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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진
루트마스터(Routemaster) 더블데커.

50년대 중반 런던 도심에 출현한 이래 50년이 넘는 기간동안 영국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아온 원조 이층버스를 일컫는 말이다. 세계 관광책자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 빨간색 루트마스터는 빅벤이나 버킹엄 궁전 같은 관광명소보다 훨씬 강한 ‘런던’향을 풍기며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사로잡아왔다.

그런데 요즘 이 버스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중고버스 시장이 붐빈다. 중고차 전문업체 엔사인사 관계자는 지난 10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유럽, 아시아 등 세계 전역에서 구매자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며 4개월간 150대가 팔렸다고 전했다.

루트마스터 애호가와 런던 시민들은 팔려나가는 버스를 보며 속상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다. 런던시내에서 ‘클래식 이층버스’ 루트마스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런던 교통국, “루트마스터는 이제 퇴물, ‘퇴출’”

▲ 특이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루트마스터. 1층 운전석 절반이 잘려나가 생긴 요철이 독특하다. 2층에 탄생50주년 기념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도 눈에 띈다.
ⓒ 박성진
클래식 이층버스 '루트마스터' 퇴출은 오래 전부터 예견됐다. 1994년 영국 대중교통사업이 사유화 되면서 당시 런던 교통국이 전통 이층버스 루트마스터 운행계약을 10년 안팎으로 제한했던 것.

10년이 흐른 뒤인 지난해 4월, 런던 교통국은 “루트마스터를 신형 이층버스나 굴절버스로 2005년까지 교체하거나 운행 노선을 폐지한다”고 밝혔고, 이로써 루트마스터 퇴출은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교통국이 내세운 주된 퇴출 사유는 “휠체어 사용자, 유모차 동반 부모 등 100% 승객유치가 가능한 버스를 도입한다”는 것. 경영 문제도 물론 거론됐다. 노후한 차량 때문에 유지보수 비용이 높다는 게 이유다. 신형 이층버스나 굴절버스가 더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다는 유용성도 나왔다. 또 루트마스터는 안전운행에 부적합 하며 버스 운행 속도 또한 느리다는 이유도 제기됐다.

▲ 런던 버스의 다수를 차지한 신형 이층버스
ⓒ 박성진
그러나 루트마스터 애호가들은 교통국의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루트마스터 보존캠페인 단체들은 “버스 차장이 동승하기 때문에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의 승하차를 돕는 데 훨씬 적절하며, 알루미늄으로 제작돼 차체가 가볍고 엔진 구조도 단순해 수리가 쉽고 내구성이 강해 보수비용도 적게 든다”는 등 교통국이 제시한 ‘퇴출’사유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심지어 몇몇 애호가들은 “리빙스턴 런던시장은 시장 부임 초기에 ‘루트마스터 이층버스는 런던의 심볼이며, 전 세계인이 알고 있는 런던의 명물’이라고 말해놓고 왜 이제와서 말바꾸기를 하는 거냐”며 반발하고 있다. 루트마스터 운전자 및 소유자 협회장인 필 윌슨도 지난 해 7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루트마스터는 런던을 위해 탄생한 버스”라며 루트마스터 퇴출에 반대한 바 있다.

이와 관련 리빙스턴 런던 시장은 “6개 정도의 주요 전통 노선에 소수의 루트마스터가 운행될 예정이라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발표했으나 시민들로부터 “관광용으로 만들어 특별요금을 징수하려는 얄팍한 상술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라지는 도시의 유적...“루트마스터에 타고 내릴 수 있는 자유를 달라”

원조 이층버스 ‘루트마스터’ 의 일생

* 1954년 - 1957년 4가지 기본 모델 완성, 제작당시 최고급 기술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주목받음. 알루미늄 차체, 이중창, 자동변속기, 파워핸들
* 1956년 런던 시내 운행시작
* 1976년 생산 중단. 총 2876대 제작
* 1980년대 중반 1500여 대 폐차 및 해외 판매
* 1994년 버스 사업 사유화 완료. 루트마스터는 교통국-업주간 별도 운행 계약 체결.
* 1999년 계약 종료 후 루트마스터 운행 중지 가능설 부상. 운행 가능 차량 500여대.
* 2003년 신형 이층버스 및 굴절버스로 교체 본격화. 루트마스터 3개 노선 운행 중단.
* 2004년 루트마스터 탄생 50주년 기념행사 개최. 루트마스터 10개 노선 운행 중단
* 2005년 1월 10일 현재 런던시내 7개 노선 200여대 운행 중.
* 2005년 연말까지 신형 이층버스 교체 완료.
* 2006년 이후 관광 상품용으로 소수 노선에 50여대 운행 예상
루트마스터는 영국의 공중전화 박스, 우체통과 함께 ‘가장 런던적인 것’으로 불리기도 한다. 런던 곳곳에서 만날 수 있고 붉은 색이어서 눈에 잘 띄지만 특유의 디자인 덕에 런던인들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는 것.

