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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 4인의 '색깔'은 저마다 다르다. 대선후보의 '색깔'을 주제별로 알아보는 '연속기획 - 4인4색'. 책(1회)과 술(2회)에 이어 세번째는 가문이다. <편집자 주>

이회창 후보 : 전주 이씨 종친회 표는 떼어놓은 당상?

이회창 후보는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후손이다. 특히 화려한 이 후보의 집안은 다른 후보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이 후보의 가계(家系)는 조선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같은 전주이씨다. 고려 때 숙위시(宿尉寺) 주부(主簿)를 지낸 23대조 이영습(李英襲·주부공파 파조)때 이성계 집안과 갈라졌다. 이영습은 이태조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 4형제 중 셋째.

16대조인 소생(紹生)은 단종 때 사헌부 집의로 있던 청백리였다. 소생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벼슬을 버리고 충남 예산군 대흥면 우정촌(지금의 교촌리)에 은거했다. 훗날 성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소생은 이를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여생을 마쳤다. 일제시대 검찰 서기를 거쳐 해방 후에 검사를 지낸 이홍규(97·이 후보의 부친)옹이 소생의 후손.

전주이씨 종친회 자체 집계에 따르면 전주이씨는 해외교포를 포함해 종원 500만명을 자랑하는 거대 씨족으로 대선 유권자만 170만∼180만명에 이른다. 전주이씨는 종묘대제·사직대제 등 문화재급 종친행사도 많아 이 후보에게는 유리한 홍보 수단인 셈이다.

다른 후보들이 뒤늦게 종친 조직을 챙기기 시작한 반면 이 후보는 이미 97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부터 종친표를 다졌다. 부인 한인옥씨도 지난 5년 동안 종친 행사만은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이 후보는 생일이었던 지난 6월 2일에도 잔칫상을 제쳐둔 채 종친 행사인 종묘대제에 참석하는 열의를 보였다.

이 후보는 종친회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고문도 맡고 있다. 당내에서는 5년째 종약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환의씨가 책임자다. 이환의씨는 각 시·도에 있는 종친회 지부와 분원을 대상으로 이 후보의 지지를 부탁하고 있다.

지난 97년 대선 때 전주이씨 종친회는 고민에 빠졌다. 이 후보와 함께 이인제 의원이 출마했기 때문. 이 후보와 이인제 의원은 지난해까지도 종친회 행사에 나란히 참석해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초 이인제 의원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낙마하면서 종친회의 고민은 해결됐다.

이 후보가 종친표 결집을 기대하는 만큼 그에 따르는 잡음도 적지 않다. 이 후보는 2000년 8월 2000여명의 종친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수련회에서 "전주이씨 가문은 이미 나라를 세워 500년간 경영해 온 경험을 갖고 있다"며 "전주이씨 문중이 다시 국가와 나라를 세우는 데 주춧돌이 되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후보의 발언은 지역갈등도 모자라 씨족갈등까지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은 논평을 통해 "이 총재의 혈연주의 조장 발언은 봉건시대적 사고방식" "왕조부활을 꿈꾸는 발언"이라고 공격했다.

이 후보의 가문은 올해 들어 하순봉 의원의 발언으로 다시 한 번 구설수에 올랐다. 하 의원은 <주간한국>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우리나라도 명문학교를 나온 좋은 가문 출신의, 훌륭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일당독재의 특권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발상으로 이회창 후보의 특권층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 / 최경준 기자 235jun@ohmynews.com


노무현 후보 : "유명한 사람 없나..."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보통 가문

"우리집 가문에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문에 대해 설명을 해달라'는 질문에 노무현 후보의 형 건평씨가 한 대답이다. 건평씨의 말처럼 노 후보의 가계는 그야말로 '보통사람들'이다. 집안에 유명한 판·검사도 없고, 돈이 아주 많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다.

노 후보는 광주(光州) 노(盧)씨 31대손이다. 전국에 9개의 본관을 가진 노씨는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범양 출신으로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내다가 안녹산의 난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신라로 이주한 노수(盧穗)를 시조로 삼고 있다. 노수는 신라로 올 때 아홉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이 각각 맏아들은 광주, 둘째는 교하, 셋째는 풍천 등에 정착하며 현재 노씨의 9개 본관을 이룬다.

