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권 피탈이 한창이던 1907년 7월 31일, 막 즉위한 새황제는 군대해산에 관한 조칙을 내렸다. 장차 "다른 날에 징병법(徵兵法)을 발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코자 한다"는 구차한 사유를 들먹였으나, 그 일이 정말 이뤄질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로 인해 숱한 장졸들은 일순간에 흩어지고, 대한제국은 글자 그대로 '힘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 한국군대의 흔적은 아주 '쬐끔' 남겨졌다. 바로 근위대(近衛隊)라는 존재가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시' 군대가 해산되는 동안 "황실 시위에 필요한 자를 선치"하려 했던 탓이었다. 그렇게 남겨진 근위대는 1개 대대의 규모로 황궁의 의장 및 수위를 담임하는 '근위보병대'와 황실의장의 임무를 관장하는 '근위기병대'로 이뤄졌다.

▲ 1907년 7월 31일자로 군대해산조칙이 내렸다. 이 와중에 한국군대는 몽땅 흩어졌으나, '근위대'의 일부만은 황실을 시위한다는 명분으로 간신히 남겨졌다.
ⓒ 이순우
그리고 이러한 편제는 식민통치기에 들어간 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마치 나라는 망했어도 황실은 이른바 '이왕가(李王家)'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보존되었듯이 말이다. 다만 이번에는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이 달랐다.

나라가 없어진 마당에 그러한 군대가 무슨 소용일까 마는, 그나마 유일한 조선인 부대가 이것이었으니 이를 두고 '민망하지만' 군대라고 하지 않을 도리도 없다. 하나, 기껏해야 파수꾼 노릇이나 했을 뿐이지 애당초 하는 일이 너무 없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러한 탓인지 경복궁의 서남쪽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기병대는 1913년 무렵엔가 없어지고 만다.

이제 남은 것은 조선보병대 하나였다.

그런데 비록 허수아비와 같은 조직이기는 하지만, 식민통치자들에게는 빈둥빈둥 예산만 축내고 있는 이들의 존재가 그리 달가울 리가 없었다. 더구나 흔히 육조거리라 불러왔던 광화문통의 맨 앞줄에 자리했던 조선보병대의 위치는 누가 봐도 참으로 알짜였다.

▲ 1915년 가을에 경복궁에서 벌어진 '조선물산공진회장'의 전경을 찍은 사진자료이다. 중간쯤에 광화문이 보이고 그 너머로 육조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알짜'구역이 바로 '조선보병대'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선 자리이다.
ⓒ 이순우
그래서인지 조선총독부 측에서 조선보병대를 다른 곳으로 밀어내려는 시도를 했던 흔적이 여러 차례 발견된다. 특히 경복궁 안에 새로이 지어 올린 총독부 청사의 완공시점이 다가오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가령 <매일신보> 1925년 3월 29일자에는 '이전되려는 조선보병대, 경비는 작년보다도 증가'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남아 있다.

"조선보병대는 기보와 같이 경복궁 내의 총독부 신청사가 낙성됨과 동시에 관사 기타의 필요상 타(他)에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목하 신기지를 선택중이라는데 원래 동대(同隊)의 존재 목적은 이왕가 수호에 재함으로 신기지도 창덕궁에 인접된 곳을 택하나 용이히 결정치 못하였으며 서소문 내의 현금 관사지가 최(最)히 유망한 듯하더라."

하지만 이 일은 즉각 실행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그들이 지켜야 할 '전직' 황제가 엄연히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딱히 그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조선보병대는 그 자리를 그대로 지켰다.

▲ 근위보병대 시절(1909년)과 조선보병대 시절(1911년)에 이뤄진 '병졸모집공고'의 예문이다. 이러한 일은 조선보병대가 해체되기까지 해를 거르지 않고 계속 되었다.
ⓒ 이순우
그런데 이러한 일이 아니더라도 그 즈음의 조선보병대란 것은 이미 병력규모 자체도 크게 줄어든 형편이었다. 원래 700명 남짓했던 인원이 벌써 200명을 약간 웃도는 정도로 잔뜩 쪼그라든 상태였다. 그들의 존재이유라고 할 수 있는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것이 빌미로 작용했던 탓이었다.

여기에다 이번에는 '순종황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또 바뀌고 있었다. <동아일보> 1926년 5월 19일자에는 조선보병대의 스산한 풍경을 이렇게 그렸다.

