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경복궁 경회루
ⓒ 이정근
세종 23년 5월. 경복궁에서 대규모 연회가 베풀어졌다. 국빈급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는 경회루에서 베풀어졌지만 대궐 정전인 근정전에서 연회가 베풀어진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임금 세종은 근정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왕비 소헌왕후는 강녕전에서 별도의 연회를 베풀었다. 근래에 없었던 큰 연회였다. 연회를 주관한 세종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비롯한 종친과 부마를 초대했다. 황희정승과 삼사(三司)의 간원들 그리고 이판, 병판 등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육조의 참판급 이상 신하를 초치한 연회였으니 국가적인 행사나 다름없었다.

▲ 경복궁 근정전 현판
ⓒ 이정근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다. 경복궁을 설계한 정도전은 조선을 이끌어갈 선비정신을 경복궁에 구현했다. 우선 네모 반듯하다. 사방위에 따라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 남에는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을 짓고 중요 전각을 남북으로 배치했다. 백악의 정기를 받기 위해서다. 그 중심 건물이 근정전이다. 근정전이라 명명한 이유도 근면하게 백성을 위하여 열심히 뛰라는 것이었다.

이날 연회에서 이채로웠던 점은 종실 어른과 원로 대신들만을 위한 연회가 아니라 한글 창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집현전 학사들과 젊은 승정원 승지들 그리고 춘추관 신하들에게 주찬을 내려주어 연회에 동참토록 한 것이었다. 이는 동궁(훗날 문종)과 함께 차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 인재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배려도 깔려 있었다.

▲ 훈민정음
ⓒ 이정근
이러한 연회를 베풀게 된 배경에는 집현전 학자들의 땀의 결정체, 한글 창제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젊은 학사들을 격려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다음 보위를 이어 받을 동궁이 명나라 칙서를 맞이하는 등 차세대 왕으로서의 동궁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모습은 국정을 장악하고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는 세종의 자신감의 발로였다.

세종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둘째 아들 유(瑈,수양대군)가 욕심이 좀 많아 걱정이 되었지만 맏아들 향(훗날 문종)이 세자의 역할을 잘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맏형 양녕에게 20년 넘게 지고 있던 빚을 갚았기 때문이다.

“형님, 해서지방 다녀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무슨 말씀을요. 주상전하의 성은에 편하게 다녀 왔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본 형님이란 낱말이다. 부왕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저에 있을 때 코 흘리게 막내 동생 충녕이 부르던 소린데 이게 얼마만인가? 아득히 먼 옛날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감회가 새롭다.

▲ 묘향산에 묵을 때 암자 스님의 청을 받아 양녕대군이 써준 글씨(지덕사 소장)
ⓒ 이정근
“묘향산도 다녀오셨다면서요?
“금강산은 화려한 멋이 있고 묘향산은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아우 세종의 입에서 금강산이라는 말이 나오자 옛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아버지 태종에게 반항하는 의미에서 세자의 몸으로 대궐을 탈출하여 밀행했던 금강산. 그 아름다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세속의 번뇌를 털어버리고 묻히고 싶었던 산. 세자의 멍에를 벗고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날고 싶었던 산이었다.

“평양은 어떠셨나요?”
“안학궁 터를 살펴본 게 큰 보람이었습니다.”

내치에 성공한 세종은 이제 눈을 밖으로 돌려야 했다. 즉위 초 부왕 태종의 후견으로 이종무 장군을 앞세워 대마도를 정벌했으니 이제는 북방이었다. 조선 왕조 이전 이 땅에 살고 있던 조상들은 국력이 쇠할 때 요동과 북변을 내주었으나 최소한 두만강과 압록강은 세종의 신념이었다. 평안도 북방에서 날뛰는 야인과 함길도 북변에서 소란을 피우는 여진족이 신경에 거슬렸다.

▲ 1947년 평양 을밀대
ⓒ 러시아 기록보존소
“평양에서 좋은 일이 있으셨다면서요?”
“좋은 일이라니요?”

세종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양녕은 말끝을 흐렸다. 도대체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양녕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세종은 만면에 웃음만 머금을 뿐 말이 없었다. 이때였다. 장중하게 울려 퍼지던 아악이 잠시 멈추고 대금 독주가 잔잔히 흐르며 한 수(首)의 시(詩)가 읊어져 나왔다.

別音容兩莫逅(일별음용양막후)       
楚臺何處覓佳期(초대하처멱가기)       
粧成斗屋人誰見(장성두옥인수견)        
眉감深愁鏡獨知(미감심수경독지         
夜月不須窺繡枕(야월불수규수침)      
曉風何事捲羅유(효풍하사권라유)
            
            
그대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으려니 대처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연지곤지 고운 얼굴 누가 보리오만 눈 섶에 낀 수심은 거울만 알리라
달빛은 어이하여 비단 이불 엿보며 새벽바람 왠 일로 휘장을 흔드는고

양녕은 까무러칠 듯이 놀랬다. 자신이 평양을 떠나올 때 정향이라는 여인에게 써준 시가 구중궁궐 깊은 곳 대궐에서 읊어지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양녕의 턱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낭낭한 그 목소리가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가 흘러나오는 방향을 쫓아 시선을 돌려보니 병풍만 쳐져 있을 뿐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좌우를 살펴보니 분명 여기는 궁궐. 많은 사람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몸 둘 바를 모르던 양녕이 세종을 바라보니 만면에 웃음을 띠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 1947년 평양 부벽루
ⓒ 러시아 기록보존소
“원로에 고생 많으신 형님을 위하여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세종이 시립하고 있던 내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붉은 비단에 싼 꾸러미를 가지고 들어와 양녕 앞에 대령했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어찌 할 바를 모르던 양녕이 세종을 바라보자 풀어보라는 눈빛이다.

