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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가족 중 하나만 살려줄테니 고르라고 한다면, 이는 호의인가 저주인가?

메릴 스트립은 영화 <소피의 선택>에서 말도 안 되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유태인 소피로 등장한다. 강제수용소의 나치 장교는 소피의 아들과 딸 중 하나만 살려 주겠다며, 선택하지 못하면 두 아이 모두 가스실로 보내겠다고 협박한다.

소피는 울부짖지만 최후의 순간 아들을 안아 올린다. 왜 아들을 골랐는지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려낸 아들도 수용소에서 죽고, 소피는 내내 씻지 못할 상처 때문에 방황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최근 종영한 KBS 주말드라마 <서울 1945>(극본 이한호, 정성희/ 연출 윤창범, 유현기)에도 이런 ‘선택’이 있었다. 일본 순사 출신의 국군장교 박창주(박상면 분)는 인민군 장교 최운혁(류수영 분)의 동생 최송희(한민 분)를 강간한다. 문석경(소유진 분)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한 ‘화풀이’였다. 이 장면은 전쟁 중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듯 평범하게 처리됐다. 영상이나 연출에서 특별한 ‘방점’이 없었다는 얘기다.

좌익으로 몰려 옥에 갇힌 부모를 위해 찾아온 송희를 강간한 뒤 박창주는 최대한의 호의임을 강조하며 부모 중 한 명만 택하라고 한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아버지는 옥에서 자살하고, 결국 어머니만 석방된다.

이후 송희는 자신을 강간한 박창주를 ‘남편’으로 여기며 결혼을 애걸하다가, 오빠 최운혁의 손에 죽을 뻔한 박창주를 몸을 던져 살려주고 그의 아이를 낳는다. 자신에게는 이미 소중한 사람이 됐다는 게 이유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어느 시청자의 심각한 질문’이라는 글을 통해, <소피의 선택>에서 소피가 강요당한 선택의 어이없음을 비판했다. 마치 남아선호가 당연하다는 듯 일언반구도 쓰지 않은 작가를 맹비난하며, 원작 소설이 여성의 매저키즘과 남성의 새디즘을 프로이트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해 2차대전의 비극을 소재로만 차용했음을 지적했다.

스타이넘이 <서울 1945>를 보았다면 강간과 사랑조차 구분 못하는 최송희의 혼미한 정신세계를 아니 강간으로 맺어진 ‘사랑’과 혈통이 결국 분단의 상처를 봉합했다는 식의 도착적 결론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제작진은 강간을 일종의 남녀관계로 미화했을 뿐만 아니라, 원수에게 강간당하고도 일방적으로 남편으로 섬기며 그의 아이를 낳는 최송희를 통해 모든 이념 갈등과 비극을 화해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최송희 뿐 아니라 극중 모든 여인들의 사상은 ‘여필종부’라는 단순논리로 정의된다. 마타하리를 뛰어넘는 김해경(한은정 분)의 눈부신 활약 또한 오직 사랑하는 남자 최운혁 때문이었다. 여자가 따르는 것은 ‘사상’이 아니라 ‘사랑’ 에 불과했다. 사랑은 사상보다 강했고, 정조는 사랑보다 목숨보다 우선했다.

<서울 1945>가 기획의도대로 ‘하나의 사랑, 두 개의 이념’을 다루는 데 있어 달라진 사회 분위기와 시대상을 얼마나 반영할지, 나아가 새로운 남북 관계의 가능성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 일말의 기대를 가졌던 시청자들에게는 배신감만 남았다.

‘이념의 시대’를 정면에 내세웠으나 이념은 애초부터 멜로를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고, 여성의 사상과 가치관은 오직 ‘지아비’와 ‘정조’를 따라 운명적으로 결정된다는 시대착오적인 결론만 남긴 채 <서울 1945>는 장장 8개월에 걸친 전파낭비를 끝냈다.

덧붙이는 글 | 경북대신문과 데일리서프라이즈에도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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