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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옆에 있는 휘릉을 들어 선 때는 저녁 노을이 비치며 그림자가 길게 깔리는 늦은 오후였다. 장렬왕후가 묻힌 휘릉(徽陵)에 가면서 이 곳에서 볼 것은 조선왕릉 중 3개의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5칸짜리 정자각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저녁 황혼이 내려앉은 휘릉 정자각.
ⓒ 한성희
1차 2차에 걸친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장렬왕후(1624~1688)는 인조의 계비다. 인열왕후가 용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1638년 15세에 44세였던 인조와 가례를 올린다. 자의대비는 자녀가 없었고 정치적으로 별 영향력도 없이 조용히 지냈던 왕비였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할 때 장렬왕후는 26세에 불과했고 효종보다 5살이나 적었다. 효종은 1651년 계모 장렬왕후에게 자의라는 존호를 올려 장렬왕후는 왕보다 젊은 나이로 대비가 된다.

자의대비가 예송논쟁에 휘말린 것은, 젊은 나이로 대비가 되어 왕실의 어른이 됐고 효종보다 오래 살아 효종의 국상이 나자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을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국상을 당하자 복상문제로 윤선도 등 남인과 송시열의 서인이 다툼을 벌인 것은 실상 들여다보면 당쟁에 불과하다.

송시열은 성리학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장자인 경우는 3년상을, 차자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논지를 내세워 효종이 차자이므로 1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둘째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는 주장도 같이 내세웠다. 즉, 장자 승통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남인은 차자(次子)일지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될 수 있다는 허목의 차장자설을 내세웠고 효종이 차자지만 왕통을 이었기에 3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1차 예송논쟁이다.

이런 경우 남인의 주장이 왕조국가에서는 맞지만, 성리학을 내세운 송시열의 주장을 내치기엔 갓 즉위했던 19세의 현종은 힘이 없었고, 선왕 효종대부터 송시열은 이미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서인의 이런 주장이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전기 왕권이 서슬 퍼렇던 시절이라면 감히 신권이 이런 망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9대 성종의 경우, 왕위계승자였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살아있었고,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이 시퍼렇게 살아있었음에도 차자로 왕위에 올랐다.

성종이 죽자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1년상을 입었다는 기록은 없다. 만약 그런 전례가 있었다면 예송논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송시열이 죽은 왕이 차자라는 시비를 감히 붙일 수도 없거니와 성리학까지 끌어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왕권이 막강할 때는 왕은 곧 용인지라 신권들이 차자니 장자니 시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

2차 예송논쟁은 남인의 승리로

하여간 1차 예송논쟁은 집권세력인 서인의 승리로 돌아가고, 현종15년(1674)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또 다시 자의대비 복상을 두고 2차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며느리의 복을 시어머니가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인선왕후를 차자부(次子婦)로 대접해 9개월 복상을 주장하고 남인은 왕비로 대우해 1년 복상을 주장한다.

이때 현종은 선왕을 감히 차자로 몰고 갔던 1차 예송논쟁이 불만이었고, 1차 예송논쟁에서 1년상을 주장했던 서인이 남인의 주장을 듣고 9개월로 고쳐서 올렸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현종은 이를 추궁했고 서인은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이에 현종은 국조오례의를 따른 것인 줄 알았는데 중국의 옛날 법을 썼느냐고 분노했고, 1차 예송논쟁의 1년 복상을 3년상으로 고치고 인선왕후 복상은 1년상으로 하라고 명한다.

"신하가 되어 감히 임금에게 야박하게 굴면서 누구에게 두텁게 구는가?"

'누구에게 두텁게 군다'는 현종의 이 말은 효종이 차자라면서 1년 복상을 주장했던 송시열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2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참패였다. 서인은 몰락하고 남인이 등용된다.

6월4일 장례를 마친 인선왕후를 둘러싼 예송논쟁의 열기가 식기도 전인 8월18일 현종은 갑자기 승하한다. 왕조실록은 과로로 인한 번열과 설사가 심해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현종대의 실록은 남인이 쓴 현종실록과 서인이 집권하면서 다시 쓴 현종개수실록이 나올 정도로 왕조실록도 어지러운 시대였다.

4대의 왕대를 살았던 자의대비

예송논쟁에 휘말렸던 자의대비가 묻힌 휘릉의 정자각 지붕 위로 석양이 쏟아졌다. 넘어가는 태양에 비친 휘릉의 5칸 정자각은 모화사상이 극치를 이뤘던 현종대와 숙종대의 그림자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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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내 내려온 전통적인 관습인 양 유교를 내세우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유교의 철갑으로 꽁꽁 무장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였고, 약해진 왕권과 강해진 신권의 정치가 유교를 내세우게 되는 원인이었다.

왕권이 강했던 조선 전기는 왕이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정치를 했지만, 사림들이 주도권을 잡은 후기는 신권들이 유학를 정치무기로 삼았다는 예가 바로 예송논쟁이다.

송시열이 조선의 왕보다 더 숭상했던 것은 주자였고, 송시열이 영수였던 노론의 세력이 조선후기를 장악하고 성리학을 무기로 집권했다. 송시열을 봉향 하는 서원이 50여 개나 됐던 것을 봐도 단순히 위대한 학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서원은 정치세력의 발판이자 정치후보생 양성소였고 노론은 조선 후기 내내 230여년 동안 기득권을 놓치지 않았다.

성리학이란 조선 후기 사림에게 명분을 만들어줬던 학문이라고 할까? 학문에서 끝났으면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식의 소치인지도 모르겠지만.

복상 소동의 원인이 됐던 자의대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의대비는 인조부터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살아 숙종14년에 창경궁 별당에서 65세로 일생을 마친다. 실록이란 왕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왕비의 기록은 그리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몇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시끄러웠던 정치사건에 주인공이 되지만 정작 자의대비의 역할은 아무 것도 없었다. 꽃다운 나이에 궁에 들어와 왕비가 되지만 자녀도 없이 쓸쓸하게 구중궁궐을 벗어나지 못하고 늙어죽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왕실 여인의 모습이 아닐까.

자의대비는 왕실의 어른이었으나, 그녀의 삶은 신하들의 주장에 의해 상복을 1년 입으라면 1년 입고 9개월 입으라면 입어야 하는 조선여인의 숙명이었다는 생각이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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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출생, 현 파주저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