영국인들이 루트마스터에 각별한 애정을 갖는 이유는 생김새 때문이기도 하다. 매끈한 유선형의 신형버스에 비해 둔탁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느 버스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철을 갖고 있다. 독립된 운전석 때문에 버스의 전면부는 1층과 2층 사이가 한 입 베어 물린 모양이다. 게다가 왼쪽 후방에 나있는 출입구는 완전개방형이다. 런던 디자인 박물관의 큐레이터 캐서린 맥더모트는 루트마스터를 20세기를 대표하는 디자인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이런 독특한 디자인과 설계는 세계적으로도 본보기가 없다는 게 그 이유다.

▲ 루트마스터가 주는 도심속 자유. 후면 승하차 플랫폼
ⓒ 박성진
루트마스터 얘기를 하자면 ‘차장’또한 빠질 수 없다. 차장들은 손님의 요금을 직접 징수하고, 길안내는 물론 노약자들의 보호자 역할도 한다. 런던 시내에서 근교로 이주한 중년 영국인 에릭은 "루트마스터에 올라탄 뒤 차장을 만나면 인간적인 느낌이 든다“며 ”차장에게 노선을 물어보기도 쉽고,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어 편안하다“고 말했다.

루트마스터는 외국인들에게도 추억거리다. 스페인 유학생 라몬 로바칼로스는 "이층버스(루트마스터)는 정말 독특하다. 뒤꽁무니를 좇아 올라타고 곧바로 위층에 올라가 도시를 바라보던 재미는 잊지 못할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루트마스터 보전 캠페인 단체들은 이를 두고 “루트마스터를 타는 즐거움은 혼잡한 도시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여유와 자유로움”이라고 말한다. 루트마스터 보존회 대변인 벤 부르크는 홈페이지를 통해 “루트마스터에 타고 내릴 수 있는 자유를 달라”고 주장한다. “교통 체증에도 짜증 내지 않고 언제든지 내려서 걸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해 달라”는 것.

▲ 여름철 빅벤 주변의 관광객과 루트마스터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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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벤도 디지털로 바꾸지 그래?"

영국인들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변화에 인색한 걸로 유명하다. 제프 아담스 BBC 기자는 “런던 시민들이 루트마스터가 풍기는 도시의 전통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영국민들은 전통을 중시하고 한번 자리잡은 것이 바뀌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이와 관련, 런던 교통국의 핍 헤스케스는 지난해 7월 BBC와 인터뷰에서 “전통 보존 태도는 영국민이 가진 특징이 분명하지만, 때로는 장애인 노약자 등 다수의 이득을 위해 그런 태도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교통당국의 루트마스터 은퇴 독촉은 지난 해 개정 발효된 장애인 시설법으로 인해 더욱 탄력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영국 언론들도 큰 이변이 없는 한 이제 '원조' 클래식 이층버스 루트마스터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칼럼니스트 조나단 글렌시는 일간지 <인디펜던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루트마스터가 신형버스로 교체되는 현실을 두고 “도시 예술품이 사라지고 볼품없는 가축 트럭이 들어선다”며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또 BBC 나타니엘 기자는 “껴안고 싶은 모양의 버스이며 움직이는 도시의 경관”이라며 “안타깝게도 이 도시의 유적이 사라질 것 같다”고 우려했다.

도시의 ‘움직이는 경관’이자 런던 시민의 삶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전통, 이층버스 루트마스터. 이들에게 루트마스터가 사라지는 것은 도시의 유적이 사라지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루트마스터 보존회' 벤 브루크 대변인은 영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버킹엄 궁전부터 당장 신축하고 빅 벤도 디지털시계로 바꾸지 그러냐?"며 시민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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