"을사년에 한국군대가 해산된 후로 조선군대의 자취로 조선보병대란 것이 남어 있어 옛날을 모르는 어린 국민에게 조선에도 군대가 있었다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조선보병대는 병짜가 붙으나 싸움에 필요치 않은 총은 메고 칼은 찼으되 오직 옛날의 황궁을 지키는 시위대로 허수아비 군대에 지나지 못하되 그것이 파란 많은 한국군대의 자취이라는 인연을 가졌으리만큼 그 앞을 지나는 사람의 회구지감을 자아내였다.

그런데 이번에 그들의 존재의 목적인 창덕궁 융희황제께옵서 승하하시매 그들의 존재도 더는 필요치 않게 되어 현재의 일개 중대 이백 오십 명을 축소하여 사, 오십 명의 일개 소대로 편성하기로 하리라는 말이 나서 방금 총독부와 군사령부 사이에 의논이 되는 중이라 한다.

본래 군대해산 뒤에 특히 기병대와 보병대를 두어 왕궁의 존엄을 유지하던 것이 합병 후 얼마 아니되어 기병대는 해산을 당하고 그 후 고종태황제 승하 후에 칠, 팔백 명이 있던 것이 일개 대대가 다시 축소되어 현재와 같이 일개 중대로 되었는데 이제 다시 축소되기로 된다니 연전부터 계획 중이던 보병대 위치 변경계획(예상 사십만 원)도 자연히 쓰러지고 말게 되었다.

육조 앞에 들이는 나팔소리도 차차 자취를 감추게 되고 삼각성단 군인도 멀지 않은 장래에 자취를 감출 터이니 조선인은 영원히 무기를 쓰지 않는 평화로운 국민이 될 것이다. 대대로부터 중대로, 중대로부터 소대로, 소대로부터 전무(全無)로, 이것이 조선보병대의 운명이리오. 경복궁도 총독부로 변한 날이어늘!"


그러고 보니 애당초 조선보병대의 운명이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이젠 그들이 지켜야 할 대상도 창덕궁 낙선재에 홀로 남겨진 대비 즉 순종황후가 고작이었다. 게다가 이른바 새로운 '이왕' 역시 거의 도쿄에 상주하던 형편이라서 더 이상 조선보병대를 꾸려나갈 명분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 서울 성북구의 삼선공원에는 조선보병대의 '총무당' 건물이 남아 있다. 이것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있는 '청헌당' 건물과 더불어 아주 드물게 남아 있는 한국군대 시절의 흔적이다.
ⓒ 이순우
더욱이 바야흐로 '대공황'의 시대가 다가왔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조선보병대로서는 당장의 일거리가 없어진데다 경제사정도 한층 어려워졌으니 이래저래 대단한 '불경기(?)'를 맞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불황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조선보병대 자체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아닌게 아니라 관리들은 긴축재정으로 인한 감봉사태에 휘말리고, 수업료를 내지 못해 중도에 자진 퇴학하는 학생들이 속출할 정도는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듣자 하니 경성제대를 나온 엘리트조차도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난리를 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누구에게나 취업난은 큰 문제였다. 형편이 이러다 보니 조선의 청년들에게는 최소한 2년간의 복무기한이 보장되는 조선보병대가 참으로 안정되고 매력 있는 직장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실제로 <매일신보> 1930년 2월 14일자에는 '근년에 보기 드문 지원자 격증현상'에 대한 기사 하나가 남아 있다.

"극도에 달한 농촌의 피폐가 일부의 농촌청년들을 도시동경병자(都市憧憬病者)로 만든 이야기! 조선보병대에서 해마다 조선 각지로부터 7, 8십 명의 신병을 모집하여 2년 동안 군사교육을 시킨다. 금년에도 또 신병의 입대기가 점차 가까워 오므로 동대에서는 각지 부군청에 의뢰하여 신병모집 광고를 하였었는데 응모지원자수가 팔백여 명부 모집정원의 십배를 초과하여 지난 1월말로써 사절을 하고 말았다.

