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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사람들은 덕수궁 중명전이 딱 100년전에 벌어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의 현장이라는 사실쯤은 제법 들어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현장은 과연 어디일까?
ⓒ 이순우
정동 미국대사관저가 갈라놓은 덕수궁 권역의 건너편에는 서양식 근대건축물인 중명전(重明殿)이 홀로 남아 있다. '중명'이란 본디 "일월이 함께 하늘에 있어 광명이 겹친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각각 제자리에 나란히 서서 직분을 다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건물의 역사를 알고 나면 여기가 참으로 제 이름값조차도 하지 못한 곳이라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된다. 명색이 중명전이라 해놓고 광명은커녕 암울한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으니까 하는 얘기이다.

그러니까 국권피탈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것이 벌써 100년 전의 일이 되고 말았지만, 그 사이에 건물의 외형이나마 용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 부끄러운 역사의 교훈을 오늘에 되새겨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느 사람들의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이곳만큼이나 주목할 만한 곳이 하나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을사조약의 현장이 그럭저럭 관심과 보존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작 '경술국치'의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곳은 오래 전부터 잊혀진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부근에는 길거리마다 보이는 그 흔하디흔한 기념표석 같은 것도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장소, 즉 경술국치의 현장은 과연 어디일까?

▲ <동아일보> 1920년 8월 29일자에는 한일합병 10주년 기념사진으로 조약체결장소였던 '총독관저' 안의 현장과 조약체결의 당사자였던 테라우치 총독과 이완용 총리대신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20년 8월 29일자에서 한 가지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지면의 한 귀퉁이에 한 장의 사진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다.

"오늘! 십주년전의 금월 금일이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던 날이올시다. 금년 팔월 이십구일이 일한합병의 십주년기념일이올시다. 사진은 일한합병조약에 양국편에서 도장을 찍던 곳이니 지금 총독관저 안에 있는 처소이오. 그 방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일본대표자되는 한국통감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한 테라우치 마사타케요, 왼편의 인물은 한국편으로 조약에 도장을 찍은 당시 한국총리대신 이완용."

동아일보가 '한일합병' 10주년이 되는 날이라 하여 예전의 조약체결과 관련한 사진자료를 특별히 준비한 듯한데, 설명에서 보듯이 조약체결의 현장은 남산의 '총독관저' 즉 그 당시의 '통감관저'였다. 그리고 그 날짜는 1910년 8월 22일이었다.

이완용의 일대기를 정리한 <일당기사(一堂紀事)>(1927)에는 이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8월 22일, 음7월 18일] 황제폐하의 소명을 받들기 위해 흥복헌(興福軒)에서 예알하고, 칙어를 받드사 전권위임장을 받아 곧장 통감부로 가서 테라우치 통감과 회견하여 일한합병조약에 상호조인하고, 동 위임장을 궁내부에 환납하다."

▲ <경성부사> 제2권 (1936)에 수록된 "1895년경의 왜성대 일본공사관 일대의 모습"이다. 이 사진은 불란서교회(즉 명동성당) 구내에서 남산 쪽을 바라보며 촬영한 것으로 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이 일본공사관이다. 이 건물은 그후 '통감관저'(1906년 이후), '총독관저'(1910년 이후), '시정기념관'(1940년 이후)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통감부라고 적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통감관저'가 맞다. 여기에서 말하는 통감관저는 원래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1885년)에 따라 조선정부가 대체부지로 제공한 땅에다 일본공사관의 용도로 지어올린 건물이었다. 흔히 '왜성대(倭城臺)'라는 지명으로 불렀던 곳으로 지금의 예장동 일대에 포함된 지역이었다.