14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교하(交河) 노씨이니 굳이 따지자면 노 후보와 노 전 대통령은 아주 먼 친척 사이가 되는 셈. 노 전 대통령 때 국무총리를 지냈던 노재봉씨는 광주 노씨다. 하지만 성씨만 같을 뿐 촌수를 세기도 힘들 만큼 멀기만 하다..

노씨는 9개 본관을 모두 합해 약 30만명으로 추산되며, 36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노씨중앙종친회는 지난 87년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 사는, 노 후보에게 아저씨뻘 되는 노재수씨는 '가문의 자랑'에 대해 묻자 무려 2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노 후보 9대조의 부인(전주 최씨)이, 당시 암행어사 박문수가 임금에게 추천해서 열녀비를 받았는데 아직도 마을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때가 1729년이다.

이처럼 가문의 자랑거리를 찾아 273년을 거슬러 올라갈 만큼 노 후보의 가계는 내로라 할 명망가가 드문 서민의 집안이다. 사실 노 후보가 거의 독보적으로 '노씨 가문의 영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 후보의 부모님은 매우 가난했다. 노재수씨는 "노 후보는 부친 때 굉장히 못살았다"면서 "근근이 끼니를 때웠다"고 전했다. 노 후보의 아버지인 노판석(76년 작고)씨는 일제 말기 객지에서 돈을 벌기도 했지만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다 날렸다고 한다.

부산대 법대를 졸업한 큰형 영현씨(73년 작고)는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못했고, 둘째형 건평씨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10여년간 세무공무원을 한 뒤 지금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두 언니인 명자·영옥씨는 일제시대 소학교만 나와 일찍 시집갔다.

안동(安東) 권(權)씨인 부인 권양숙씨의 집안도 지극히 평범하다. 다만 면서기를 지낸 노 후보의 장인은 친구들과 막걸리에 메틸 알코올을 섞어 마시다가 실명을 했고, 한국전쟁 때 부역한 혐의로 장기 복역 도중 71년 옥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올 초 국민경선 당시 경쟁자였던 이인제 후보가 이 부분을 지적하며 색깔론으로 공격하자 노 후보는 오히려 이렇게 대응함으로써 '노풍연가(盧風戀歌)'를 유행시켰다.

"이런 아내를 버려야겠습니까! 그러면 대통령 자격이 생깁니까!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심판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면,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 / 이병한 기자 han@ohmynews.com


정몽준 후보 : 대선 1년 전마다 연합종친회 결성

정몽준 의원은 하동(河童) 정씨 후손이다. 현재 전국의 정씨는 '전국 정씨연합회'에 결집해 있는데 인구는 대략 350만명에 이른다.

서울 강남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전국 정씨연합회는 연합종친회다. 정씨연합회는 출범 때부터 정치색을 띠었다. 초대 총재를 지낸 고(故) 정주영 회장이 92년 대선을 1년 앞둔 91년에 전국의 정씨 종친회를 모아 연합회를 조직한 것. 정 회장은 92년 국민당을 창당하고 대권에 도전했다. 결국 정씨연합회는 '씨족표'를 결집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 정 회장이 대권 도전에 실패하자 정씨연합회도 유명무실해졌다.

그런데 정씨연합회는 조직을 추스려 지난 2001년 10월 다시 결성됐다. 공교롭게도 정몽준 의원이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하기 1년 전이다. 이번에는 5공의 핵심인물이었던 정호용 전 의원이 총재직을 맡아 정 의원을 돕고 있다. 정 전 의원은 정 의원의 요청으로 정씨연합회 총재직을 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연합회에는 여러 명의 부총재가 있는데 정 의원과 정대철 민주당 의원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정씨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부총재직을 맡고 계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정리됐는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정씨는 많게는 247본에서 적게는 35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28개의 본관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정씨 시조는 신라(삼한시대 진한 사로국) 6촌 중 하나인 취산 진지촌의 촌장인 '지백호(智白虎)'다. 촌의 명칭이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본피부로 바뀌면서 정씨 성을 하사 받아 모든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경주 정씨가 정씨의 종통(宗統). 고려시대 충신 정몽주(연일 정씨)와 무신정변을 주도한 정중부(해주 정씨), '정과정곡'을 지은 시객(詩客) 정서(동래 정씨), 그리고 조선시대 개국공신인 정도전(봉화 정씨), 양명학파의 거두 정제두(연일 정씨) 등이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들.

