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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근처의 시베리아에서 인도까지 7천 킬로미터를 걸어 자유를 쟁취한 이 책의 주인공 "슬라보미르 라비치"에 관한 스토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폴란드가 처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독일과 소련이란 유럽의 초강대국들이 제국 건설을 지향하면서 그 첫 대상국을 폴란드로 정하고 나눠먹기를 한 과정과 독립 폴란드를 말살시키려는 정책에 관해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제국주의의 야수성은 소련의 정보국(NKVD)과 나치독일의 게쉬타포에 의해 상호 협력하면서 극명하게 드러냈다...<필자 주>


독일과 소련, 폴란드 살육경쟁

독일과 소련이란 유럽대륙에서 제국주의를 지향한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폴란드 역사는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 폴란드는 18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분할 점령당한 채(1795-1918) 유럽지도에서 사라지고 없던 상태였다.

1918년 독립한 폴란드는 제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왕성한 경제 발전을 했다. 독일은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비밀리에 체결한 후 9월 1일 미명을 기해 폴란드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3천대의 탱크와 1600대의 항공기를 가진 11개의 탱크 및 기계화 사단을 포함한 62개 사단(150만 지상군)을 폴란드에 투입, 번개작전(Blitzkrieg)을 전개했다. 폴란드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얼마 버티지 못하고 1주일만에 와르소가 포위되고 말았다.

소련은 9월 17일 독일과의 양해 사항에 따라 동부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협공을 당한 것이다. 동.서 양쪽에서 초강대국을 적으로 맞이한 폴란드는 9월 28일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2차 세계대전은 폴란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와르소에 주재한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는 40년 뒤인 1979년 9월 1일 영국 BBC 방송에서 "가을의 상처(Scar of Autumn)"란 제목으로 폴란드가 겪은 참상을 회고한 바 있다.

폴란드 정부요인들과 바르샤바 주재 외국기자들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독일군을 피해 동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는데 한참 가다보니 전면에 적이 나타나 처음에는 독일군에 포위된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련군이 반대편에서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양분하여 점령하기로 한 전쟁의 전모를 알게 된 것이다. 사실상 소련에 대해서는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손들고 말았다.

저자 라비치를 포함한 많은 폴란드 사람들은 독일보다는 소련이 우호적이려니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었다. 이 책을 통해서나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나 그것이 얼마나 막연하고 어리석은 기대였는지를 스탈린은 여실히 증명시켜 주었다.

전쟁 초기 소련군에 포로로 붙잡힌 폴란드 장교단(전체의 절반 해당)과 지식인 2만5700명은 1940년 3월 스탈린의 명령으로 러시아의 스모렌스크에서 멀지 않은 "카친 숲(Katyn Forest)"에서 학살당했다. 독립 폴란드의 싹을 아예 제거해 버리려는 것이었다. 역대 소련 정권은 나치의 소행이라고 학살책임을 떠 넘겼지만 1989년 고르바쵸프는 소련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사과했다.

스탈린의 만행은 지도층 학살로 끝나지 않고 1939년과 1941년 사이 170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 국민들을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수용소로 끌고 갔다. 여기에는 15만 명의 노인, 56만 명의 여성, 13만8천명의 어린이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 천 킬로미터를 가축 수송용 기차에 실어 갔는데 한 기차는 60량이 연결되고 한 차량 속에는 통상 60명이 명태짝 세워놓듯 싣고 가면서 대소변을 서서 보게 했다. 중간에서 죽는 자는 가차없이 기차길 옆에 버려졌다. 이 책의 저자인 '슬라보미르 라비치'는 기병중위로서 이 때의 실상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소련의 폴란드 독립세력을 제거하려는 계획은 전쟁 초기의 대학살로 끝나지 않았다. 실제로 1944년 8월 1일부터 63일간 나치 치하의 폴란드 파르티잔들과 일반시민들은 바르샤바의 바스와강 건너편까지 진격한 소련 붉은 군대의 지원을 기대하고 봉기했으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오히려 영국과 미국의 공중 지원을 방해함으로써 2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실패로 끝난 적이 있다.

