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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60주년·원폭투하 60주년, 그리고 한일협정 체결 40주년을 맞아 지난 2004년에 이어 <대구경북 오마이뉴스>는 지난달 24일부터 2월 1일까지 8박 9일동안 일본 히로시마를 현지취재했습니다. <대구경북 오마이뉴스>는 이번 히로시마 현지취재 결과를 분야별로 상(한국인 원폭피해자)-중(우경화 맞는 일본 시민사회)-하(민족학교)로 3회에 걸쳐 보도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자리한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지난 72년 건립 당시 위령비는 공원 내 건립을 불허한 히로시마시의 방침으로 공원 밖에 건립됐다 29년만인 지난 99년 공원 내로 이전 건립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한국인(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의 삶은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피폭자로서의 '권리'를 찾는 과정은 온전히 그들만의 몫이었다.

일본 히로시마에는 평화의 도시가 '자랑하는' 평화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평화공원 정문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1~2분 정도 걷다 보면 색다른 위령비 하나가 눈에 띈다.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일본 내에선 거의 유일한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흔적인 이 위령비가 건립된 과정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삶'과도 너무나 흡사하다. 일본 정부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던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된 것은 지난 70년 4월 10일. 민단 소속의 재일 한국인 피폭자와 귀국한 원폭 피해자들이 중심돼 건립한 이 비는 일본인을 포함한 당시 전체 피폭자들의 10%가 한국인(조선인)이라는 비중에 비한다면 미미하다.

하지만 위령비가 애초 히로시마의 평화공원 내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위령비를 건립한 인사들은 평화공원 내 건립을 추진했지만 당시 히로시마시(市)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히로시마시는 "평화공원 내 기념비와 위령비가 많이 때문에 일체의 공작물을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불허했다.

29년만에 제자리 찾은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 애초 한국인 원폭위령비가 건립돼 있던 자리. 지난 99년 공원 안으로 위령비가 이전 건립된 후 지금은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이곳은 조선의 마지막 왕족 이우가 피폭 당한 후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하단 박스기사 참조) 사진 오른쪽 다리가 현재의 본천교.
ⓒ 오마이뉴스 이승욱
그러나 히로시마시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 7기의 새로운 비가 건립되면서 변명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폭피해의 일본은 인정하지만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계산이 녹아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위령비는 재일동포와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지원하는 몇몇 일본인들의 노력이 합쳐, 건립 29년만인 지난 99년 이전비를 민간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평화공원 내로 이전됐다. 조국이 있는 한반도를 바라본 채로 서 있는 위령비 앞에서 첫 위령제가 열린 것은 같은 해 8월 5일의 일이었다.

한일협정으로 가로막힌 보상과 지원

하지만 위령비의 사연은 한국인(조선인) 원폭피해자들의 '투쟁'을 엿보여주는 한 조각일 뿐이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걸어온 투쟁의 길은 그들의 피와 땀이 그대로 배어있다. 일본과 한국 정부로부터 모두 배척당한 그 기나긴 과정을 아는 이들은 한국인 사이에서도 드물다.

지난 57년 일본 정부는 원자폭탄피폭자의 의료 등에 관한 법률(원폭의료법)을 제정하고 일본 국내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건강진단과 치료조처를 취한다. 하지만 해방을 맞이하고 피폭된 몸으로 조국을 찾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일관계의 청산을 모토로 65년 체결된 한일협정 이후에도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아무런 보상과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정부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군사정부 역시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무시와 방치' 정책은 일치했다. 한일협정 체결은 오히려 일본정부의 빌미가 됐고 인도적 지원을 바랐던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마지막 희망은 무산됐다.

결국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66년 8월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결성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조직적으로 일본의 보상을 촉구해나간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평화- 한국인 원폭위령비 주변으로 '평화'라는 글귀가 새겨진 작은 돌들이 널려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배타고 밀항... "일본은 나를 치료하라"

한국인 피폭자인 손귀달씨의 일본 밀입국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대일 투쟁'을 여는 일대 사건이었다. 68년 10월 당시 부산에 거주하던 손귀달씨는 홀로 일본으로 밀입국한다. 당시 그는 일본에서의 치료를 요구했지만 결국 일본정부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한국으로 강제송환이었다.

이어진 밀입국 투쟁은 손귀달씨의 오빠인 손진두씨로 인해 법정공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손진두씨는 동생의 밀입국 이후 2년여 만인 70년 12월 3일 일본으로 밀입국했고 사가(佐賀)현 쿠시우라항에서 체포된다.

손진두씨의 밀입국과 체포는 일본 사회내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당시부터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지원하는 모임들이 일본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결성된다. 이들과 연대한 손진두씨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시작한다. 이것이 그후 8년여를 끌었던 소위 '수첩재판'이다.

72년 10월 건강수첩 신청을 거부당한 손진두씨는 후쿠오카 지방재판소에 각하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고 이어 74년 3월 1심→75년 7월 2심→78년 3월 최고재판소 판결로 이어지면서 내리 '전면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당시 법원은 "일본의 원폭의료법은 피폭된 모든 인간이 국적과 거주장소와는 차별없이 향수할 권리를 가진다"며 손진두씨에게 건강수첩을 발부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당시 손진두씨의 재판 승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외에 거주하는 원폭피해자들은 건강수첩을 받더라도 원호수당 수급에서는 제외된다. 일본 정부는 손진두씨 1심 재판 이후 74년 7월 후생성 공중위생국장 통달(공무원간 전달사항)으로 일본 국외 거주 원폭피해자에게는 원폭 2법이 적용하지 않도록 조처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방침으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투쟁은 2000년대 들어 이강녕·곽귀훈씨의 재판투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지난 2002년 12월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법정 투쟁에서 획기적인 판결이 나왔다. 한국인 피폭자인 곽귀훈(현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씨가 오사카(大阪) 고등법원에서 원호법 적용확인 소송에서 승소한 것이다. 앞선 지난 2001년 12월 26일 이강녕씨 역시 승소했다.

