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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광란기, 1940년에서 1945년 8월 14일까지 일본제국주의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준비하고 민중들을 징병이니 학병으로 전쟁터로 내몰았다. 청년과 학생들이 전쟁터로 끌려갈 때 앞장서서 독려하고 홍보했던 사람들은 일본인보다 지식층의 조선인들이었다.

이때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는가? 지식인들은 매일 '전쟁터로 나가자'라고 강연회와 좌담회를 열어 민중들을 독려하거나 강제로 내몰고 있었다.

1941년 11월 1일 경남지역의 지원병자는 6천여 명을 육박했다. 당시 '지원병 응모자'는 각 부·군의 부윤(府尹), 면장, 면서기, 구장 등이 적극 독려하여 이루어졌으며, 친일 언론사도 '혈세 지원자'니, '징병제 정당성' 등을 홍보하면서 한 몫을 했다.

또한 지역마다 지식인 혹은 친일인사들은 신문마다 '징병제 환영', '대동아 전쟁터로 달려가자'라는 선전문구와 함께 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들은 같은 민족을 전쟁터로 내몰면서 관직에 오르고 부를 축적했다. 그들이 어떤 친일행적을 보여주었는지 신문광고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 고성읍협의회 의원들 전쟁을 독려하는 광고
ⓒ 전갑생
1937년에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8년에 육군 특별 지원 명령을 칙령으로 공포하여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지원병의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로는 강제 모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친일파와 친일 단체들을 동원해서 지원병 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940년 이후에는 지원병을 대대적으로 증모하기 위하여 선전대의 조직, 지원병 후원회와 전국 경찰의 동원 등으로 지원병 수를 할당하는 등 강제 모병을 노골화하였다.

경남 통영군(거제 포함)의 지원병후원회에 탁동조(통영읍 부회장), 진정률(장승포읍 부회장, 장승포읍회 의원, 학병제지지 광고) 두 명이 앞장서 징병·학병제를 옹호하면서 나섰고, 우리의 청년들을 읍면별로 모집하여 징병과 학병으로 보내는데 환영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일제는 1943년에 해군 특별 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육군의 경우와 같이 강제 모병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1944년부터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한민족의 청년들을 그들의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동원하였다. 또, 학병제를 실시하여 전문 학교 이상의 학생과 졸업생들을 전쟁터로 끌어갔다.

특히 경남은 1941년 11월 1일을 기준으로 지원병 모병으로 징집된 인원수가 5천8백53명이며, 지역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부산 80명, 마산 223명, 진주 45명, 의령 351명, 함안 161명, 창녕 285명, 밀양 305명, 양산 107명, 울산 276명, 동래 163명, 고성 300명, 김해 220명, 진해 115명, 통영 50명, 거제 260명, 사천 309명, 남해 259명, 하동 333명, 산청 184명, 함양 452명, 거창 382명, 합천 243명 등이다.

'결전(決戰)에 지금 일억 총돌격(一億 總突擊)'

1944년 1월 27일자 <부산일보>(일본어)에는 고성읍회 의원들은 '대동아 공영권'을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되어 "결전에 총돌격"하자고 광고를 냈다. 당시 읍회 의원인 김종삼(金宗三, 창씨명 金本宗三), 박용포(朴容浦, 朴本容甫, 1941. 8. 16 부산일보 지면을 통해 "반도청소년의 강력한 지도력이 시급"하다면 기고문을 게재함), 문성률(文性律, 文川性律), 김형국(金亨局, 金田亨局, 고성청과배급조합장), 大原榮夫 江戶川滿 深元忠三(고성군생활필용품소매조합 이사장, 고성산업주식회사 전무), 이부언(李富彦, 李澤富彦) 등이다. 특히 김형국, 덕천웅삼 두 사람은 1944년 1월 23일자에도 같은 내용으로 광고했다.
이들이 이렇게 신문광고를 내는데는 이갑용(李甲用, 중추원 참의, 大田一夫)이 항상 있었다.

▲ 전쟁을 독려하는 통영 지식인들과 자본가들
ⓒ 전갑생
1944년 1월 21일 거제 지역의 기관단체장들은 "학병제의 해, 1944년"이라는 제목으로 신문광고를 내었다. 그때 참여한 단체 등을 보면 거제(현 거제초등학교)·동부·일운(현 장승포)·옥포국민학교(현 옥포초등학교) 등 교육기관과, 동부면사무소 옥영철(玉永哲, 玉岡永哲, 면장), 원응주(元應周, 元山應周, 부면장) 면직원, 이정덕(李廷德, 李原廷德, 장승포읍회 의원, 해방후 거제수산 대표), 김종득(金鍾得, 金澤鍾得, 국민총력조선연맹 장승포읍제1구 부락연맹 이사장), 장준원(張駿遠, 張本駿遠, 장승포읍회 의원) 등 매판 친일자본가들이다.

특히 친일매판자본가들은 전시체제 이후 수산자본가로 성장해 해방 이후 적산 어장과 여객선 등을 탈취하여 운영했다.

▲ 학병제를 옹호하는 거제지역 인사와 기관들
ⓒ 전갑생
'징병제의 해, 1944년'
그들과 함께 학병제를 지지하는 광고를 낸 이들은 하문정(河文政, 河本文政, 장승포읍 부읍장), 하광세(河光世, 河本光世, 거제면 읍장), 김태익(金泰益, 金岡泰益, 거제면 부면장), 김현국(金炫國, 金元炫國, 16. 6 통영위생조합비 1000원과 은(銀)잔, 28.11.16 대례기념장, 통영산업조합장, 통영면협의회 의원, 통영소작위원, 통영읍회 의원) 등이다. 또 1944년 1월 9일 같은 내용으로 광고를 낸 김명기(金銘基, 金城銘基, 연초면 면장), 최현수(崔玄洙, 高松 浩, 하청면), 전옥선(全玉善, 慶山達雄, 장목면장), 김수장(金秀章, 金本秀章, 장목면 부면장) 등이 있다.

1944년 1월 6일 거제 둔덕면 기관단체와 면협의회 의원, 교육기관, 면사무소직원 등이 나서 "적, 격멸의 결의를 높이자!"라고 신문광고를 통해 친일 광기를 보였다. 주요 인물은 김홍관(金弘官, 金海弘官, 둔덕면협의회 의원), 배삼도(裵三道, 有原三道, 둔덕면장), 둔덕공립국민학교 학부형회, 대일본부인회 둔덕면지부, 둔덕면협의회 의원 전원이 참여했다.

1944년 1월 22일 탁동조(卓同朝, 光山卓一, 통영읍회 의원, 경남도회 의원, 통영 육군후원회 부회장, 통영상공회의소 부회두)는 "일억환평(歡 )의 날로"라는 문구로 신문광고를 냈다. 광고를 낸 사람들 중 통영지역 인물들로는 서재국(書在國, 大山在國), 김영수(金英守, 金本英守, 통영 한산면장), 김숙자(金淑子, 金本淑子, 권현망업자) 등이 있다.

▲ 이갑용은 징병과 학병제를 적극 옹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 전갑생
이와 같이 신문광고와 각종 강연회, 좌담회 등을 통해 일제가 동원한 인원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전후에 패망한 일본정부의 복원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육·해군 21만여 명과 군속을 합하여 모두 38만여 명을 동원하였고, 이 중에서 약 15만 명이 1953년까지 귀환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대부분 전쟁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은 우리의 아버지들, 알려진 지식인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까지 단죄되지 못한 그들의 죄값을 어떻게 청산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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