당시 바르샤바 중심부의 85%가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1945년 소련군은 바스와강을 도강하여 나치군을 내쫓았다. 독일군이 자유주의적인 폴란드인들을 몰살시킬 때까지 철저히 방관한 것이다. 나치와의 전투에서 파르티잔 1만6천-1만8천명이 전사함으로써 폴란드 내에는 소련의 지배에 반대할 세력이 살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히틀러, 수용소 아이디어 소련에서 배워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Gulag)"는 20세기에 인류가 겪은 최대 죄악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라비치를 포함한 폴란드인들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수 백만 명의 소련인들이 수용된 것이다. 당초 레닌이 고안한 것을 스탈린이 확대 발전시켰다.

최근 앤느 아플바움(Anne Applebaum)은 소련 강제노동수용소에 관한 역사책을 펴냈다. 이 저자에 의하면 히틀러는 정치범 수용소 아이디어를 소련의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배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양 수용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 가 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왜 서방의 일반 여론은 나치 수용소는 그토록 혐오하면서 소련의 수용소에 대해서는 무관심할까 하는데 의문을 가졌다. 이런 의문 때문에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개의 수용소제도는 결과적으로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했다는 데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원과 목적, 운영방법은 많은 점이 다르다.

최초의 소련 수용소는 백해(White Sea)의 섬들에 있었던 이전의 솔로브스키 수도원에 설치된 것으로서 공산당의 적들을 격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수용자들은 점차 벌목작업을 하고 도로를 닦는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그런 다음, 소련이 1920년대 말 산업화의 압축 성장계획에 착수하면서 계획입안자들은 일반 근로자들이 거주할 수 없는 원격지를 개발하는데 이들 강제 노동자들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계획경제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유럽 쪽 북극에 있는 코미 공화국 내 보르쿠타 석탄광이 개발되었다. 극동에서는 달스트로이 수용소 단지가 코리마 지역(프랑스 크기의 6배)의 금과 백금광을 개발했다.

소련 문서보관소에 의하면 스탈린과 정치국은 양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특히 달스트로이 금광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산업화를 추진하기 위해 서방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투입, 산출, 이익에 관한 회계사 의 보고만 논의했지 노동자의 근무여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30년대 말까지는 수용자들은 인민의 적으로 낙인이 찍혔었기 때문에 노동력은 무시될 수 있었다. 수용자들은 동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었으며 그들은 소모품이었다. 나치 독일에서와 같이 대량 학살이 목적은 아니었으나 체포된 자들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운 데다 강제적인 산업화 명령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인간적인 작업여건을 부과했던 것이다.

조기 석방 전망이 없는 수형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은 열심히 일하는 자들을 잘 먹이는 것이었다. 목표 달성을 못하는 자들은 배급을 삭감하고 영양부족으로 약골이 된 사람들은 작업성적이 뒤떨어지게 되고, 그 결과 발생한 악순환은 사실상의 사형선고였다.

이때 소련지도자들은 아무리 인구가 많다하더라도 인력자원을 그렇게 소모하는 것은 손해라는 것을 인식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 두목인 베리아가 강제노동수용소 제국을 책임진 1939년부터 수용자들은 음식과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았다. 인간적인 대접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건강한 노동자가 병든 노동자들 보다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감시병들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지독하게 무자비했으며, 특히 가축수송용 화물차와 극동의 수송선에서 그랬다. 그들의 행동은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그들 모두가 사디스트들은 아니었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일부는 전과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KGB의 전신인 NKVD의 졸병들이었으며 생활여건이 수용자들 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었다. 그들은 수용자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할 필요가 없다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잔악 행위를 거침없이 저질렀다.

25년 징역형 받고 복역 중 탈출

1939년 11월 19일 25살의 젊은 기병장교였던 슬라보미르 라비츠는 소련 국경 근처의 폴란드 촌락인 핀스크 근처에서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결혼한지 수주일 밖에 되지 않았다. 스파이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 악명 높은 루비얀스카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런 혐의를 받은 이유는 폴란드-러시아 국경에 거주하면서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는 장교라는 점이었다. 1년 동안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거짓 자백하기를 거부했다. 결국은 약물투입을 받고 소련당국은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 스파이로 기소되었다.

그 결과 시베리아에서 25년 동안 강제노동형을 언도 받았다. 그런 죄명이라면 보통은 처형되었을 것이다. 소련당국자들의 손아귀에서 받은 온갖 악형 덕분에 생명은 건졌는지도 모른다.

