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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4월 24일 오스만투르크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수 백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체포, 처형했다. 이어진 5월 러시아군대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터키 동부로 강제 이주시킨다. 강제 이주과정에서 학살 또는 아사 등으로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

UN 인권위원회는 1985년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대량학살)'로 인정했고 2001년 1월 29일 프랑스도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드로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자 주>


90년이 지났어도... 아르메니아 정교회 수사들이 지난해 25일 오토만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90주년을 기념하는 가두행진을 예루살렘 고도에서 벌이고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토만 터키가 1차대전중 동부 터키에서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집단학살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모든 국가는 그들의 비극과 오류를 인정하면서 성장한다. 유태인학살을 인정한 독일이 신용을 잃었나? 독일은 성장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지난달 30일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공식 방문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과 1915년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연관지으며 이같이 말했다. 프랑스는 그러나 여기서 그쳤어야 했다.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씻을 수는 없다"

지난 12일 프랑스 하원 의회는 사회당(PS)의 주도로 1915~1917년 사이 발생한 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제노사이드였음을 부정하는 행위를 범죄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찬성 106, 반대 19의 압도적 표 차였다. 프랑스 하원의 관련법 통과는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여부가 뜨겁게 달아오른 시점에서 터진 까닭에 특히 민감한 반향을 일으킨 가운데 유럽 각 정부는 이것이 터키의 '표현의 자유'에 '끔찍한 영향'을 줄 것이라 평가했다.

법안 통과 직후 프랑스-터키 관계는 즉시 경색됐다. 터키에서 연일 항의 시위가 전개됐는데 지난 15일에는 500여 명의 시위대가 '제노사이드는 거짓말'이라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이스탄불 거리를 행진하기도 했다. 이스탄불의 프랑스 영사관에는 계란 세례까지 펼쳐졌다. 프랑스 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졌으며 지난 19일 터키의 라디오, 텔레비전 고등위원회(RTÜK)는 성명을 통해 프랑스가 문제의 법안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프랑스의 프로그램을 보이콧 할 것을 선언했다.

타이프 에르도간 터키 총리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문제이지 프랑스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일갈하며 "(문제의 법안은) 표현의 자유에 수치", "역사적 실수"라 규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문제의 법안이 통과된 12일은 공교롭게도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날이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인정하는 터키인의 한 사람인 파묵은 그러나 프랑스를 일러 '배신자'라 힐난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의 반응이다. 법안이 통과되기 사흘 전인 9일 터키의 아르메니아어 주간지 <아고스> 편집장인 라디칼 헌트 딩크는 이것을 "어리석은 짓"이라 맹비난 한 바 있다. 딩크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정의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징역 6개월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바 있는 터키 반체제 인사.

"나는 제노사이드를 거론했다는 이유로 터키에서 재판 받았다. 그러나 내 신념에 반한다 하더라도 나는 프랑스로 갈 것이다. 그리고 '제노사이드'는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TV 채널 CNN-터키에서 딩크는 이같이 말하며 표현의 자유를 역설하기도 했다.

에르도간 터키 총리가 '합당한 보복 대책' 마련을 선언한 가운데 터키에서 불법 취업한 아르메니아인 7만 명을 추방하자는 여론도 나온다. 결국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극단적 민족주의자와 인종주의자들만 신이 난 형국이다. 문제의 법안은 이제 막 터키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과거사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터키의 항의 시위대와 에르도간 총리의 구호다. 에르도간은 "더러움을 더러움으로 씻을 수는 없다"며 제국주의 프랑스의 과거를 돌아볼 것을 주장했으며 시위대 전면을 차지한 플래카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알제리인 학살을 인정하라!"

▲ 1961년 10월 17일 경찰에 체포된 알제리인들.
ⓒ http://17octobre1961.free.fr
1961년 10월 17일 피의 화요일

