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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모든 불행을 살아내는 것."
―카잔차키스(1883~1957)

ⓒ Michael Cacoyannis
자아의 탐구자가 꼭 실제 인물일 필요는 없다. 책이나 영화, 사물, 풍경, 느낌일 수도 있고 소설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또한 아무리 유명한 그 누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책을 썼으며 어떤 삶을 살았든 간에 결정적으로 자아의 탐구자는 바로 당신 자신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이 작가 카잔차키스든 그의 주인공 조르바든 조르바 역의 앤서니 퀸이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지 않았거나 앞으로 읽을 생각이 없어도 상관없고 조르바의 말처럼 책 따위는 태워 버려도 상관없을 것이다.

삶의 '목적'이라는 말을 초라해질 대로 초라해지게 만드는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으뜸이 아닐까 싶다. 인생에서 목적은 많은 사람을 절망하게 만든다.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바로 우리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 전에 그 대답의 자리를 순식간에 차지해 버리는 수많은 목적과 희망들이 얼마나 많은 우리의 목적과 희망들을 방황과 절망으로 바꾸어 버렸는가.

영화 <남극일기>에서 최도형과 그가 이끄는 무리의 목적이 '도달 불가능점'이라는 것은 절묘한 역설이자 모순이다. 그토록 이해할 수 없고 그토록 끔찍하며 고통스러운 과정 끝에 도달한 곳은 어디인가. 길은 없으며 보이는 것을 다 믿을 수도 없다.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이기도 하다. 최도형의 광기는 목적의 파멸이다. 그런데 참으로 답답하고 두려운 것은 우리가 바로 최도형이라는 점이다.

레마르크의 소설 <하늘은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에 나오는 주인공 카레이서는 랠리 도중에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토록 따뜻한 가슴과 부드러운 뇌수를 가진 레이서들이 도달하기 위해 일제히 달려가는 곳이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 출발했던 도시 브레치아라는 것이 놀랍다고. 전력을 다해 전속력으로 결국은 브레치아에서 출발해 브레치아로 돌아오는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세계와 인간에 대해 갓 생각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서양의 전통적 세계관의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근대정신에 입각한 이원론은 카잔차키스의 눈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반대이다. 베르그송, 니체와 불교에 대한 그의 열광은 주체와 객체가 일치된 조르바의 자유로 귀결된다. 흔히 조르바의 자유를 이성의 감옥에 갇혀 있던 육체의 해방, 인위에 대한 무위자연의 승리 등으로 정리해 버리고 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라즈니쉬는 조르바를 자아의 바깥 세계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향유한 자유인으로, 붓다를 내면세계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추구한 자유인으로 불렀다. 그러나 둘 다 반쪽에 불과했고 그 둘을 통합한 보다 완전한 자신의 자유 철학을 '조르바-붓다'라고 표현했다. 붓다에 대한 것은 여기서 논외로 친다 해도 조르바에 대한 라즈니쉬의 이러한 논평은 매우 부당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카잔차키스 혹은 조르바가 이원론의 틀을 애초에 벗어 던졌다는 점을 까맣게 잊고 인간의 삶과 자연에 대한 조르바의 거침없는 열정과 교감을 바깥 세계의 향유로 오해하고 있다. 실은 조르바와 라즈니쉬의 '춤'은 똑같은 주객 초월의 자유를 추구한다. 온갖 동서양 텍스트의 폭넓고 유연한 해석이라는 미덕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의도된 오해는 라즈니쉬 저작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나쁜 버릇이다.

조르바의 자유를 통해 카잔차키스가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한 것은 아나키즘이나 탐미, 남근주의 따위는 아니다. 시인 랭보가 신물 나는 유럽 기독교 문명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세계의 빛을 볼 수 있는 견자(見者)의 사명을 자각했듯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에서 낡아빠진 세계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넘어선 투쟁을 결심했다.

저마다 이마에 종교, 이데올로기, 이런저런 속물주의의 브랜드를 덕지덕지 처바른 그 수많은 삶의 '목적'과 '희망'들을 버리지 않으면 사물과 자연, 세계는 언제나 '그놈이 그놈이고 그년이 그년이며 그 바다가 그 바다'인 채로 남을 것이다. 눈뜬 아침이 늘 새롭고 고마우며 만나는 사람마다가 모두 반갑고 꽃 한 송이, 날짐승이나 벌레 한 마리가 소중하게 느껴지려면 조르바처럼 살아야 한다. 수많은 아름다움과 가치들이 진열된 쇼케이스 앞에 점잖게 서 있어서는 안 된다. 유리를 깨고 그 안에 뛰어들라.

소설가 이윤기에게 왜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오징어와 팩 소주를 들고 가서 통곡을 했는지 물을 필요도 없다. 당신이 직접 가보면 된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삶 안에 간직된 비의이다. 그것을 숨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 이윤형도, 고 이은주도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도저히 알길 없는 이유로 자신에게 돌아갔다. 스스로 목적을 거두어들였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다는 슬픈 도시의 소박한 전설을 남기고.

사람은 사랑하게 생겨먹었고 사랑하기 마련이다. 당신에게 선명한 삶의 목적, 희망의 증거가 있다고 해서 그들 앞에서 시비하지 말라. 그들이 당신에게 새로운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를 조금이라도 불어넣어 주었다면 제발 그냥 내버려 두라(Let it be).

덧붙이는 글 | 한겨레신문의 개인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열린책들(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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