이 건물의 신축은 1893년 또는 1894년에 동경에서 온 동량대목(棟梁大木) 나카무라 신고(中村辰吾)에 의해 이뤄졌고, 그 규모는 2층짜리 목조건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후에 부분적인 수리와 증축은 거듭되었지만,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도 기본골격만큼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일본공사관이었던 이곳이 '통감관저'로 전환된 것은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에 따라 일본공사관이 폐지되고 한국통감부가 설치되던 1906년 2월의 일이었다. 이때에 통감부 청사는 통감관저와 이웃하는 남산줄기의 언덕 위에다 따로 지어졌으니, 이 일대는 졸지에 그네들의 소굴처럼 바뀌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통감관저의 연혁을 훑어보니, 이곳에 그네들의 황태자가 머물렀던 흔적도 눈에 띈다. 그러니까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嘉仁, 나중의 '대정천황')가 한국을 방문한 것이 1907년 10월 16일이었고, 그 당시 4일간을 머물며 숙소로 이용했던 곳이 바로 왜성대의 통감관저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한국방문에 때를 맞춰 남대문과 연결된 성벽을 헐어내기 시작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 <경성부사> 제2권 (1936)에 수록된 것으로 1906년 11월 3일의 천장절(天長節)을 맞이하여 왜성대 통감관저로 초대된 소학교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오른쪽 언덕 위에 올라서서 훈시를 하는 이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다. 뒤로 보이는 것은 원래 '일본공사관'이었다가 '통감관저'로 바뀐 건물이며, 나중에는 다시 '총독관저'로 용도가 전환된다.
이러한 통감관저는 1910년의 한일합병 이후 '총독관저'로 다시 전환되었고, 한참 후인 1939년 9월 22일에 경무대(景武臺) 총독관저의 신축과 더불어 그곳으로 옮겨질 때까지 그 기능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한 만큼 이곳은 가히 식민통치자들의 본거지요 심장부라고 할 만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용산지역에도 또 하나의 총독관저가 운용되긴 하였지만, 이곳에서는 주로 외빈접대 또는 공식행사의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식민통치에 관한 정책결정은 거의 전적으로 남산의 총독관저에서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런데 그 후의 남산총독관저는 또 어떻게 변했을까?

경복궁 뒤편에 새로운 총독관저가 만들어진 이후 이곳 남산 왜성대의 총독관저는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름하여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1940년은 그네들의 황기(皇紀) 2600년이 되는 동시에 시정 3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사업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이곳을 진작 '병합기념관(倂合記念館)'으로 전환하려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 사실도 포착된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식민지 조선을 집어삼킨 역사적인 현장을 잘 보존하여 두고두고 자랑거리로 삼겠다는 것이 그네들의 속내가 아니었던가 싶다.

<매일신보> 1935년 7월 11일자에 수록된 "왜성대 총독관저를 병합기념관으로 영구히 보존하려는 당국계획"이라는 기사에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왜성대에 있는 총독관저는 연유가 있는 건물이나 일한합병 이전의 공사관 청사를 그대로 개조한 것이어서 장마가 지는 때면 이곳저곳에 비가 새어 일부에는 수리가 곤란하도록 부식하였고 또 외관상으로도 빈약하나 관저신축은 재정긴축을 부르짖는 이때이므로 할 수 없다는 의론으로, 현재는 거리적으로 불편한 것과 경비관계로 공식연회 이외에는 사용치 않고 내버려두고 있는 용산관저(龍山官邸)의 일부를 개조하자 하여 명년도에 6, 7만 원으로써 일부 개조를 하고 별동으로 일본식으로 증축하여 신관저로 사용하기로 되어 예산을 요구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리고 현재의 왜성대 관저는 일한합병기념관으로서 보존할 의향이다."

▲ <조선> 1942년 11월호에 소개된 '시정기념관' 내부의 모습이다. 사진에 보이는 방은 바로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곳으로 그들 역시 이곳을 역사적 장소로 기념하기 위해 그 당시에 쓰던 탁자와 의자를 그대로 보존하여 진열해놓고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을 걸어둔 것이 눈에 띈다.
그러니까 '시정기념관'의 설치는 애당초 '병합기념관'을 세우려던 계획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정기념관은 1940년 11월 15일에 임시개관을 하여 일반 및 유지들에게 우선 공개하였고, 곧이어 11월 22일에는 미나미 총독이 직접 참석하여 정식으로 개관식을 거행한 바 있었다.