그가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303캠프)로 유배되는 과정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 소름이 끼친다. 가축 수송용 무개 화물차에 실려 한 칸에 60여명이 빼곡하게 세워져 대소변도 서서 보면서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수 천 킬로미터를 가는데 몇 주가 걸렸다.

기차 수송은 이르쿠츠크에서 끝나고 거기서부터 야쿠츠크까지 수백 킬로미터는 트럭과 연결된 쇠줄에 매여 행진을 했다. 끌려가다가 누군가 오늘밤이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니까 5천명의 사나이들이 눈 내리는 시베리아의 황야에서 장엄하게 부른 <고요한 밤, 거룩한 밤>과 <그리스도의 자장가> 대합창은 베르디 오페라 나부꼬에서 나오는 <히부리 노예들의 합창>을 연상시킨다.

캠프에 도달하여 수용자들은 시베리아의 엄동설한에 살아남기 위하여 스스로 보호막을 쳤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저자를 포함하여 수 백만 명의 동구, 특히 폴란드인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겪은 이야기들과 별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카르로 스타이너'란 오스트리아 출생의 구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은 1932년부터 소련에서 코민테른의 출판사 부장으로 4년간 일하다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소련전복을 위해 나치와 협력한 죄목으로 기소되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20년간을 보냈다. 1956년 유고의 티토가 후루시초프 소련 당 서기장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겨우 풀려난 적이 있다(그는 80년대 말 그의 유배생활을 "시베리아에서의 7천일"이라는 책자로 발간했다).

시베리아에서 강제노역으로 목숨을 이어가느니 보다 탈출해 보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먼 꿈이었다. 수용소를 빠져나가는 일도 불가능하지만 광대한 시베리아 벌판을 어떻게 빠져나가 자유의 품안에 안긴단 말인가.

이들은 생활할 수 있는 수용소 시설을 스스로 짓고 나서는 그런 대로 적응해 나갔다. 그렇지만 라비츠는 탈출에 대한 열망을 거둘 수가 없었으며 6명의 동료들을 규합했다. 주의 깊고 은밀하게 탈출을 추진했다. 탈출을 위한 의복과 신발을 만들고 식료품을 저장했다. 다행스런 것은 라디오 수리과정에서 친밀하게 된 수용소 소장 부인의 호의와 그녀가 적극적으로 자유를 찾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 힘이 되었다.

1941년 4월 어느 눈보라가 치는 밤을 틈타 그들은 탈출을 결행했다. 첫날밤과 그 이튿날 아침 가능한 한 멀리 쉬지 않고 도망쳤다. 눈보라 덕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으며, 탈출로를 추적자들이 상상할 수 없도록 남행 길을 택했다. 따라서 추적자를 따돌리고 안전하게 남쪽으로, 남쪽으로 길을 재촉했다.

탈출 초기에는 하루 50여 킬로미터를 걸었다. 나중에는 기아선상을 헤매고 가는 길과 일기가 험난하여 그 속도를 늦췄다. 바이칼 호수를 지나면서 일기는 나아졌지만 걸어가야 하는 대지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 몽고로 들어가면서 소련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를 찾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극복해야 될 수많은 위험이 가로놓여 있었다. 기아에 허덕이고 고비사막에서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몇 일씩 지내면서 도중에서 합류한 17세 소녀 크리스티나가 희생되었다. 그 처연한 모습은 책을 읽고 나서도 가슴을 짓누른다.

고비사막에서는 동료 한 사람이 또 쓰러졌다. 사막에서는 뱀을 잡아먹고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으면서 한 사람이 더 희생된다. 인도에 도착하여 자유를 찾을 때까지 이들이 걸어온 길은 물경 7천 킬로미터에 달한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성취한 기적은 제도화 된 국가 폭력에 대처, 강인한 인간정신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자유는 산소와 같아서 그것을 잃고 산다는 것은 산송장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새삼 실감할 수 있다.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그 동료들은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고 니힐리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김성칠 교수의 <역사 앞에서>에 인용된 어느 폴란드 시인의 글이다.

"우리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지니지 않아도 좋은 많은 상념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얼어붙은 눈물

슬라보미르 라비치 지음, 박민규 옮김, 지호(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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