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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가 올라오지 않는 '신기한 계곡'

둘째날 신계사를 마지막으로 구룡연 코스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지만,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금강산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계곡으로 유명한 이곳에, 왜 전혀 불교 유적이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교의 성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금강산이 불교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은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과연 불교의 성지라 할 만했는지 기록을 통해 살펴 봅니다.

▲ 구룡연코스 초입. 이 코스에는 주차장 아래쪽에 있는 신계사를 제외하고는 불교 유적이 없습니다.
ⓒ 백유선
불교의 성지가 된 금강산

금강산에 세워진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전해지는 절은 유점사입니다. 물론 현재 개방된 관광코스가 아니어서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유점사는 1세기 신라 남해왕 때 인도에서 띄워 보낸 53불상을 넣은 종이 도착하여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유점사본말사지>).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해지기 전의 일이니 만큼 대체로 전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 내용과 가야에 불교가 전해졌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파되기 이전에 이미 남방불교가 전해져 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구체적 증거가 없으니 추정일 뿐입니다.

우리 나라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들어온 것은 4세기 후반입니다. 삼국시대에 불교는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진 만큼, 국가의 장려 속에 많은 절들이 세워집니다. 신비스런 산으로 이름난 금강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삼국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만큼 많은 절이 세워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각 절의 '사적기' 등의 기록에는 고구려 장수왕 때부터 금강산에 절이 세워지기 시작하여 삼국 말기부터 신계사, 장안사, 건봉사, 표훈사 등이 차례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적기의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나 자료들이 거의 없으니 앞서 신계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부정하기도 어려우니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금강산에 본격적으로 절들이 많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후기신라(통일신라) 때부터의 일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8세기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이 우리 나라의 금강산으로 해석되면서부터 금강산은 불교의 성지로 생각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금강산의 절들은 더욱 국가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이름을 전하는 신계사,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등의 절이, 후기 신라 말에 비로소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계사 3층 석탑을 비롯해 이 시기의 유물과 유적들이 남아 있으니 확인이 됩니다.

일부에서는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했을 때 그것을 반대한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도, 신라 왕실과 왕실의 보호를 받은 금강산 사찰의 승려들이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비약이며 기록 그대로 은둔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구룡폭포와 ‘미륵불’ 글씨. 구룡연코스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불교의 흔적입니다. 하지만 이는 1920년에 새겨진 것입니다.
ⓒ 백유선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자신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의 은덕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불교를 매우 장려했습니다. 이후 고려시대는 불교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곳 금강산의 절들도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전기에 장안사에 지급된 토지만도 무려 1050결이나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른 절에도 수많은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었습니다.

특히 <고려사>에는 고려 후기 원나라 사신들까지 금강산에 들러 해마다 큰 불교 행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산은 이미 동아시아의 불교 성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음이 확인이 됩니다.

심지어 충목왕 때에는 금강산의 유점사에서 행하는 불교행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영복도감'이란 관청을 따로 둘 정도였지요.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금강산에 어느 때보다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겨울 금강산. 금강산의 구룡연 코스에는 온통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산에는 흔한 마애불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 백유선
억불정책 중에도 비호를 받은 금강산 절

조선시대는 불교의 암흑기라 할 정도로 탄압을 받던 시기입니다. 많은 절들이 사라지고, 승려들은 천민의 대접을 받았으며 도성출입조차 금지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의 절만은 예외적으로 정부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관련한 기사들이 많이 보입니다.

조선 초 사원정리 정책을 통해 수많은 사찰을 없애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던 시기에도 표훈사, 유점사 등 금강산의 절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토지를 지급하고 절을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유점사의 경우 이때 3000간이 넘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실제 그 정도였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어쨌든 대단한 규모였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조선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금강산에 와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들러보며 매년 쌀 100섬과 소금 50섬을 금강산 사찰에 지급하도록 지시합니다.

이를 '세헌'이라고 하는데 뒤에는 200여섬으로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토지와 노비, 삼림 등을 금강산 사찰에 주기도 했습니다.