여기에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소네 통감, 테라우치 총독, 하세가와 총독, 사이토 총독 등의 초상, 유품, 애장품, 서화 따위를 두루 갖춰 전시해두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이른바 '일한합병조약'을 기념하는 공간도 꾸며두고 있었다.

사세 나오에(佐瀨直衛)가 <조선> 1941년 1월호에 기고한 "조선총독부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의 개설에 대하여"라는 글에는 시정기념관 안에 마련한 합병조인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다시 계상(階上)으로 올라와서 그 동남우(東南偶)의 일실(一室)은 명치 43년(즉 1910년) 8월의 역사상 특필할 만한 일한병합조약이 조인된 방인데, 이 방에는 당시 사용됐던 탁자, 의자, 벼루통 등 예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외에 이토공(伊藤公)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동공(同公)이 통감의 요직에서 물러나 귀동(歸東)할 제에 연대(椽大)의 붓을 휘둘러 '남산각하녹천정(南山脚下綠泉亭)'의 칠언절구를 지어 휘호(揮毫)한 대편액(大扁額) 및 이것의 유래를 적어놓은 노암(魯庵)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백작의 대편액이 걸려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방은 황공하옵게도 대정천황(大正天皇)께서 황태자(皇太子)로 계실 당시 행차하여 돌아보시던 유서 깊은 방이다."

▲ <경기지방의 명승사적>에 수록된 1936년 12월 2일의 '하야시 동상 제막식' 광경이다.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8년 가까이 주한일본공사를 지냈는데, 1936년에 그의 희수(喜壽)를 맞아 동상건립이 추진되자 당시 우가키 조선총독의 배려(?)로 옛 공사관이었던 총독관저 구내에 이 동상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일제가 패망했으므로 시정기념관이 존재했던 기간은 전부 합쳐도 다섯 해를 넘기지 못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 나서 이 자리에는 '국립민족박물관(國立民族博物館)'이라는 시설이 들어섰다.

이에 관해서는 초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가 남긴 회고록 <경복궁야화> (탐구당, 1991)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李)대통령이 국립 박물관은 다시 경복궁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은 앞에 언급한 바와 같다. 그래서 다른 관청은 환도 후 제자리를 찾아갔는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옛적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남산분관(南山分館)으로 갔다. 이에 대하여는 아래에 몇 줄 설명하여야겠다.

그 집은 본래 일본총독의 관저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새로 관저(경무대)를 짓고 옮겨가자 이곳에 소위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이라는 그들 총독정치의 기념물을 전시하는 일종의 박물관을 만들었다. 역대 총독의 초상화, 일본 황태자가 왔을 때 쓰던 마차(馬車), 한일합방조약을 할 때 쓴 가구를 놓은 조인실(調印室) 등등 우리 민족의 수치되는 물건들이 있었고 일본사람들도 괴물이라고 평하던 가토 간가쿠(加藤灌覺)이라는 자가 관장으로 있었다.