알려진 바와 같이 1954년부터 8년 동안 지속돼 130년에 걸친 식민통치를 마감한 알제리 독립전쟁은 비싼 피의 대가를 치러야했다. 알제리 독립전쟁 중 총 1백만 알제리인이 사망했으며 70만은 투옥됐다. 현지에서 발생한 야만적인 고문과 강간은 그러나 당한 자만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프랑스 편에서 싸운 현지 징발 무슬림 보충병인 50만 아르키 중 프랑스 군대 철수 이후 알제리 체제에 의해 학살된 15만의 이름은 프랑스와 알제리 양국에서 여전히 불명예로 남아있다. 오늘날 터키가 지적한 '프랑스의 알제리인 학살'은 불행히도 알제리라는 지리적 경계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17일 화요일 30여 명의 늙은 알제리인들은 라마단 끝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매년 10월 17일 그랬던 것처럼 파리의 생-미셸 다리 위로 모여들었다. 아들 손자를 데리고 나온 프랑스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올해로 45주년을 맞는 '파리의 학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인권 단체와 파리 시의원,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처음으로 사회당(PS) 의원들이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내년 대선을 겨냥한 계산이 들었거나 어쨌거나 이것은 무시할 수 없는 발전이다. 사회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그들은 파리의 학살을 부인해왔던 것이다. 현장에 나타난 정치인들이 차례로 연설을 하는 동안 알제리인들은 완강하게 침묵을 지켰다. 침묵은 어떤 항의보다 무거웠다, 45년 전의 그날처럼. 그날 무고한 알제리인들의 목숨을 휩쓸고 간 센 강의 물결만이 무심하게 흐를 뿐이었다.

45년 전 그날도 화요일이었다. 알제리 전쟁이 한창이던 1961년 10월 17일. 가족끼리 친구끼리 수 천 명의 알제리인들이 파리 외곽 방리유에 모여들었다. 지난 5일 파리 경찰국장 모리스 빠뽕이 내린 야간 통행 금지령에 항의하는 시위대였다. 프랑스 전 인구가 아닌 프랑스의 무슬림 알제리인에게만 한정된 금지령은 외모로 판단, 적용된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적 조처였다. 금지령이 발효되기 며칠 전 알제리 지하조직인 민족해방전선(FLN)의 테러로 11명의 경찰이 숨진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FLN은 17일 금지령에 항의하는 평화시위를 주창했고 시위는 물론 비밀리에 준비됐으나 경찰은 전날 정보를 입수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마침내 17일 당일, 시위 현장에 공권력이 배치됐다. 시위 주최측은 3000여 명의 시위대가 혹여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체 검열을 마쳤다, 평화시위였으므로. 그리고 두 무리가 만났을 때 학살은 시작됐다. 경찰국장 빠뽕은 진압이 시작되자 버스를 수색하고 운전기사들을 끌어내려 최대한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맨손으로 시위에 나섰던 수 천의 시위대는 무자비한 경찰의 곤봉에 고꾸라졌고 수 백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희생자 중 수 십 명은 익사했다. 경찰국으로 연결된 생-미셸 다리위에서 경찰은 시위대를 센 강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파리 한가운데서 일어난 인간 사냥이었다. 경찰의 폭력은 17일 밤부터 이어진 일요일까지 멈추지 않았다. 폭력이 일상이었던 당시 프랑스 경찰에게 알제리인은 인간이 아니라 소탕해야할 종족에 불과했다. 알제리인을 겨냥한 폭력에 처벌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벌되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 1961년 10월 생-미셸 다리에 걸린 플래카드... "여기 알제리인들을 빠뜨려 죽이다"
ⓒ http://17octobre1961.free.fr
파리 한가운데서 자행된 인간사냥, 센 강에 버려진 알제리인들

"3명의 사망자를 낸 시위대의 선제공격에 대한 경찰의 반격이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빠뽕은 진실 은폐 작전에 착수했다. 10월 17일 밤 즉시 거짓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10여구의 사체가 센 강에서 끌어올려지고 사망자 수가 예상 외로 커지자 설명이 필요했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로제 프레와 빠뽕은 이것이 알제리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패싸움의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조사위원회 발동을 요구했으나 드골 정권은 거부했다. 1962년 3월에는 급기야 사면법이 발효돼 '국가의 거짓말'을 용이하게 했다. 질서 회복을 이유로 당시의 모든 과오를 덮는 내용이었던 까닭에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은 금지됐다. 철저히 은폐된 것이다.