지원자들은 함북과 평북의 산촌을 비롯하여 대개가 각지 농촌의 청년들인데 그들은 보통학교나 또는 기타의 학교교육을 다소간 받은 농촌에 있어서는 그래도 유식계급이라 할만한 청년들로 농촌의 피폐가 점차 심하여 가는 오늘에 있어 생활은 갈수록 곤궁하여지므로 농촌진흥이라는 위대한 사업에 스스로 중견청년 되기를 싫어하고 까닭 모를 도회동경 어쨌든 도회생활을 한 번 하고 싶다는 일종 병적 현상으로 인하여 그와 같이 지원자가 많아진 모양 같다. (중략)

그 한편 2년의 기한이 지나간 재대병(在隊兵)들도 '서울'을 떠나기 싫은 생각, 또 고향으로 돌아간대야 생활난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고 그밖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을 예측하고 어쨌든 자기 일신의 생활만은 보장되어 있는 군대생활이 차라리 낫다 하고 일년 혹은 이년씩 재대기간을 연장하는 병정들도 많은 모양이므로 이에 따라 금년의 신병채용은 예년의 수효보다 다소 감소될 듯하다 한다."


하지만 설령 이때에 대단한 경쟁률을 뚫고 용케 조선보병대에 채용된 젊은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은 결코 2년간의 복무기한을 다 채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뒤늦은 인기폭발의 조선보병대는 그 이듬해에 결국 해체되어 사라지는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 <매일신보> 1931년 1월 14일자에는 조선보병대의 해체결정을 알리는 기사가 수록되었다. 가늘고도 길게 이어져온 조선보병대는 결국 '불경기'를 넘지 못하고 퇴출되고 말았다. 기사에 수록된 사진 가운데 빨간 표시가 된 건물이 바로 현재 삼선공원 안에 남아 있는 '총무당'이다.
ⓒ 이순우
조선보병대의 해체결정이 알려진 것은 1931년 1월의 일이었다. 식민통치자들로서는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자기네들끼리 인원감축이다, 기구축소다, 급여삭감이다 뭐다 하여 진땀을 빼고 있는 판국에 애물단지 같은 조선보병대를 더 꾸려나갈 아무런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군대의 흔적을 간직했던 조선보병대는 1931년 4월 8일에 해산식을 갖는 것으로 무려 20여 년간에 걸쳐 퍽이나 '가늘고도 길게' 연명했던 서글픈 행로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일본군에 빌붙은 조선보병대의 지휘부에게는 상당수의 진급과 동시에 조선군사령부로 전임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런데 이도 저도 아닌 나머지 병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절반 가까이는 제대와 더불어 진작에 제 고향으로 내려갔고, 마지막까지 남은 백수십여 명에 대해서는 불경기에 오갈 데 없는 처지인 걸 감안해선지 이런저런 자리에 알선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일이란 게 순사나 형무소 간수나 전차 차장과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창덕궁경찰서에 약 50명이 순사로 채용됐고, 일부는 지방의 순사로 배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 <매일신보> 1932년 1월 1일자 신년호에는 전년도 즉 1931년의 시사사건을 총정리하는 삽화가 수록되었다. 이 가운데 1931년 4월의 주요사건으로는 '조선보병대 해산'이 선정된 것이 눈에 띈다.
ⓒ 이순우
그러고 보면 조선보병대가 만들어진 이래로 이곳을 거쳐간 조선의 청년들은 해마다 충원된 숫자를 감안하면, 대략 오천여 명의 규모가 되지 않을까 추산된다. 간혹 독립지사들 가운데 조선보병대 출신이 더러 있는 것이 눈에 띄긴 하지만, 대개는 시골에서 올라와 복무연한을 마치고 다시 일상의 생활로 되돌아간 사례가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초라하나마 한국군대의 명맥을 이어왔던 조선보병대의 마무리가 하필이면 '순사'가 되는 것이었니 그 역시 무척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망국의 왕실을 위한 그들만의 평화군대는 그렇게 일상 속으로 흩어졌다. 그 누구도 해산명령에 반발하는 이 없이 아주 조용히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의병(義兵)'은 없었다.

정부중앙청사, 조선보병대 자리에 우뚝 서다
다행히 예전의 '총무당'과 '청헌당' 건물은 그대로 남아

▲ 조선보병대의 마지막 흔적이었던 '청헌당'은 정부종합청사의 건립으로 1967년 4월에 해체되어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다.
ⓒ68보도사진연감
조선보병대가 주둔했던 곳은 육조거리라는 말이 뜻하듯이 원래 '예조(禮曹)'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다가 이곳에 군사기구가 들어선 것은 대원군 시절의 일이다. 예조를 밀어내고 그 대신에 여기에다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킨 것이 바로 그였다. 물론 삼군부의 주요 건물인 총무당(總武堂), 청헌당(淸憲堂), 덕의당(德義堂)은 모두 이 시기에 지어졌다.

