를 피하고 청렴을 선택한 것 자체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미지 뒤에는 그 같은 정치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양반집단 기득권 유지 위해 '황희 신화' 창조

그리고 황희가 죽은 이후에도 양반 관료집단은 청백리 황희 정승의 ‘신화’를 계속 재창조함으로써 군주권을 견제하고 신권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양반 기득권세력이 군주권에 버금가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백리 황희 정승의 신화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정치적 상황 외에도, 황희 스스로가 청빈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객관적 조건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그는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392년에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 건국을 반대하면서 한때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던 사람이다.

또 1416년에는 ‘차기 대권주자’로서 충녕대군(세종) 대신 양녕대군을 지지했던 사람이다. 그는 번번이 ‘잘못된 선택’을 하였고 또 그런 뒤에는 매번 지조를 꺾고 새로운 정권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희는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고, 그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흠 잡힐 만한 행동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또 군주의 입장에서도 자기 세력이 없는 황희를 오랫동안 재상직에 앉힘으로써 군주권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황희라는 인물은 군주와 관료집단의 양쪽에서 모두 선호할 만한 캐릭터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황희가 청백리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의 신화가 양반 지식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는, 양반 관료집단의 대표자격인 재상 자리를 사수하기 위한 기득권 집단의 이해관계가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명나라의 재상직 폐지가 조선에까지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양반 기득권 집단의 정치적 고려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황희 개인의 성품이 청렴하였다는 개인적 측면 외에도, 이 같은 정치적 측면이 ‘청백리 황희 정승’의 신화를 낳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관료집단의 부정부패를 견제하는 데에 적용되는 청백리 황희 정승의 신화가 본래는 양반 관료집단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논리였다는 점을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에는 기득권 지식인들의 논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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