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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향인 이항증 씨(좌)와 권중희 씨(우)
ⓒ 박도
권중희 이항증 선생 두 분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몸소 겪었기에, 백범 암살 그 무렵의 해방전후사에 밝았다. 같은 경북 안동 태생으로 안동지방의 독립운동뿐 아니라 해방 후 서청(서북청년단)의 행패, 반민특위의 무산, 그리고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 불하 등 이승만 정권의 부패상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항증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으로 3대가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항일 명문 집안이다. 이승만 정권 추종세력들이 자기들만 일인 귀속재산을 독식하기 미안했던지 당신 집에도 나눠주는 것을, 그런 더러운 재산은 거저 줘도 안 받는다고 거부했다고 한다. 그 이유로 애국지사인 선친 이병화 선생은 수없이 유치장을 드나들어야 했다고 한다.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였다.

권 선생은 다시 안두희 얘기를 시작했다.
(다음은 권중희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필자 주)

찬물을 끼얹은 사람

안두희의 자백을 둘러싸고 언론은 연일 관련 기사를 대서특필했고,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게 되자 국회에서는 여야 모두 진상규명특위까지 구성했다. 친일파 출신으로 백범 암살 당시 헌병 부사령관에서 사령관으로 승진하여 암살 연루자로 지목 받았던 전봉덕이 미국에서 귀국해 있다가 서둘러 출국해 버린 일도 일어났다.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격’이랄까, 나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백범 선생의 아들 전 교통부장관 김신씨가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은 절대로 아버님 암살 사건에 관련되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한 것이다. 한창 달아오르던 진상규명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일이었다. 선친의 억울한 죽음 배후를 밝히는 일에 격려는커녕 찬물 세례를 한 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래, 나는 불세출의 독립운동가 백범 선생의 암살 배후를 한 백성의 도리로 규명하는 것이지 그 후손을 위해 하는 일은 아니다”라고 마음가짐을 고쳐서 흐트러진 각오를 새로이 다잡았다.

또 장택상씨 딸이 자기 아버지는 암살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투고한 것도 보도되고 김창룡조차도 연루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나는 그동안 안두희가 입을 열지 않고 44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배후세력들이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백범 선생을 살해하는데 이용했던 매국적 사대주의, 극우 냉전 논리가 세기가 바뀐 지금까지도 버젓이 살아 있다.

안두희 강제연행 작전

좌절감과 허탈한 마음으로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뜻이 통하는 김인수 동지와 자주 만나 울분을 토하면서 이번에는 보다 더 완벽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자금이 늘 문제였다. 그동안은 내 호주머니나 동지들의 성금으로 충당했다. 어떤 때는 인천 가는 전철 차비도 없어 안두희를 찾는 일도 포기한 적도, 하루 종일 쫄쫄 굶어가며 안두희를 기다리거나 수십 리 길을 걸어서 다닌 적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이번 거사에는 렌터카도 빌려야 하기에 다소 큰돈이 필요했다. 마침 6·3동지회장을 지낸 김삼연씨에게 염치없게 30만원을 부탁했더니 10만원 보태서 40만원을 내놓았다. 그분도 어려운 처지에서 나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지원해 줘서 눈시울이 뜨거웠다.

1992년 9월 23일을 최종 D데이로 정하고 착착 준비해 갔다. 그때 나를 도와줬던 동지는 김인수, 변수환, 신현석씨였다. 거사 전날인 9월 22일, 안두희 집에서 가까운 인천의 어느 뒷골목 조용한 여관에서 묵었다.

1992년 9월 23일 새벽 5시에 안두희 연행 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일행은 곧장 안두희가 사는 인천 신흥동 동영 아파트로 갔다. 차소리가 들리면 이상히 여길까봐 멀찌감치 신광초등학교 쪽에 주차시켜 놓고 걸어갔다.

문밖에서 잠복해 있다가 안두희 처가 운동하러 문을 열고 나오면, 그대로 밀고 들어가는 일은 나와 신 동지가 맡기로 했다. 변 동지와 김 동지는 아래쪽에서 망을 보다가 우리가 안두희의 아파트로 들어가면 즉각 합세하기로 했다.

5시 30분부터 아파트 문앞에서 1분 1초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6시 정각 불 켜는 소리가 나더니 조금 있다가 변기에 물 빼는 소리가 났다. 곧 나오나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스위치 끄는 소리가 나더니 감감무소식이었다. 목이 타는 10분이 지나갔다.

6시 10분, 드디어 달그락달그락 열쇠 따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면서 배드민턴 채를 든 안두희의 처가 나왔다. 그 순간 나와 신 동지가 번개처럼 그를 밀치고 들어갔다.

안두희 방으로 들어가니 우리가 들이닥친 줄도 모른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안을 깨워 옷(트레이닝복)을 입게 한 후 동지들과 함께 안을 끌고 내려가 차에다 태운 후 곧장 고속도로를 탔다.

대침에 굴복한 안두희

▲ 1992, 9. 23. 경기도 가평 박배규 씨 농장에서 암살 배후를 털어놓는 안두희(가운데)와 안두희를 달래는 김인수(좌) 씨, 권중희(우) 씨
ⓒ 권중희
우리가 미리 정해 놓은 곳은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에 있는 박배규씨 농장이었다. 경인고속도로와 올림픽대로를 거쳐 농장에 도착하자 오전 11시 무렵이었다. 안을 방에다 데려간 후 처음에는 좋게 타일렀다.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네 처가 자꾸 방해하려 들기 때문에 조용히 얘기를 듣고 싶어서 이곳까지 데려왔다. 이제는 사건 전모를 모두 털어놓아라.”

“더 할 말도 없고 나는 오늘이 제삿날로 각오하고 있으니 맘대로 하라.”

그의 첫 마디가 성질을 건드렸지만 꾹 참고 계속 설득했다.

“너의 가슴 한구석에 털끝만한 양심이라도 있다면 모든 것을 실토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속죄해야 할 것 아니냐.”

“….”

▲ 올해 68세임에도 여태 청년의 기백을 지닌 권중희 씨
ⓒ 박도
평소 침술을 공부했던 나는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게 엉덩이에다가 대침을 8~9 차례 찔렀다. 그러자 그렇게 고집 부리던 안이 금방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안이 조용히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날 안두희는 4~5시간에 걸쳐 이야기했다. 중풍으로 발음이 시원찮고 속도도 느렸다. 이제와는 달리 아주 깊은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묻지도 않는 얘기까지 술술 쏟았다.

막상 안이 술술 자백을 하자 그 자가 더 추하게 보였다. 일제 치하 우리 독립지사들은 팔다리가 끊어져나가는 모진 고문에도 끄떡도 안 했다는데, 고작 대침 몇 대에 지레 겁먹고 줄줄 부는 그가 가엾어 보였다.

비록 궤변일지언정 제 놈이 백범 선생을 우국충정으로 살해했다면 이까짓 대침 정도에 굴복해서야 무슨 대장부인가. 더러운 권력의 주구(사냥개)요, 꼭두각시임을 확인하자 더 비열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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