손진두→이강녕→곽귀훈... 30여년의 긴 법정투쟁

▲ 지난달 26일 대구KYC 히로시마 평화기행단 일행들이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두 가지 재판은 그동안 일본 정부가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해 국외 거주를 이유로 지원을 방치해도 된다는 논리를 무너뜨린 것이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60년의 기나긴 투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재판은 올해들어 지난 1월 19일 오후 히로시마(廣島) 고등법원은 강제징용을 당해 원폭피해를 입은 한국인 강제징용자 40명이 일본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2심에서 원고측의 손을 들어줬다.

히로시마 고등법원은 이날 판결에서 히로시마 지방법원에서 기각된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일본 정부에 대해 원고 1인당 120만엔(한화 1200만원 상당)씩 총 4800만엔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방치를 처음으로 인정한 판결인 셈이다.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역사는 올해로 60년째이다. 해방은 60년 전의 일이었지만 이들에게 해방의 길은 멀고 험했다. 그리고 그 먼 시간동안 이들이 당연히 찾아야 할 권리는 그들의 손과 땀, 그리고 피로써만 획득이 가능했다. 더욱 의아한 것은 그 역사의 한 획, 한 획속에서 그들을 지켜주고 대변해줘야할 한국정부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90년 5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인도적 차원의 의료지원을 요구해 40억엔 지원을 받았지만 애초 한국원폭피해자들이 주장했던 23억달러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지원금은 한일협정과 함께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권리찾기와 개별보상을 가로막는 도구로 이용돼왔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위한 한국의 정부는 없다

해방 60주년을 맞는 2005년, 해방의 감격을 되뇌이기에 앞서 아직도 해방되지 못한 한국인 원폭피해자와 강제종군위안부, 나아가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역사를 되새겨봐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침략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에 앞서 한국 정부와 언론은 어디서 무얼했는지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 왔다.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곽귀훈씨는 지난 2002년 재판승소한 후 귀국했지만 이내 실망감에 빠졌다. 어느 곳도 곽귀훈씨의 재판 승소에 대한 가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난 2004년 기자와 만나 씁쓸한 이야기를 남겼다.

"일본에서 승소 판결이 나자 인간 승리라면서 나의 재판 결과에 대한 평가를 했어. 하지만 귀국해서 보니 언론이든 어디든 아무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더라고. 그래서 결국 내가 직접 일본 신문 기사를 오려서 언론사로 쫓아다녔지. 그때서야 몇몇 신문에서 보도를 했어. 한국 정부든 언론이든 우리에겐 관심이 없는가 봐. 착잡하더군."

한국인 위령비 옛 터에 얽힌 사연은
조선 비운의 왕족, 이우가 발견된 곳...원폭으로 사망

▲ 이우
ⓒ출처 네이버검색
히로시마시 당국의 반대로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 건립이 어려워지자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던 인사들은 평화공원 앞 하천 건너 본천교(本川橋·혼카와바시) 옆 공터에 위령비를 건립한다.

당시 위령비를 왜 하필 그곳에 건립했을까. 그 속에는 슬픈 역사적인 비화가 있다. 위령비 옛 터는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조카 이우(1912~1945)가 피폭을 당한 후 발견된 곳이라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이우는 고종의 손자이면서 의친왕 이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일본에서 내선일체 정책으로 황족에 준하는 신분을 부여받고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친다. 육사를 졸업한 후 중국에서 일본군의 정보참모로 파견돼 근무했다.

하지만 피폭 1개월 전인 7월 일본은 그를 히로시마 제2총사령부로 부른다. 일부에선 당시 조처를 이우가 중국에서 조선독립군과 접촉을 시도했고 이를 막기 위한 조처라고 해석한다.

결국 이우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인근 별장에서 일본군 제2총사령부로 출근하다 피폭당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이우는 원폭 투하지점으로 이용된 상생교(相生橋·아이오이바시) 부근에서 피폭을 당한 후 하천을 따라 내려가다 지금의 본천교(本川橋·혼카와바시)에서 떠올라 구조됐다.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다음날인 7일 사망하기에 이른다. 향년 32세의 나이였다. 그의 시신은 8일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이송됐고 8월 15일 해방을 만끽하는 만세 소리와 함께 장례가 치러졌다.

이우는 앞서 그의 형제들이 일본 왕족의 딸들과 강제결혼 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군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부를 맞기 위해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을 결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그가 평소 일본 군인 신분으로 신분적 제약이 있었지만 조선독립군을 지원하고 조선의 기개를 쉽게 저버리지 않은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히로시마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과 함께 원폭의 핵폭풍으로 쓰러지는 비운을 맞이했고, 재일 원폭피해자들은 왕족인 그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그가 발견된 곳에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 <한국의 히로시마>·이치바 준코 지음·역사비평사

*원폭피해자 지원 및 구술증언 사업 <평화길라잡이> 참여하기→대구KYC

*<대구경북 오마이뉴스> 바로가기→dg.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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