1880년에 삼군부가 폐지된 뒤로는 한때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들어섰다가, 1894년 이후에는 시위대(侍衛隊)와 근위대(近衛隊) 시절을 거쳐 조선보병대가 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그 기능과 명칭이 약간 달라졌을 뿐 이곳에는 거의 반세기가 넘도록 국권을 상징하는 군부의 최고 사령부가 자리했던 것이다.

1931년 4월에 조선보병대가 해산된 뒤로는 여기에 조선총독부의 체신국 분실 즉 보험관리국이 들어선다. 이는 1929년에 도입된 '조선간이생명보험'을 관리하던 기구였다. 그리고 이 기구의 기능과 위치는 해방이 되고도 체신부에서 넘겨받아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 후에 벌어진 가장 큰 변화는 1967년에 이르러 바로 이 자리에 '정부중앙청사'가 착공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때까지 용케도 남아 있던 조선보병대 시절의 '청헌당' 건물은 논란 끝에 1967년 4월에 해체되어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런데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있는 삼선공원 안에도 조선보병대의 흔적 하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보병대 시절은 물론이고 오래 전 삼군부 시절부터 핵심 건물로 사용해왔던 '총무당'이 바로 이곳에 옮겨져 있다. 이 또한 지금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언제, 무슨 계기로 총무당 건물만 이곳으로 옮겨진 것인지는 자세히 고증되지 않으나 조선보병대가 해산된 직후에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현재 건물 앞에 세워진 안내문안에 "삼군부 건물 중 총무당은 일제 때인 1930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설명한 구절은 조금 착오인 듯하다. 조선보병대가 해체된 것이 1931년이고, 그때까지는 총무당이 원래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 사진자료로도 분명히 확인되니 말이다.

원래 나란히 있어야 할 총무당과 청헌당이 엉뚱한 곳에 서로 뚝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좀 아쉽긴 하지만, 그렇게나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큰 다행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서 있는 '덕의당' 같은 경우는 그것이 언제, 어떻게 사라진 것인지에 대해 도무지 아무런 기록조차 확인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행정수도가 이전되면 지금의 정부중앙청사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또 바뀌게 될까? / 이순우

"세계 유일의 절대평화군대, 조선보병대"
<동아일보>1928년 1월 3일자에 수록된 조선보병대 풍자기사

<동아일보> 1928년 1월 3일자, "표리부동(1) 전쟁참화엔 풍마우, 절대평화의 유일군대, 총 메고 칼은 차고 아니 배운 전술이 없으되 재주만 닦아둘 뿐 오직 덕으로 천하를 평정, 신년 맞는 조선보병대"

광화문이 면목이 없어 낯을 돌려 돌아앉고 총독부 백석관(白石館)이 으리으리한 그 앞에 조선보병대가 얼굴을 붉히고 있다. 무엇이 부끄러워 그다지 안색이 붉어졌노. 늙은 몸에 또 새해를 맞이하느라고 심중이 저으기 불안한 모양이다.

붉은 코밑에 문송(門松)이 꽂혀 있고 이마빡이에 '시메나와'가 얽어졌으니 양복입고 갓 쓴 것 같아 거북스럽기 짝이 없다.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몸이라, 인사 체면 다 돌아볼 것이 무엇이랴 하는 셈인가. 새해가 원수 같은 줄이야. 너 아닌들 모르련만 보는 바에 하도 딱해 네 자랑거리를 적어볼까.

겉 희고 속 검은 것은 백로(白鷺)라 하며 겉은 검되 속 흰 것은 가마귀를 이른다니 우리 조선보병대는 가마귀에 비할 것인가.

신산한 풍상에 얼굴은 상기되어 붉은 빛을 보이지마는 그 속은 알뜰하니 총 메고 검을 차고 배낭 지고 '구보롯' 하며 사격, 격검 못하는 전술이라곤 하나도 없으되 재주를 닦아둘 따름이지 부리는 법이 없고 오직 침묵의 덕으로써 사해를 평정하려 하니 천하에 이러한 평화의 군대가 어디 또 다시 있을거냐. 우리의 세계적 자랑거리 조선보병대!