정 의원이 속해 있는 하동 정씨는 고려시대 정도정과 정응, 정손위를 각각 시조로 하는 3개의 계통으로 나뉜다. 1985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총 3만3864가구 14만2428명이 남한에 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세종 12년(1430년)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와 집현적 학사로 한글 창제에 참여한 정인지 등이 있다.

정씨 집안의 가양주(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전통주)로는 구기자주(청양)와 솔송주(함양)가 전해온다. 구기자주는 충남 청양군 운곡면 광암리의 하동 정씨 가문에서 6대째 전해오는 전통가양주로 지난 2000년 충남 도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리고 솔송주는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문헌공파 종가에서 전해지는 전통주다.

정 의원의 부인인 김영명 여사는 본관이 언양(彦陽)이다. 신라왕족인 언양 김씨는 김알지의 28세손인 경순왕의 일곱 번째 아들 김선을 시조로 한다. 김선의 7세손인 고려시대 병부판사 김취려가 반란 평정 등의 공을 세워 언양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언양으로 삼았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천일 등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인물들이다. ◑ / 구영식 기자 ysku@ohmynews.com


권영길 후보 : 아버지는 빨치산, 장인은 기업가

권영길 후보는 TV토론에 출연해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권우현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 시대의 불행한 과거였다고 생각합니다."

경남 산청이 고향인 아버지 권우현은 그 지역에서 신망 높은 인물이었다. 일본으로 밀항했던 아버지 권우현씨는 해방과 동시에 다시 고향 땅을 밟았다. 고향 땅은 권영길 후보의 할아버지인 권양호씨가 지키고 있었다. 할어버지 권양호씨는 대농(大農)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점점 가세가 기울어 아버지 권우현씨는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다.

집안이 특별히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권우현씨는 마을 유지들과 동네에 학교를 세울 만큼 지역에서 영향력이 막강했다. 농사를 지으며 사는 농군이었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았고 친화력이 높았다.

그러나 아버지 권우현씨가 빨치산이 되기 위해 집을 나선 이후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져 갔다. 당시 39세였던 아버지 권우현씨는 빨치산 소탕 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던 1954년 싸늘한 주검이 돼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후 장남 권영길은 부산에 살고 있는 작은 아버지 권태현씨 집에서 자랐다. 가세는 기울었지만 장손에게 지게 작대기를 드는 농사일을 시킬 수는 없었다. 기울어진 집안 형편 때문에 권영길은 여동생인 영순·정순씨와 고생하면서 살아야 했다.

큰딸인 영순씨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막내 동생인 정순씨는 초등학교만 겨우 마칠 정도였다. 지금이야 모두 출가해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그 시대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장남의 성공을 위해 여동생들은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권영길의 집안은 아주 오랫동안 고통의 터널 속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권영길 집안 못지 않게 처가 쪽도 사연이 많다. 권 후보의 부인 강지연씨 아버지는 바로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의 창업주 강의수씨. 부인 강지연씨는 대기업 사장의 무남독녀였다. 장인어른인 강의수씨가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눕기 전까지 처가는 아주 풍족했다.

그러나 장인의 죽음 이후 집안은 급속하게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정확하게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모르지만 동방생명은 순식간에 삼성그룹으로 넘어가고 말았고, 부인 강지연씨와 장모는 회사 명의로 돼 있던 집과 자동차까지 빼앗겼다.

이런 두 집안의 내력 때문에 권영길 후보 가족들 가운데 특출한 인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른 후보들처럼 집안 형제들 힘을 동원해 사조직을 꾸릴 능력이 없다.

권 후보의 본관은 세도가들이 즐비했던 '안동 권씨'다. 얼마 전에는 안동권씨 문중회보에서 권 후보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정치인들은 문중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아직 유교적인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문중의 힘은 막강하다.

하지만 권 후보는 다른 후보들처럼 무조건 문중에 기댈 생각은 없다. 문중을 사조직화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다만 권 후보를 몰랐던 그들에게 민주노동당이 내세우는 정책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내 가장 든든한 '사조직'으로 조직하겠다는 계획은 있다. ◑ / 박수원 기자 won@ohmynews.com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주간 <오마이뉴스> 제24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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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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