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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와서 가장 열심히 한 것? 싸이질

이제 오스트리아에 온 지 1년 3개월이 됐다. 길고도 짧은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나름대로 제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지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대략 6개월간 공부한 독일어로 대학교 첫학기를 패스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서 유럽 생활에 적응도 했다. 그 유명한 알프스에서 스키도 타 봤다. 그러나 이 먼 오스트리아에 와서 가장 열심히 한 것?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바로 6개월간의 '싸이질'이다.

▲ 싸이월드 홈페이지
ⓒ cyworld
이곳에 오기 전부터 '블로그'네 '싸이월드'네 하는 이야기들은 많이 들었지만, “공부하는 유학생이 시간이 어디 있나”라는 변명 아래 홈페이지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예전에 포털 사이트 '다음'에 까페를 개설한 뒤 몇 달 되지 않아 문을 닫아 버렸던 과거사도 있거니와 늘 나를 따라다니는 게으른 근성이 홈페이지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던 중 가장 친한 친구 한명이 “친구, 너의 그곳 생활이 궁금해”라며 “싸이월드에 사진을 올려 놓으면 쉽게 접속해 너의 근황을 알 수 있다”며 싸이월드에 가입하기를 부추겼다.

친구의 계속되는 간곡한 부탁에 일단 작년 8월 초 싸이월드에 가입만 해 놓고 9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싸이질을 시작했다. 맨 처음엔 소위 ‘도토리’가 무엇인지, ‘도토리’는 어디서 사는지조차 몰랐던 내가 큰 맘 먹고 계좌 이체를 통해 ‘도토리’ 100개를 구입하면서부터 싸이질 중독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유럽 친구들과 술 한잔 할 때마다 디지털 카메라를 지참, 전면·측면·후면 등의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그 다음에는 전송 속도까지 유념해 포토샵으로 사진 크기를 '400'으로 항상 줄여서 싸이월드의 미니 홈피에 사진을 등록 시켰다. 그 사진에 댓글이 달리거나 방명록이 늘어갈수록 나의 싸이질은 깊어만 갔다.

싸이질을 끊는 사람들, 남은 건 '엄마 친구' 일촌들

내 이름이 특이한 덕일까? 몇 년간 소식조차 없던 대학 선배들과 중고교 동창들이 싸이월드에서 나를 검색해 미니 홈피를 찾아오는 일까지 생기자 반가움과 즐거움은 더해갔다. ‘도토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선물까지 교환하는 것은 물론이요, 이메일 대신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친구들도 많아졌다.

▲ 그 수많은 일촌들은 어디로 갔을까?
ⓒ 싸이월드
그러나 웬걸? 나의 싸이질을 부추겼던 친구 녀석이 도통 내 싸이를 방문하지 않는 거다. 궁금한 끝에 연락해 보니 회사에서 싸이월드를 막아 놓았다는 거다. 그 친구는 집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회사에서 점심 시간이나 퇴근 후 짬을 내 인터넷을 했다. 때문에 회사에서 싸이월드 접속 자체를 막자 그 많은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의 싸이월드에 방문하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때를 같이해 오랜만에 소식을 전했던 대학 선배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싸이월드를 탈퇴해 버렸고, 디자이너 동생은 전시회가 바쁘다며 몇 달간 싸이의 미니홈피를 닫는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 한명은 스토커처럼 찾아오는 대학 후배가 귀찮다며 탈퇴해 버렸고, 또 다른 후배 한명은 싸이질에 중독되면 헤어 나오기가 어렵다며 방명록만 열어놓았다.

이쯤 되니 내가 항상 방문하는 미니 홈피는 아이 낳고 집에 있는 전업주부 친구들의 홈페이지가 되어 버렸다. 전업주부거나 당분간 출산 휴가를 쓰고 있는 친구들은 아무래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성실하게 싸이질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방명록의 답변도 바로 바로 돌아왔다. 또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기·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육아일기처럼 사진을 찍어 올리니 업데이트도 언제나 꾸준하다.

그러나 아이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과 육아일기처럼 변해 버린 '엄마 친구'들의 싸이월드에선 아무래도 공통점을 찾아내기가 힘들다. 반면,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싸이질할 시간이 도통 없다고 한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나의 싸이질도 슬슬 활력을 잃어가게 됐다. '2 to Tango', 즉 탱고를 추려면 2명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싸이질은 혼자 하나?

싸이질이 아니라 스크랩질... 이곳에 커뮤니케이션이 있다고?

▲ 방명록에 글을 남기지 않고는 못 배기게 했던, 문근영이 등장하는 플래시. 무수한 싸이 폐인들에 의해 스크랩됐다.
싸이질이 시들시들해졌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대부분의 싸이 미니 홈피가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어졌다고 한다. 애들 커가는 사진 혹은 셀카로 예쁘게 꾸며 찍은 의미 없는 사진들만 무성하고 실제로 유익한 정보나 알찬 이야기들은 부족하다는 거다.

또한 게을러서 업데이트를 자주 못하는 친구들은 매번 사진 올리기가 귀찮다며 다른 사람들의 싸이에서 언제나 ‘스크랩’만 해 온다. 스크랩이 스크랩을 만들고 돌아다니니 내가 올려 놓은 게시물이 여기저기서 판을 친다. 개성이 가득해야 할 홈페이지는 사실 단조로움으로 가득해지고 있다.

싸이질을 아예 시작할 엄두도 내지 않는 친구들은 사생활이 드러나는 게 싫다고 하고 심지어 "그딴 짓 왜하냐?"며 할일 없는 애들만 하는 게 싸이질이라고 우긴다. 많은 '걸'들과 동시다발 작업을 하는 게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자기는 싸이질을 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아직까지 열심히 싸이질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참(!) 부지런하다"고 말하는 것은 칭찬이라기 보다는 그 열렬함에 대한 경외심일 뿐이다.

싸이 폐인들, 이제 어디로 갈까

▲ 오랜만에 찾아간 홈피에 이 그림이 뜨면 정말 당황스럽다.
ⓒ 싸이월드
'싸이 폐인'을 만들며 싸이월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디카와 폰카, 그로 인한 셀카(셀프 카메라) 등 첨단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 또 집단적이지 않고 개인과 개인이라는 일대일 관계(일촌)로 유지되고 타인에게 보여지는 것(사진첩)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는 개인화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불변의 공식이 적용되는데 그 수많은 일촌들과 미니 홈피를 관리하는 데도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홈피를 꾸미는 데 필요한 도토리를 구입하려면 돈까지 든다. 아무리 사진 올리는 게 간단해지고 메신저와 연동해 손쉽게 남의 홈피에 들를 수 있는 것과 끊임없이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댓글을 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의미를 지니던 '일촌'도 20, 30명을 넘어가면 그야말로 랜덤홈피(무작위로 이동하는 홈피)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나 다녀갔소'라고 발도장 찍는 것도 한두 번이고, 밤새 홈피 업데이트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내 주변만 보더라도 폐인 생활이 고달프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 같다. 급기야는 집을 버리고 가출을 단행하는 사람도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는가.

한동안 넘쳐나던 싸이 폐인들도 이제는 슬슬 재활에 성공해 정상을 회복하는 듯하다. 이제 사람들은 그 집에서도 나와 인터넷 세계를 배회하기 시작할 것이다. 앞으로 그들은 어떤 신세계를 발견하고 빠져들게 될까? 그곳에서는 좀 더 '간편하게' 인간과 인간이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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