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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어로 ‘욜(Yol)’은 길 또는 인생의 항로를 뜻한다. 한국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욜(29)씨는 불모지에서 길을 찾는 사람이다. 유엔 자유권위원회가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은 모든 차별로부터 보호돼야 한다’고 천명한 지 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헌법에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시킨 지 8년이 됐음에도, 한국사회에서 이에 관한 논쟁은 아직까지도 무지와 편견 사이를 오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정씨가 살아온 길은 성적 소수자(sexual minority)에 대한 우리 사회의 빈약한 인식수준을 여실히 보여 준다.

정씨가 동성애자로서의 ‘성 정체성(sexual identity)’을 발견한 것은 대학에 입학한 뒤의 일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또래 친구들과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정씨는 그때마다 남들과 취향이 달라서 그러겠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고 한다.

1997년 어느 가을날, 다방면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던 그 무렵, 정씨는 대학 교정에 나붙은 동성애자들의 모임을 알리는 대자보를 발견했다.

그리고 얼마 후 대학가 부근의 반지하 자취방에 모여든 20여 명의 성적 소수자들 틈에 정씨도 끼어 있었다. 정씨는 이날 모임에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긴 시간을 고민했지만, 막상 찾아간 뒤에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막혔던 것이 툭 터지는 듯한 희열을 맛보았다고 한다.

“믿고 따르던 선배들도 제가 동성애자라는 얘기를 듣고는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더군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낯설게 대하는 풍경들…. 그건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이쯤에서 나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멈춰 버리면 또 다시 고립된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 벼랑에서 구원의 줄을 잡는 심정으로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한 거죠.”

정씨의 삶은 군대생활을 거치면서 간단치 않은 시련을 겪는다. 어느 날 동성애자로부터 날아온 연애편지가 공개되면서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자신은 동료들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남들은 “네가 젊은 군인들을 그냥 두겠느냐?”며 거리를 두었다. 결국 정씨는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 2개월 가까이 수용돼 의병제대 대상자에 오르기까지 했다.

“정신병자임을 인정하면 제대를 시켜 주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요. 저는 동성애자가 어떻게 정신병자일 수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벽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마음에 드는 간호장교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무슨 약인지도 모르고 받아먹어야 했고, 강제로 AIDS 검사를 받는가 하면 독방에서 혼자 잠을 자야 했어요.”

커밍아웃(coming out)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성적 소수자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타인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말한다. 정씨의 경우 자발적 커밍아웃이라기보다 폭력적 아우팅(outing,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적 소수자의 성 정체성이 공개되는 것)이었던 셈이다.

정씨는 2002년 가을부터 동성애자인권연대의 대표를 맡아 국가인권위에 두 건의 진정을 접수했다. 첫째는 동성애 사이트를 퇴폐·음란 사이트로 구분한 ‘청소년보호법시행령 청소년 유해 매체물의 심의기준(이하, 심의기준)’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P회사가 ‘심의기준’에 따라 만든 음란물 차단 프로그램은 전국의 PC방에 설치돼 동성애 사이트에 대한 접근을 차단했고, Y포털 사이트는 ‘동성애’라는 단어를 성인 전용 검색어로 지정해 청소년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는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내기 위해 다른 동성애자 인권단체들과 함께 정보통신윤리위원회를 방문해 항의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인터넷 사이트 파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편 국가인권위는 2003년 3월 정씨의 진정과 관련해, “동성애 자체를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기준으로 둔 것은 성적지향에 의한 차별”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청소년보호위원회에 청소년 유해 매체물 심의기준에서 ‘동성애’ 문구를 삭제할 것을 권고했고,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이 권고를 수용했다.

정씨는 국가인권위 결정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인권문제가 질적인 전환기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한다. 그동안 청소년 보호라는 목적 앞에서 동성애 인권은 꺼낼 수도 없는 주제였지만, 국가인권위의 노력으로 상황이 개선됐다는 것이다.

정씨의 둘째 진정은 헌혈문진표에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현재 헌혈문진표에는 ‘동성이나 불특정 이성과 성 접촉이 있었다’는 부분이 포함돼 있다. 국가인권위는 이 진정사건과 관련해, 2004년 8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적 지향을 이유로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라고 인정했다(보건복지부는 현재 국가인권위 권고내용을 검토하고 있다).

정씨는 “동성애와 AIDS가 무관하다는 것이 다양한 연구를 통해 입증되고 있음에도, 동성간 성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AIDS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는 것처럼 해석할 수 있는 질문을 문진표에 포함시키는 것은 동성애자에 대한 인격적 모욕”이라며 헌혈 당국의 조속한 문구 개정을 촉구했다.

그는 앞으로 학교 안에서 성 정체성에 관한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몇 사람의 동성애자가 특정한 기업에서 차별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2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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