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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남문. 과거에는 이 성문 밑으로 차가 지나다녔다.
ⓒ 노시경
주지하듯이 한양의 북쪽을 지키던 곳이 북한산성이라면, 한양을 남에서 보호하던 산성이 남한산성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힘을 들여 오르던 이 남한산성은 이제 차를 가지고 올라갈 정도로 가까워졌다. 남한산성 남문까지 차로 달리는 무척 긴 도로는 과거 적군의 접근을 막던 험로였다.

널찍하게 닦인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산의 능선에 오른다. 과거에는 남문을 통해 차가 들어왔으나, 이제는 남문 아래로 뚫린 산성터널을 통해 차가 드나든다. 이렇듯 남한산성 유적은 올 때마다 조금씩 복원되어 가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

▲ 남한산성 남문 주변의 성벽. 성벽이 쌓인 모습을 잘 관찰할 수 있다.
ⓒ 노시경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밖으로 나가 보자. 이 남문 밖으로는 성남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남한산성의 성벽 모습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이 성벽은 옹성(甕城,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과 외성(外城, 성 밖에 겹으로 에워 싼 성)을 포함하여 무려 1만2355m에 이른다.

성벽은 자연석으로 막돌쌓기를 하였는데, 높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큰돌을 아래에 쌓고 작은 돌을 위로 쌓았으며, 성벽은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성벽의 높이는 3∼7m이다.

▲ 남한산성 암문. 비상식량과 척후병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 노시경
이 지화문 위를 오르면 길다란 성벽이 나타나고 시원스런 전망이 펼쳐진다. 남한산성에 자리잡은 주봉, 청량산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해발 497m이다. 그래서 남한산성 답사는 약간의 등산을 한 후에 능선을 오를 수 있고, 능선에서부터는 산책길과 같은 포근한 길이 이어진다.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남한산성에 자리잡은 16개 암문(暗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 중의 하나가 눈에 띈다. 수어장대 서남쪽에 자리잡은 제6암문이다. 이 곳에 보이는 암문은 문의 상부 석재가 평평한 평거식 암문이다.

이 암문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은밀하게 식량과 무기를 운반하거나 원군이나 척후병이 들락거렸기에 크기도 작고 문의 상부에 요란한 장식이라고는 없다.

암문의 안쪽에 쌓은 옹벽이나 흙은 유사시에 무너뜨려서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서, 암문은 기능적 측면에 충실하였던 문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제6암문은 성인 1명이 지나가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 남한산성 서쪽 성벽. 여장 가운데에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만들어져 있다.
ⓒ 노시경
이 성의 역사는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된다. 조선 행궁(行宮) 터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이 산성에 처음 거주한 이들은 한성백제인이었다. 남한산성 내에서 서기 2∼3세기 대의 백제토기 조각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고, 2002년에는 한성백제시대 구덩이 유구 및 불을 피웠던 화덕 터도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 남한산성 북쪽 성벽에서 본 성의 동쪽은 첩첩산중이다.
ⓒ 노시경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 이 성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신라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 겉모양을 만든 후 아직 무른 겉면에 무늬를 찍어 만든 토기)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곳에 성벽을 쌓은 역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672년(문무왕 12년) 기록에 의하면, "한산주의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였다"고 되어 있다.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의 산 이름 중에 낮이 길다는 뜻의 일장산(日長山)이 있는데, '주장'과 '일장'은 그 뜻이 같으므로, 이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의 주장성임을 알 수 있다.

▲ 남한산성 동쪽 성벽. 산의 능선을 따라 산성이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 노시경
주장성을 쌓을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통일신라는 한반도를 삼키려던 당나라로부터 한강 유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 산성을 쌓았던 것이다.

당시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은 신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 대군을 맞아 석문(石門) 전투를 벌였으나 그만 패하고 후퇴하게 된다. 이때에 신라가 한산주(漢山州)에 쌓은 북방의 요새가 주장성이다.

이 주장성은 통일신라가 쌓은 성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으며, 신라의 왕경에 자리잡은 남산성보다도 훨씬 큰 대성이었다. 주장성의 크기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현재의 성벽에서 옹성과 외성을 제외한 성의 둘레와 거의 일치하니, 그 당시에 얼마나 거대한 성을 축조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남한지(南漢誌)>에 의하면, 인조 대에 남한산성을 축성하면서,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 중에 '옛 터'는 바로 신라의 주장성 터를 말한다.

▲ 남한산성 성벽에는 잡초와 덩굴이 우거져 있다.
ⓒ 노시경
성내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으로 미루어, 이 남한산성은 고려 시대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광주부사였던 이세화(李世華)의 묘지명(墓地銘)에 의하면, "1231년 몽골 병사의 1차 침입 때에 광주군민들은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몽골군의 공격을 방어하였고, 1232년 2차 침입 때에도 살례탑(撒禮搭)이 이끄는 몽골군의 주력부대가 광주성을 공격해왔으나 이세화가 물리쳤다"는 내용과 "남방의 요충지인 광주성에서 몽골군의 침입 시에 밤낮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1361년(공민왕 10년)에 홍건적 10만 명이 개경을 함락시키자 공민왕의 파천 수레가 광주에 머무르게 되는데,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갔다는 내용이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남한산성은 몽골군과의 격전을 치렀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 연주봉 옹성 암문. 연주봉 옹성을 드나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암문이다.
ⓒ 노시경
이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의 인조 대이다.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마저 겪게 되자, 인조가 대대적으로 개수한 것이 오늘날의 남한산성이다. 이 당시에 연주봉 옹성 등을 포함하여, 남한산성의 옹성과 외성이 본 모습을 갖추었다.

▲ 연주봉 옹성. 본성 바깥의 연주봉에 만든 옹성이다.
ⓒ 노시경
그러나 튼튼하게 수축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에 인조의 피난처로서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전을 지켜보는 곳이 된다. 이 아름다운 포물선의 한적한 산성에서 일어났던 패전의 역사! 이 치욕의 패전은 정녕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한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우리 선조들은 결국 이 패전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반도 안에 갇혀서 패기를 잃어버리고 문약했기 때문이다. 정녕 이 패전을 보기 좋게 되갚을 수는 없었는가?

▲ 남한산성에서 바라보면 서울이 한눈에 펼쳐진다.
ⓒ 노시경
남한산성의 성벽에서 보면 서울의 강남과 하남시 일대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저 북으로 이어진 평야를 따라 한족, 몽골족, 만주족은 그렇게도 끊임없이 이 남한산성을 흔들었다. 그 공격을 묵묵히 견디어 온 남한산성. 역사를 알고 이 성을 보면, 우리 민족의 유구한 방어막에 따뜻한 애정이 느껴진다. 누가 이 남한산성에서 치욕의 역사만이 보인다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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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