정부는 이런 것을 없애고 민족박물관을 만들어 송석하(宋錫夏)씨가 그 관장(館長)이 되었다. 그는 그 때로는 몇 안 되는 민속학(民俗學)에 관심이 있던 사람으로 탈(가면) 같은 것을 수집하였는데, 그것을 진열하였고 일본 사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씨가 수집하여 두고 간 민속자료 같은 것도 진열하여 민족박물관(民族博物館)이라고 불렀다. 그는 병약한 몸으로 더욱이 고혈압으로 시달렸는데 50세 전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민족박물관'이 정식으로 개관한 것은 1946년 4월 25일이었다. 그러나 이 박물관의 설립을 주도했던 민속학자 송석하가 1948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자 정상적인 관리운영이 어려워졌고, 끝내 이 민족박물관은 한국전쟁의 와중인 1950년 12월에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이라는 이름으로 편입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1953년의 정부환도 이후에 오갈 데가 없어진 국립박물관이 여기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으나 이듬해인 1954년 6월에 연합참모본부(聯合參謀本部)가 신설되어 자기들의 청사로 사용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국립박물관은 그해 11월에 덕수궁 석조전을 수리하여 다시 옮겨가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그 이후 연합참모본부가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렀으며, 또 이 건물이 언제 헐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던 왜성대 총독관저는 정확히 언제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더구나 이 일대가 중앙정보부가 관할하는 구역으로 편입됨에 따라 세상 사람들의 접근이 거의 차단되었고, 이 바람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총독관저라는 존재는 서서히 지워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라진 남산총독관저, 나아가 통감관저가 있었던 정확한 위치는 과연 어디일까?

몇몇 자료에는 지금의 서울종합방재센터(즉 예전의 안기부 남산청사)가 자리한 곳이라고 하는 설명도 없지 않으나,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1927년에 발행된 <경성시가도>를 통해 몇 가지 단서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길 보면 다른 지도에 비해 총독관저의 위치는 물론이고 건물의 배치와 모양 같은 것이 매우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1927년에 발행된 <경성시가도>에 보면 남산 왜성대 총독관저의 위치와 건물형태를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가운데의 노란색 동그라미 표시가 총독관저이며, 왼쪽의 타원형 동그라미는 남산 총독부 청사가 있던 자리이다. 붉은 사각형은 '서울종합방재센터'(옛 남산 안기부 청사) 자리를 표시한 것인데, 이와 같이 두 곳은 별개의 장소이다.
따라서 여기에 표기된 위치대로 가늠해 본다면, 총독관저는 예전의 안기부 청사 본관건물이 있는 쪽과는 약간 떨어진 별개의 장소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퇴계로의 중부세무서 옆에서 남산 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죽 올라가다가 마주치는 '서울특별시 소방방재본부' 쪽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이 부근을 탐방해보니까, 소방방재본부에서 서울종합방재센터 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숲 속에는 '다목적광장'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제법 너른 공터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알고 보니 여기가 바로 예전의 총독관저가 있었던 자리였던 것이다. 물론 이곳을 총독관저가 있었던 자리라고 단정하는 데는 몇 가지 분명한 근거가 있다.

만선출판협회에서 발간한 <선철연선명소사적미술대관>(1919)에는 남산총독관저의 전경을 촬영한 사진 자료 하나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길 보면 진입로의 형태가 지금 남아있는 모습과 하등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사진 속에 보이는 '고목나무'의 존재 역시 위치확인을 위한 중요한 단서의 하나이다.

▲ <선철연선명소사적미술대관>에 수록된 남산총독관저의 모습이다. 통감관저 시절에 비해 두 건물 사이가 증축되어 연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고목은 은행나무로, 총독관저의 위치를 확인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나무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서울시 보호수 (고유번호 : 서2-7, 중구 예장동 2-1)로 지정되어 있다.
그럼 이 나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숱한 자료들에는 총독관저 앞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이 널리 수록된 바도 있었거니와, 가령 1926년에 나온 <경성의 광화>라는 책에는 이 나무에 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설명이 등장한다.

"...... 또 녹천정(綠泉亭) 부근에는 전설의 명목(名木)인 '대공손수(大公孫樹,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 500년이 넘고, 나무 둘레가 네 발(양팔 길이)로도 모자라며, 높이는 관저의 옥상에 닿아 있고, 가지는 남산 기슭을 덮고 있는데, 이 정정한 고목은 문록의 역(즉 임진왜란)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말을 매어두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다목적광장'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앞쪽에는 이 은행나무가 아직까지 그대로 잘 남아 있다. 나무 앞에 세워둔 안내문안에는 이 나무가 현재 서울시 보호수 (고유번호 : 서2-7, 중구 예장동 2-1)로 지정되어 있다는 표시가 보인다.