숙종 때에는 금강산 유점사에 하나의 전각을 설치하여 선조, 인조, 현종의 영정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로 보아 조선 왕실의 원당으로서의 역할은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정조 때에는 세조의 영정을 모신 표훈사를 수리해야 한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어향각을 신계사에 짓고, 또 절의 보수, 개축 등에 자금, 노동력을 대주는 등 금강산의 절들은 여전히 조선 왕실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공명첩을 지급하여 각 절이 이를 팔아 경비에 쓰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공명첩은 이름을 비워 놓은 관리 임명장입니다. 누구든 돈을 내면 공명첩을 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실제 관직은 아니지만 관리의 임명장을 받은 셈이니 이후 양반으로도 행세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결국 불교가 탄압 받던 시절에도 금강산의 절들은 왕실의 보호를 받았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왕실의 원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중국 황제의 복을 빌기 위해 사신들이 금강산 사찰을 찾기도 했으니 그 또한 보호 받은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 <증보문헌비고>에는 금강산에 모두 108개의 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이 시기 금강산에만 모두 108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기록에 나오는 암자들의 이름을 종합해 보면 무려 180여개나 된다고 합니다. 아마 단일 산으로서 이렇게 많은 사찰이 있었던 산은 금강산이 유일할 것입니다.

부처는 산이 생긴 지 훨씬 뒤에 태어났다

왕실의 보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삼고 불교 탄압 정책을 추진하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라는 것을 애써 부인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금강산을 구경하려 하는 명의 사신들에게 어째서 금강산을 보려고 하는지를 묻자 "금강산은 모양이 불상과 같기 때문에 보고자 하는 것이오"라고 답합니다. 이에 "산은 천지가 개벽할 당초에 이루어졌고, 부처는 산이 생긴 지 훨씬 뒤에 태어났다"(<태종실록>)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산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부처가 태어났는데 금강산이 불상과 같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내용입니다. 조선 초 억불 정책이 추진되면서 금강산과 불교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려는 사대부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중국의 사신들의 금강산 구경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태종은, "중국인에게는 '고려국에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원이라'하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하고 묻습니다. 이에 하윤은 "금강산이 동국(우리 나라)에 있다는 말이 <대장경>에 실려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 하윤은, "본래 불교 경전의 금강산은 동해의 1만2천 보살이 살고 있는 산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풍악산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며 잘못된 설"(<증보문헌비고>)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즉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이 우리 나라의 금강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불교를 비판하던 사대부들은 금강산이 불교와 관련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임금 앞에서는 기록대로 인정을 했지만, 본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금강산을 노래한 작품 속에는 유난히 풍악산, 개골산 등 금강산의 별칭이 많이 보입니다.

이곳이야말로 진짜 부처의 경지

결국 금강산은 우리 역사에서 심지어 불교가 탄압받던 시기에도, 불교의 성지로서 불교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불교식 이름인 금강산이 금강산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들의 이름이 비로봉, 석가봉, 세존봉, 관음봉 등 불교식 이름으로 지어진 것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신계사와 관음봉. 신계사의 뒤쪽 봉우리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한 이름인 관음봉입니다.
ⓒ 백유선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동이라는 사신은 금강산 보덕굴에 이르러 "이곳이야말로 진짜 부처의 경지이다. 원컨대 여기에서 죽어서 조선 사람이 되어 오래오래 부처의 세계를 보았으면 한다"는 말을 남기고 소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율곡 이이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길산의 스승으로 알려진 운부가 금강산에서 승려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고 알려진 것처럼, 유명한 승려들의 수행처로서도 금강산은 이름이 높습니다. 특히 사명당과 서산대사가 이곳을 중심을 활동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성지였던 금강산의 절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문입니다. 한때 100여개가 넘었던 금강산의 사찰들이 대부분 사라지게 된 것이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결국 현재의 금강산은 불교의 성지로서보다는,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초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기행기의 열네번째입니다. 이 내용은 글쓴이의 홈페이지('백유선의 고구려 유적답사기', http://noza.pe.kr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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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콘서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공저),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한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국사>(상,하)의 저자로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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