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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흥숙/그림 김수자 기자

▲ 파란 하늘과 평상만 하던 큰 나무 그늘
ⓒ 김수자
그때도 나무들이 서둘러 몸을 키우고 있었으니 꼭 이맘때였나 봅니다.

몸 안에 목마른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자꾸 갈증이 나던 시절, 떠오르는 사람이 꼭 하나 있었지만 연락할 수는 없었습니다. 학기말 시험 중이라 끝나고 만나기로 했었으니까요.

한 달 전쯤 미팅에서 처음 본 그는 '다음에 언제 만날까요?'라는 말을 하지 않아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남들이 다 하던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제 콧대를 꺾으려 했다는 걸 수십년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것을 몰랐으니 여간 혼란스러웠던 게 아닙니다.

'함께 있었던 한나절 동안 분명히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왜 다시 보고 싶다는 말을 안 하는 걸까?'

나중에야 제가 다니던 학교로 편지를 보내와 어렵게 한번을 만나고는 시험이 끝난 후 다시 보기로 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영어 회화 클럽엔 ㅅ 대학교에 다니는 서글서글한 회원이 있었습니다. 주말 낮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 저를 '서글씨'가 부르더니 오후에 별 일 없으면 자기 학교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 학교에 다니는 그가 생각나 두말 않고 따라 나섰습니다. 시험기간이니 그가 꼭 도서관에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도서관을 보고 싶다고 하자 서글씨는 아무 의심 없이 앞장을 섰습니다.

"우리 학교 도서관이 개가식이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친절한 서글씨는 추임새까지 넣어주었습니다. 저도 그 학교 도서관이 좋다는 얘기는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서글씨를 따라 도서관을 구경하는데 대학 도서관에 유일하다는 자주색 카펫과 개가식 구조보다는 공부하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혹시 그가 있는가?' 요리조리 살펴보았지만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낙담한 마음을 감추며 애써 명랑하게 서글씨에게 고맙다고, 도서관이 이렇게 좋으니 공부가 절로 되겠다고 덕담을 했습니다. 기분이 고조된 서글씨가 밖에 나가 시원한 것을 먹자고 제안했지만, 무언가 저를 붙잡는 게 있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저 큰 나무 아래 앉아 쉬면 어때요?"

대안을 내자 착한 서글씨는 기쁜 얼굴로 동의했습니다. 어느 대학이나 그렇지만 그때는 그 학교에도 건물보다 잔디가 많았습니다.

큰 나무 아래 살짝 비탈진 잔디밭은 그대로 녹색 우단 보료였습니다. 그 위에 앉으니 도서관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도서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중에 언뜻 그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았습니다.

신사로 불리던 서글씨가 아이스크림을 사오겠다고 자리를 떴지만 오히려 도서관 쪽을 보기가 쑥스러웠습니다. 그냥 큰 나무 아래 그늘 속에 양치식물처럼 앉아 저 멀리 파란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친구는 어디 갔어요?" 조금 붉은 목소리가 물었습니다. 돌아보니 왼팔을 뻗어 큰 나무에 기댄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꼭 목소리만큼 붉었지만 눈빛은 수줍고 서늘했습니다. 파란 하늘이 그의 뒤로 무한히 아름다웠습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같은 클럽 다니는 친군데 학교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해서요…… 걘 아이스크림 사러 갔어요."

사실을 말하는데도 서글씨에게 조금 미안했습니다.

"아이스크림요? 그럼 금방 오겠네요. 내일 시간 있어요?"
"며칠 있으면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인데……."
"그땐 그때고……."
"시험 다 끝나셨어요?"

그가 약간 초조한 시선을 서글씨가 사라진 방향으로 던지며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상관없어요"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 날 ㅅ 대학교 앞 유성 다방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햇수로 4년 후부턴 한 방을 쓰게 되었고요.

달라서 끌렸던 걸까요? 그는 제가 왜 그러는지를 모르고 저는 그가 왜 그러는지를 모르는 채 시간이 자꾸 흘렀습니다.

밤새 싸우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구청으로 가자고 큰 소리로 약속해 놓고 막상 아침이 오면 각자가 바빠 구청행을 미룬 날들도 많았습니다. 삶은 고해라고, 즐거움은 짧고 괴로움은 길다고 퉁퉁 부은 눈으로 주정하던 밤이 영영 계속될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 또한 제가 왜 그러는지 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둘이 함께 목마른 식물처럼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지요? 시들기 시작하자 싸움도 울음도 줄어들었습니다.

틈틈이 그를 괴롭히면서도 밖에서 상처를 받을 때면 역성드는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그의 그늘로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온 인류를 사랑하는 것처럼 어렵다더니, 저를 사랑하는 일이 퍽도 힘겨웠나 봅니다.

그의 머리칼은 성글어지고 날씬하던 허리는 굵은 나이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날, 그 큰 나무 아래서 '순간 속 영원'을 보았다고, 그가 바로 내 큰 나무라고.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저를 그 곳으로 이끌었던 서글씨가 생각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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