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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소비자보호원(소보원)이 2006년 상반기 소비자 위해사고를 분석한 결과 '토지 건물 및 설비군으로 인한 위해'가 877건에 이르렀고 특히 욕실, 화장실 등 위생시설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진 사고가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가정 내 노인 안전사고 조사에서도 욕실·화장실에서 미끄러지거나 넘어진 사고가 전체 132건 중 35건에 이르렀다. 

욕실, 베란다 등 집안 미끄럼사고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문제는 소비자보호단체에서 사고 예방을 위해 바닥용 타일 미끄럼방지 기준을 법제화하라고 10년 전부터 수차례 건의해 왔지만 건교부와 건설업계에선 '규제완화'와 '업계자율'을 내세워 눈을 감고 있다는 것. 어린이와 노약자의 안전 사각지대로 떠오른 욕실 미끄럼 사고. 그 실태와 대안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 미끄럼사고가 난 ㄹ아파트 욕실(왼쪽)과 미끄럼방지타일로 시공한 주택공사 분양아파트 욕실 내부(오른쪽).
ⓒ 오마이뉴스 김시연

아파트 욕실 '안전사각지대'

▲ 피해자 박아무개씨의 남편 황종원씨가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지난 8월 13일 서울 방배동 ㄹ아파트에 사는 박아무개(55·여·2급 장애)씨는 샤워 도중 바닥에 미끄러져 고관절(엉덩이관절)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2005년 1월 입주한 새 아파트였지만 욕실 샤워부스 바닥 타일이 물기 때문에 미끄러운 데다 몸을 지탱할 손잡이도 없었다.

박씨 가족은 "미끄럼사고가 충분히 예견되는 샤워부스 바닥에 미끄럼방지타일로 시공하지 않은 시공업체의 잘못"이라며 시공사인 ㅅ건설을 상대로 치료비 등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또 사고 직후 입주민 조사 결과, 300여 세대 가운데 50여 세대가 크고 작은 욕실 미끄럼 사고를 겪은 것으로 나타나자 입주자대표회의가 나서 시공사에 욕실 미끄럼방지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애초 ㅅ건설 측은 "타일에 물기가 있으면 미끄러지는 건 당연하다"면서 "설계도면에 따라 승인받은 바닥용 타일로 시공했고 입주민 과실이기 때문에 보상은 어렵다"고 밝혔으나 최근 '도의적 차원'에서 입주자들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0년에도 부산 우암동 ㄹ아파트 입주자들이 입주 8개월된 아파트 욕실과 뒷베란다 타일 문제로 미끄럼사고가 잇따르자 시공업체를 상대로 타일 교체를 요구했다. 당시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결국 2001년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시공사에서 보상금 지급이나 타일 교체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자기 집 욕실에서 넘어져 놓고 왜 남 탓?'

▲ ㄹ아파트 각 동 출입구 게시판에 붙은 '욕실 바닥 미끄럼 사례 서명부'. 이 곳에만 14세대에서 서명했고 전체 50세대가 넘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2002년 제조물책임법(PL) 시행 이후 각종 설비나 공산품 문제로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으나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해 피해 보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정 내 욕실이나 화장실에서 흔히 발생하는 미끄럼 사고가 대표적인 사례.

대부분 피해자는 자기 집에서 발생한 사고는 자신 탓으로 여겨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 한국소비자연맹에 따르면, "백화점 화장실이나 공중목욕탕 등에서 미끄러져 보상을 받은 사례는 있지만 개인 주택에서 발생한 미끄럼사고로 보상을 요구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밝혔다.

이런 인식은 건설업계도 다르지 않다. 욕실이나 화장실, 베란다에 까는 바닥용 타일 시공시 미끄럼방지 기능에 관한 규정이 없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것.

법무법인 충정 최병문 변호사는 "제조물책임법 '설계상의 결함'에 해당할 수 있으나 설계상에 '미끄럼방지'에 관한 규정이 없으면 시공업체에 책임을 묻기 쉽지 않다"고 밝혔다.

"고급아파트일수록 미끄럼방지타일 외면"

미끄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최근 미끄럼방지용 타일로 시공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문제는 중대형 고급아파트일수록 표면이 울퉁불퉁하거나 거칠어 때가 많이 묻는 미끄럼방지타일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

타일제조업체인 동서산업 문주영 과장은 "가격 차이는 없지만 요즘 민영아파트는 미적인 부분 때문에 논슬립(미끄럼방지)보다는 일반 타일을 선호하고, 크기도 한 변이 300mm 이상 큰 타일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밝혔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서 96년 '가정용 욕실 바닥재의 미끄러짐 사고유형'을 조사한 결과 한 해 접수된 사고 49건 중 40건(81.6%)이 미끄러운 타일 표면에서 발생했고 거친 표면과 요철 표면은 각각 6건(12.3%)과 3건(6.1%)에 그쳤다. 결국 건설업체에서 선호하는 표면적이 넓고 미끄러운 일반 타일이 미끄럼 사고를 부추기고 있는 셈.

▲ 2005년 1월 입주를 시작한 방배동 ㄹ아파트는 37·47평대 중대형 단지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소보원, 10년 전부터 미끄럼방지 기준 마련 건의

96년 당시 소보원에서는 "현행 '건축법 시행규칙'과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칙'에 욕실 바닥재의 표면처리 상태 등 구체적인 내용은 규정 안돼 있다"며 건설교통부에 "바닥재 크기가 작고 표면이 거칠거나 요철무늬를 사용하도록 하는 법규 보완 또는 시공 기준 마련"과 아울러 건설업계에 자율 기준 마련을 요청했다.