1980년대 흉흉한 소문처럼 떠돌던 파리의 야만적인 인간 사냥이 마침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30여년을 기다려야 했다. 1991년 역사학자 장-뤽 에노디가 사건을 파헤친 저서 <파리의 투쟁>을 내놓은 것이다. 지난 2002년 프랑스의 시사 주간지 <누벨옵세르바퇴르>를 통해 에노디는 당시 60여 명이 센 강에 익사했고 이어진 일요일까지 200여 명의 알제리인이 살해됐다고 말했다. 체포된 1만 여 알제리인들이 경찰서 안에서 견뎌야 했던 모욕과 폭력 또한 상상을 초월했으며 이들 중 태반은 알제리로 강제 추방됐다 한다.

프랑스인들의 입에 '파리의 학살'이 오르내리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빠뽕 재판이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 점령지구였던 보르도의 지롱드 도청 사무국장을 지낸 빠뽕은 경찰국장의 오른팔로서 2차 대전 당시 노인과 어린이를 포함한 1560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 비시 정부와 함께 대독협력에 앞장 선 경력이 발각돼 반인도 범죄 명목으로 보르도 중죄재판소에 회부됐다. 1997년 10월 8일 시작된 이 소송은 1999년 10월, 빠뽕이 10년형을 선고받으며 마무리됐으나 당시 87세의 빠뽕에게는 종신형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 1958년 파리 경찰국장에 임명된 모리스 빠뽕.
ⓒ http://17octobre1961.free.fr
"1961년 10월 17일 파리에서는 진정한 인간사냥이 벌어졌다. 이것은 명백한 반인도 범죄다!" 참고인으로 나선 에노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에노디의 입을 통해 비로소 프랑스는 빠뽕의 꼴라보(대독협력, 프랑스판 친일파)역 뿐만 아니라 1961년 10.17 학살과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반향은 컸다. 1999년 2월 프랑스 법원은 처음으로 10.17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지난 2001년 파리 시의회의 신랄한 논쟁 끝에 마침내 생-미셸 다리에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 동판이 걸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라크 대통령과 당시 총리였던 리오넬 조스팽은 국가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뒤이어 10.17 학살 희생자 가족의 소송이 진행됐으나 하나같이 기각됐다. 1945년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 재판이 정의한 '반인도 범죄'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라는 열강의 축의 암약에만 해당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것이 프랑스에서 새로운 형법으로 변화된 것은 1994년의 일이다. 그러나 법률불소급 원칙에 의거해 1961년 사건은 적용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큰 장애물은 알제리 전쟁과 관련된 '권력의 남용'을 기소할 수 없다는 내용의 사면법으로 이것은 1968년 공표됐다. 지난 2000년 파리 경찰국은 10.17 학살에 관한 자료에 에노디의 접근을 금지했다. 사건 발생 60년이 지나야 열람이 가능하다는 핑계였다. 결국 국가의 거짓말로 시작된 10.17 학살의 진실을 밝혀낼 통로는 막혀버린 것이다. 지난 17일 생-미셸 다리를 내리누른 알제리인들의 침묵이 통곡보다 침통했던 이유다.

"모든 국가는 그들의 비극과 오류를 인정하면서 성장한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 단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영화 <토착민>(라시드 부샤렙)은 1943~1945년 사이 프랑스 해방 전쟁에 참전한 아랍-베르베르(북아프리카의 종족) 군대를 그리고 있다. 옛 프랑스 제국주의에 휘말힌 23개국 8만여 명의 전사가 자유를 위해 싸운 이야기. <토착민>은 개봉 2주 만에 관객 150만을 동원한 쾌거보다 프랑스 사회를 향한 울림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하찮은'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나치로부터 프랑스 해방'이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삼색기 아래 뭉친 기억을 일깨우는 한편 이민자 2세들에게는 자긍심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적어도 개죽음 당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싸웠다!" 60여년이 지난 오늘 반목의 골이 깊어진 프랑스인과 알제리 이민자들의 화해를 시도한 영화라고 할까.

영화는 마침내 시라크 대통령을 울렸다. 시라크의 눈물은 곧 정부를 움직였고 식민국가 출신의 옛 전사들의 노후를 위해 2007년 1월 1일부터 매년 1억1천만 유로의 예산을 책정한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토착민>의 영향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10.17 학살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같은 수순을 밟아야 하는 것일까. 영화가 만들어지고 칸에 소개된 뒤 다시 한 번 시라크를 울려야 하는 걸까. 지난달 30일 예레반에서 울려퍼진 시라크의 연설이 공허한 까닭이다.

"모든 국가는 그들의 비극과 오류를 인정하면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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