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참담하다. 손발이 떨린다. 몇시간 전만 해도 서울유세장에서 노무현 후보와 함께 지지를 역설하던 정몽준 의원이 투표일을 앞두고 돌연 '노무현 후보 지지철회'를 발표했대서 그런 게 아니다. 정치인들이란 본디 그처럼 가볍고 가변적인 존재 아니던가. 내가 참담하다고 말한 것은, 내 손발을 이처럼 분노로 떨게 만든 것은 정 의원의 돌변과 함께 180도로 바뀐 한 신문지, 바로 조선일보의 간사한 태도 때문이다.

▲ (2002년 12월 18일 초저녁에 올려진 사설)
16대 대선을 맞이하여 조선일보는 18일 초저녁 「나라의 命運 결정짓는 날」이라는 사설을 올렸다. "이번 대선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내가 오늘 찍으려고 하는 후보가 당선될 경우 어떤 세상이 열리게 될지를" 생각하면서 "누가 우리나라를 밝은 미래로 이끌고 갈 인물인지, 누가 우리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줄 사람인지 최대한 균형잡힌 시각으로 한 번 더 살펴보"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뒷날 후회도 하지 않을 소중한 한표의 권리를 행사하자"는 원론적인 얘기가 담긴....

그러나 정 의원의 '노 후보 지지철회 선언' 이후 조선일보는 긴급히 사설 한편을 따로 작성했다.(19일 새벽 1시 8분) 조선일보가 새롭게 마련한 사설의 제목은 「鄭夢準, 노무현을 버렸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선거운동 마감 하루 전까지 공동 유세를 펼치다가, 투표를 10시간 앞둔 상황에서 정씨가 후보 단일화를 철회"함으로써 "대선 정국은 180도 뒤집어졌다"면서, 노.정 후보단일화를 "16대 대통령 선거의 코미디 대상(大賞)"이라고 조소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20일 동안 모든 유세와 TV토론, 숱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졸인 판세 및 지지도 변화 등 모든 상황은 노·정 후보 단일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이같은 기본 구도가 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판단 기준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뒤집"고,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급작스러운 변화의 뜻을 슬기롭게 읽어내" 투표하라고 주장했다.

▲ (2002년 12월 19일 새벽에 급조한 사설)
나는 앞서 '주장했다'고 썼다. 그러나 바르게 교정해야 겠다. 이것은 선동이다. 노골적인 선거운동이다.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다. 불법.탈법의 극치다. 후보단일화 이후 지속돼 온 노무현 우위를 무시하고 판단기준을 처음부터 다시 뒤집으라니? 정몽준씨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한 말뜻을 헤아려 슬기롭게 투표하라니? 그럴 양이면 왜 처음부터 아예 까놓고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조선일보는 본래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한다'는 신문지 아닌가?

역시 조선일보다. 노무현 후보의 우세가 지속될 때만 해도 "나라의 命運 결정짓는 날"이란 사설을 올려 놓았다가 정 의원의 지지철회로 판세가 변할 것 같자 대뜸 "鄭夢準, 노무현을 버렸다"로 간판을 바꿔다는 그 기민함이라니~! 상황에 따라 표변하는 변신과 둔갑술에서 뉘 감히 조선일보를 따를 수 있으랴.

각설하고, 「鄭夢準, 노무현을 버렸다」는 사설은 조선일보의 본색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조선일보가 그동안 입에 달고 다녔던 '공정성'이란 단어며, 본사에 붙어 있는 '불편부당'이란 사시가 얼마나 가증스런 거짓말인지, 조선일보가 '언론의 정도를 걷겠노라'고 다짐한 말들이 얼마나 사기였는지가 이번 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조선일보가 이런 짓을 하고도 감히 '언론'이란 이름을 차용할 수 있을까 보냐.

나는 「鄭夢準, 노무현을 버렸다」는 사설(邪舌)을 고이 간직하련다. 법을 위반한 조선일보의 행태를 고발하기 위해서. 언론을 욕보인 조선일보의 편향을 고발하기 위해서. 강자에게 빌붙어 곡필을 일삼는 조선일보의 처세술을 고발하기 위해서.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는 조선일보의 간교함을 고발하기 위해서. 정몽준 의원의 '지지철회' 선언과 더불어 조선일보가 있던 사설마저 떼어내고 느닷없이 새로운 사설로 교체한 2002년 12월 19일의 소동은 한국 언론사에 욕된 모습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이 글을 쓴다.

[사설] 鄭夢準, 노무현을 버렸다(2002.12.19, a.m.01:08)

16대 대통령 선거의 코미디 대상(大賞)은 단연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다. 선거 운동 시작 직전, 동서고금을 통해 유래가 없는 여론조사로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선거운동 마감 하루 전까지 공동 유세를 펼치다가, 투표를 10시간 앞둔 상황에서 정씨가 후보 단일화를 철회했다. 이로써 대선 정국은 180도 뒤집어졌다.

이런 느닷없는 상황 변화 앞에 유권자들은 의아한 심정이지만, 따지고 보면 ‘노·정 후보 단일화’는 처음부터 성립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북한 문제와 한·미관계를 보는 시각부터, 지금의 경제상황과 사회적 문제를 보는 눈이 기본적으로 다른 두 후보가 단지 여론조사에서 우세한 사람을 단일후보로 뽑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設)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투표 직전이긴 하지만, 정씨가 노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결국 이런 근본적 차이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희극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급격한 상황 변화 앞에서 우리 유권자들의 선택은 자명하다. 지금까지의 판단 기준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뒤집는 것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20일 동안 모든 유세와 TV토론, 숱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졸인 판세 및 지지도 변화 등 모든 상황은 노·정 후보 단일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이 같은 기본 구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전국의 유권자들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며 투표소로 향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고 유세를 함께 다니면서 노무현 후보의 손을 들어줬던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급작스러운 변화의 뜻을 슬기롭게 읽어내야 하는 일이다.

덧붙이는 글 | 하니리포터에도 송고한 기사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