양녕은 보자기를 풀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양녕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붉은색 비단 보자기를 풀르자 하얀 치마가 눈에 띠었다. 낯익은 치마였다. 치마를 펼치니 거기에는 글씨가 있었다. “하~악!” 하는 외마디 소리가 양녕의 입을 튀어 나왔다. 그것은 경악의 소리와 충격의 탄성이었다.

자신이 평양을 떠나올 때 써준 시를 여기에서 듣고 그 시가 씌어진 치마를 여기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환상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현실이었다. 형과 아우 사이에 놓여있는 치마에 씌어진 저 글은 분명 자신의 글씨였다.

흐트러진 자세를 추스리며 정신을 가다듬어도 자꾸만 혼미해 진다. “누구일까?” 낯익은 그 목소리가 자꾸만 궁금해진다. 시를 읊던 귀에 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즐거워야 할 연회가 고문 같았다. 그때였다. 내관을 부른 세종이 명을 내렸다.

▲ 경복궁 향원정
ⓒ 이정근
“들라 이르라.”

왕의 명이 떨어지자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노란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받쳐 입은 여인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적마다 치마 사이에 살짝살짝 보이다가 치마 속으로 사라지는 오이씨 같은 버선발이 너무 예뻤다.

남향으로 정좌한 임금에게 다가간 여인이 절을 올렸다. 동향으로 앉은 양녕이 그윽이 바라보니 절을 하며 구부리는 등선이 너무나 고왔다. 임금에게 절을 마친 여인이 양녕에게 다가와 절을 올렸다.

▲ 경복궁 처마. 음과 양이 마주친 것 같다.
ⓒ 이정근
“아니, 네가 누구냐?”

여인이 절을 마치고 고개를 드는 순간 양녕은 까무러치게 놀랬다. 이 여인은 평양에 두고 온 여자가 아닌가? 안악궁터에서도 홀렸지만 이 여인에게 또 홀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는 주변에 견마잡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우 세종이 있다는 것이 다를 뿐 홀리는 기분이었다.

“정향이옵니다.”

그렇다. 이 여인은 틀림없는 정향이었다. 평양에 두고 온 양녕의 여자 정향이었다. 형님 양녕이 평양 유람길에 나선다는 소식을 접한 세종은 평안감사에게 “양녕대군을 융숭히 대접하라”는 밀지(密旨)를 보낼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평양이 색향이라 하니 짐이 걱정이다. 품격 없는 여인이 대군 곁에 다가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이러한 밀명을 받은 평안감사는 고심했다. 유람길에 나선 한양 진객 양녕대군에게 객고를 풀어드려야 할 텐데 아무나 범접시켜서는 안 된다니 난감했다. 몇날 며칠 궁리한 끝에 생각해낸 것이 평양기생 정향이를 주막집 여인으로 등장시키는 것이었다.

▲ 원구단. 현재 조선호텔 옆에 남아있는 건물은 고종 때 지은 건물이다.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원구단은 임금이 유일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곳이다. 그 중에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원구단이 으뜸이었다. 하늘의 아들은 하나라는 명나라의 강압에 못이겨 세조 이후 제사를 지내지 못하다 고종황제 등국후 부활했으나 일본의 강점으로 폐지되었다.
ⓒ 이정근
몽롱한 정신에 헤매고 있을 때 웅장한 음악이 다시 울려 퍼졌다. 박연이 심혈을 기울여 편곡한 그 당시의 실험 곡이었다. 연산군 조에 이르러 기악(妓樂)으로 흘러버려 품위를 잃어버렸지만 세종조의 아악은 장중했다.

1116년(고려 예종11년)에 송나라에서 들어온 아악은 “우리 것이 아니다”는 세종의 지적에 따라 궁중 음악장 박연이 갈고 다듬어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원구단에서 연주되었을 때 “이제 우리의 냄새가 나는구만”이라는 세종의 칭찬을 받은 박연이 의욕을 가지고 궁중 연회에 선보인 음악이었다.

세종의 배려로 한양에 올라온 정향은 양녕과 감회어린 해후를 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양녕의 바람이 더 컸을런지 모른다. 한양에 눌러앉은 정향은 생이 다하는 날까지 양녕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세종의 밀명을 받들어 평안감사가 연출한 것은 한마당 이벤트였지만 황혼이 물든 옛 성터를 서성이던 양녕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 정향이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