▲ 서울종합방재센터(옛 안기부 청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다목적광장"이 바로 경술국치의 현장인 '통감관저'가 있던 자리이다. 도로의 진입로는 예전과 거의 동일한 구조로 남아 있으며,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 역시 여전하다. 현재는 몇 개의 공원벤치와 농구골대만 설치되어 있었을 뿐 아무런 흔적이나 표시조차 남아있지 않다.
ⓒ 이순우
그러니까 이 나무의 위치로 가늠해보더라도 이곳이 예전의 총독관저가 있었던 자리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 부근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에 식민통치자들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당최 보이질 않는다. 그저 몇 개의 공원벤치와 더불어 농구골대가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을 기억하고 들춰내는 일이 그리 달가울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곳이 '경술국치'의 현장이었으며 이 땅을 지배했던 역대 통감과 총독의 소굴이었다는 사실을 담은 표지석 하나 정도는 마땅히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자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반드시 승자의 몫만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남산의 총독관저, 시정기념관이 되다

<매일신보> 1940년 11월 22일자에는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 오늘 개관식(開館式), 방마다 보이는 것마다 회고와 감격의 유물, 새조선의 역사적 산실도 이곳!"이라는 제목의 탐방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시정기념관의 전시실 구조와 진열물품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물론이고 총독관저 일대의 풍경에 대한 묘사도 들어 있어 참고할 만하다. 아래는 해당 기사의 전문이다.

,남산 밑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시정기념관의 개관식은 드디어 오늘 22일에 거행된다. 이 기념관은 이미 지난 15일부터 문을 열었거니와 그 동안 동경 갔던 미나미(南)총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오늘로 개관식을 정한 것이다.

명치 18년(즉 1885년) 이곳에 새로이 터를 닦고 일본공사관(日本公使館)으로서 등장한 이래 작년 9월 미나미 총독이 경무대(景武臺) 신관저로 이사하기까지 실로 50여년의 묵은 역사를 가지고 있던 이 집을 시정30주년의 빛나는 해와 함께 영원히 기념하고자 여기에 그 이름을 '시정기념관'으로 하고 역대통감, 총독의 보배로운 유물을 진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서 옛어른들의 큰 덕을 추모하고 다시 나아가 그들의 손에 키워온 젊은 조선의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한 개의 거물로서 삼자는 것이다. 기자는 어제 21일 개관식을 하루 앞두고 준비에 바쁜 이 '옛집'을 찾았다.

소나무 벚나무 풀잎 하나에까지도 남산 모퉁이 왜성대 숲 그늘에 초겨울 햇볕은 걸음이 바쁘다.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노을 속에 싸여 정물(靜物)로 놓여 있는 이 '늙은 집' 앞에 왼편으로 은행나무, 바른편에 느티나무 두 그루의 고목이 하늘을 향하여 뻗어 올랐다. 모두 30여 척의 아름드리 고목들이다. 수령(樹齡)은 4백여 년씩 되는 것 같으나 그 정정한 가지와 푸른 기운이 전설처럼 정다웁다.

이 집의 옛주인들은 이 두 그루 나무를 무던히는 사랑했음인지 정자 아래 단을 쌓고 단 곁에 약수를 팠다. 시원한 여름밤이 그늘에 나앉아서 만호장안의 불빛을 눈 아래 살피며 한 모금 약수로 시(時) 한귀 읊었음직도 하다.

먼저 왼편으로 1호실 ──. 이 방에는 테라우치(寺內) 총독이 날마다 쓰던 벼루와 소네(曾 ) 통감의 필적, 하세가와(長谷川) 총독이 입던 명치시대의 군복과 예장, 육군대장 통상복 등이 진열되어 있다. 그런데 유난히도 이 방안에서 기자의 눈을 끄는 것은 한켠 구석에 놓여 있는 풍금(風琴)이다. 이것은 이토공(伊藤公)이 지금으로부터 35년전 불란서로부터 가지고 온 것인데 풍금이라기보다 축음기라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태엽을 감아 놓으니 직경 두 자 가량의 둥그런 철판이 돌아간다. 그 철판에 뚫어진 수백 개의 구멍이 세 개의 바늘과 같은 것에 스치자 뜻하지 않은 '라파뿐마'의 음률이 흘러나와 텅비인 옛집에 일층 신비스러운 느낌을 준다.