아무리 군비축소를 하느니 해군제한을 하느니 하여 '쩨네바', '와싱톤'으로 날고 기는 외교객이 구름같이 드나들되 조선보병대를 본받지 안 했으므로 모두가 공론에 지나지 못하지 안 했는가. 만일 '윌손', '쿨릿지'가 조선보병대를 몽중에라도 시찰하였더라면 세계평화는 즉석에 실현되었을 것을….

월급 십사 원에 엇둘 엇둘 하는 이백 명의 평화군대! 천하를 덕화(德化)하려는 그 의기는 만대에 사라지지 않을 건가. 솔은 천년을 맺고 대는 만년을 기약한다는 '문송'이 꽂히었으니 앞날이 창창한 것 같기도 하다마는 덕으로 행세 못하는 야속한 세상이야….

신년을 맞이하여 평화의 군대의 만세나 불러 볼까. 절대 비전군대(非戰軍隊)여 만세!

조선보병대, 불경기를 넘지 못하고 퇴출되다
<매일신보> 1931년 1월 14일자에 수록된 해산관련기사

<매일신보> 1931년 1월 14일자, "내4월 신년도 초에 조선보병대 폐지, 보병대 당국에선 군부와 협의, 총독부에서 내용발표"

벌써부터 몇 번이나 해산설을 전하던 조선보병대는 필경 오는 4월 1일부터 단연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13일 총독부에서 그 일부를 발표하였는데 동 보병대에는 현재 ▲ 장교 6명 ▲ 하사 18명 ▲ 특무조장 3명 ▲ 병졸 175명 ▲ 합계 202명의 군대가 있어

그들의 처치 여하는 조선보병대의 어담(魚潭) 조성근의 두 중장이 13일 이른 아침부터 용산조선군사령부에서 임(林) 사령관 등과 함께 구수밀의중으로 아직 방침은 알 수 없으나 대개 장교는 군사령부에 배속되고 기타 군졸은 (병졸 일인의 봉급은 평균 한달 15원) 전부 해고될 것으로 관측되는 바 이 보병대의 해산으로 총독부에서 얻는 바 예산의 절약액은 일년 약 24만 원 가량이라 한다.

"구한국황실 친위대가 전신, 역사 많은 병영 건물 중에도 회포무량한 총무당"

금년에 단연 해산키로 결정된 조선보병대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즉 지난 융희 원년 8월에 당시 한국의 병대가 해산되고서 즉시 덕수궁 이태왕 전하와 창덕궁 이왕 전하의 근위병으로 새로이 육백 명의 군대를 모집한 것이 조선보병대의 시초이며

현재 조선보병대가 주둔하여 있는 광화문통의 병영은 본시 삼군부(三軍府)라 하여 한국군대의 총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그 후 친위대병영, 조선헌병사령부 같은 것이 있다가 일한합병이 성립되면서 조선보병대로 변한 것으로 조선 역사상에 가지가지의 '에피소드'를 남긴 인연 많은 곳이라 한다.

그리고 동 병영내에는 총무당(總武堂)이라는 보병대 내의 최고건물이 있어 지난 계미년(癸未年)에는 원세개(袁世凱)의 막료인 오장경(吳長慶)이 이곳에서 체재한 일까지 있다는 바 어쨌든 동 보병대의 해산은 비록 명색뿐의 군대이라 하더라도 전변하는 역사의 과정과 함께 실로 감개묘량한 회포를 지어내게 한다.

"생기 없는 교련, 얼굴마다 우수"

전기와 같이 조선보병대의 해산이 총독부로부터 결정 발표된 13일 오전의 광화문 보병대는 이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장한 나팔소리에 발을 맞추어 교련에 정신이 없으나 병사의 얼굴에는 누구에게나 해산을 우려하는 비통한 빛이 가득하여 활발한 걸음걸이에도 근심스러운 모양이 보이는 듯한데 그들의 처치 여하는 이삼일 중에 즉시 발표하리라 한다.

"해산수당금 17만여 원"

총독부 재무국에서 결정한 조선보병대의 해산수당금은 전부 십 칠만 육천 사백 칠십 일 원으로 해산 즉시로 202명의 대원에게 각각 분배키로 되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