98년과 2003년에도 노인안전사고 예방차원에서 비슷한 건의를 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당시 조사를 맡았던 김선환 소보원 생활안전팀 차장은 "결국 개인공간의 사고위험 회피의무가 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이라면서 "사고가 나도 사업자 과실이나 부당성을 주장하기 어려워 보상받기 어렵다"고 밝혔다.

건교부는 규제완화 추세에 역행한다는 업계 반발을 우려하고 있는 상황. 건설교통부 주거환경팀 관계자는 "주택자재와 관련해 소방 화재 관련 내용 외에는 규정된 것 없다"면서 "욕실 바닥용 타일에 관해서는 민간 자율에 맡기고 있다"고 밝혔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 역시 "최근 추세에 따라 설계서에 포함되면 미끄럼방지타일을 쓰는 경우는 있지만 욕실 바닥 타일을 어떤 것으로 써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고 밝혔다.

미끄럼방지 기준 적용, '주공'이 유일

현재 건설업체 가운데 욕실 바닥용 타일과 관련해 내부 기준이 있는 곳은 대한주택공사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택공사에서는 2003년부터 시방서에 정지마찰계수(CSR) 0.6 이상(1에 가까울수록 마찰력이 높음)인 미끄럼방지 기능 타일만 쓰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타일업체에서도 주택공사에 납품할 때는 이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오주희 대한주택공사 기술기획처 차장은 "미끄럼 사고 위험이 큰 노약자 등 저소득층 대상 소형/임대 주택 물량이 많아 사전 예방 차원에서 마련했다"고 밝혔다. 노약자가 많이 거주하는 임대아파트에는 더 강화된 기준을 적용한다고 한다.

▲ 미끄럼사고가 난 ㄹ아파트 욕실 바닥용 타일(왼쪽)과 올해 초 입주를 시작한 주택공사 분양아파트 욕실 미끄럼방지 타일(오른쪽). ㄹ아파트 타일과 달리 바둑판 모양으로 요철처리돼 있고 튀어나온 부분은 표면이 거칠거칠해 한눈에 미끄럼방지용임을 알 수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문주영 동서산업 과장은 "다른 건설업체에서 (미끄럼방지에 관해) 주공에 준하는 구체적 요구는 없다"면서 "다만 2002년 제조물책임법 적용 이후 미끄럼 발생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체 기준을 정해 일반 타일도 최소한의 미끄럼방지 기준을 통과한 제품만 생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형 민간건설업체인 ㅅ건설 홍보팀 관계자는 "현재 욕실 바닥재의 미끄럼방지기능에 대한 제도적인 기준이 없어 따로 적용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미끄럼방지타일 시공 의무화해야"

현재 산업자원부의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 시행규칙' 안전검사대상 공산품에 '미끄럼방지타일'도 2004년 12월부터 포함돼 있다. 하지만 정작 건설업체들이 욕실 바닥 등에 미끄럼방지타일을 시공할 의무는 없어 유명무실한 상황이다.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 생활용품안전팀 김윤근 사무관은 "안전검사는 바닥용 타일 가운데 미끄럼방지타일로 나온 제품 성능에 문제가 없는지 검사하는 것이지 주택 건축시 설치 의무까지 규정하는 건 아니다"라면서 "건교부에서 주택건설 관련법으로 제한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밝혔다.

미끄럼방지타일 국가공인시험기관인 한국건자재시험연구원 박덕인 과장은 "지난해 서울의 한 병원 화장실에서 미끄럼사고가 발생했으나 미끄럼방지타일을 시공한 것이 인정돼 최근 1심에서 병원측이 일부승소 판결을 받았다"면서 "법을 강화해 주거공간과 다중이용시설 등에 미끄럼방지용 타일 시공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미끄럼방지제나 테이프 발라 마찰력 높여야
욕실 미끄럼사고 예방하려면

욕실 미끄럼 사고를 영구적으로 예방하려면 욕실 바닥 타일을 미끄럼방지타일로 완전 교체해야 한다. 하지만 바닥 타일 리폼 비용만 20만 원 정도 들고 기존 타일을 뜯다 보면 방수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때문에 흔히 미끄럼방지제나 테이프를 사용한다.

'미끄럼방지타일'은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에서 관할하는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 시행규칙'에 따라 한국건자재시험연구원의 안전검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연구원에선 정지적 마찰계수(CSR)가 건조와 습윤 상태 각각 0.5 이상인 제품에 합격 판정을 내리고 있다. 현재 안전검사 의뢰업체는 동서산업, 성일요업, 선경산업, 서울세라믹스, 삼영산업, 한국요업, 대보세라믹스, 한국타일도기상사 등 10여개 정도.

기존 타일 위에 간단히 붙일 수 있는 미끄럼 방지 테이프는 시중에서 몇 천원이면 구할 수 있지만 잘 떨어지고 때가 묻는 단점이 있다. 타일 위에 발라 마찰력을 높여주는 미끄럼방지제는 수명이 5년 정도지만 한 평 정도 바르는 분량이 1만5천원 정도로 다소 비싼 편. 이밖에 욕실용 깔판, 슬리퍼 등 미끄럼방지 기능이 있는 다양한 제품들이 시중에 나와 있다.

미끄럼방지제 수입업체인 ㅇ교역 관계자는 "미국 장애인보호법에는 정지마찰계수 0.6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면서 "한국건자재시험연구소에 의뢰해 실험한 결과 일반 바닥용 타일의 경우 건조 상태에선 정지마찰계수가 0.74 정도로 높았지만 물기가 있으면 0.39로, 비눗물에선 0.33까지 떨어졌다"고 밝혔다. 일반 바닥용 타일 위에 미끄럼 방지제를 바르면 각각 0.83, 0.63, 0.53까지 정지마찰계수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 김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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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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