다시 그 옆으로는 제2호실! 여기는 사이토(齋藤) 대장의 '세비로' 양복과 해군대장의 정복이며 대정 8년(즉 1919년) 폭탄에 맞은 가죽털띠며 모자, 통상복, 구두 또 대정 15년(즉 1926년)에 강진군 대구면(康津郡 大口面)에 가서 친히 모아온 23점의 고려자기(高麗磁器) 또 우산, 다장 등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옆에는 농부가 되어 모를 심는 사이토 총독의 사진이 걸려있다. 3호실에도 역시 사이토 자작이 친필로 시구(詩句)를 쓴 도기(陶器) 19점이며 손수 쓰던 책상이 옛주인을 기다리는 듯 고요히 놓여 있다. 기자는 책상을 들여다보다가 뜨끔하고 가슴을 찌르는 무엇에 두손을 모으고 몸을 가누었다. 서랍 속에 꽉 채워진 노끈꾸러미를 본 것이다. 이런 것에는 아무런 부자유도 없었으련만 거리의 저자에서 무슨 물건이든 사서오면 그것을 묶어온 노끈을 뜯어○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일일이 모아두었고 그것을 채 다 써보지도 못하고 이 집을 떠난 것이다.

지금 기자의 눈앞에는 흰머리에 흰수염 난 할아버지가 '어떠한 적고 하찮은 것이라도 아껴두면 쓰느니라' 하며 의자에 앉아서 노끈을 추려서 서랍 속에 간수해두는 풍경이 떠오른다. 책상 위에는 필통, 붓, 송곳, 집게, ○요표, 신문 오려놓은 것──. 어느 것 하나라도 사치한 것은 없고 모두 질소한 것들뿐이요 그것이 하루같이 그 어른의 손때에서 정들어온 것들이다.

이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있다. 모두 당시 나라와 백성과 정치를 말하던 어른들의 글씨요 그림이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안에 엷은 햇볕이 숨어들어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伊藤公)으로부터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8대 통감 총독들의 흉상(胸像)이 놓여 있고 중앙의 '테블─' 그 위에는 벼루집과 '잉크 스탠드'가 있고 좌우로 네 개의 의자와 한 개의 '소파─'가 놓여 있다.

"자 이것으로서 완전히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임군을 섬기며 아나갈 길을 연 것이요" 하며 "허허허......" 하고 소리를 높여 웃는 옛어른들의 환영이 눈앞에 움직이는 것 같다. 그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 풍기는 입김─. 오, 그 소리 그 향기는 이 집안에서만 호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가슴에 새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어주던 것이 아니었던가?

기자는 기념관을 나와서 뒤뜰을 돌아 이끼 푸른 녹천정(綠泉亭)을 지나 원수정(元帥亭)으로 마른 잡초를 헤친다. 황혼은 단풍으로 타는 듯한 산기슭을 더욱 불질러 놓았고 이따금씩 고개를 넘어오는 찬바람에 생각난 듯이 우수수 발뿌리를 덮는 것은 낙엽의 빗발! 눈 아래는 지금 약진에 용솟음치는 백만 대경성이 황혼에 쌓여가고 있다. 봄 가을 철을 따라 화장을 달리하는 이 산길을 옛어른은 거닐면서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대답은 스스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낄 때 기자의 걸음은 잠시 멈추어진다.

덧붙이는 글 | 남산 왜성대에 있던 '총독관저'(예전의 '통감관저')에 관한 기타 자료는 다음카페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http://cafe.daum.net/distorted)'에 따로 정리해 두었으므로 이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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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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