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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은 16대 대통령 후보로 권영길 씨를 선출했다. 권영길 후보가 당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청명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9월 8일 민주노동당 대통령 선출대회가 진행되는 경희대 노천극장. 오후 4시가 되자 당원들이 하나둘 노천극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 손에는 모두 주황색 풍선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세상을 바꾸는 길, 자주적인 나라, 차별 없는 세상, 민주노동당이 앞장섭니다.'
주황색 풍선에 새겨진 이 문구에 2002년 대선을 향한 민주노동당들의 희망이 담겨있었다.

대회장 주변에서 민주노동당 대변인실 관계자들은 기자들에게 전화를 거느라 정신이 없었다.

"9월 9일 오전10시 여의도 당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진행합니다."

민주노동당 이상현 대변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가 9월 8일 발표한 선거관련법안이 화근이었다. 중앙선관위가 발표한 선거관련법안은 철저히 원내교섭단체를 위주로 한 내용이었다.

군소 후보 난립을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탁금 20억을 내걸었다. 1997년 대선 기탁금 5억원에 비해 무려 4배나 증가한 액수다. TV토론도 철저히 원내교섭단체 중심으로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중앙선관위가 내놓은 안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민주노동당은 당장 커다란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중앙선관위 사무실을 점거하든지, 아니면 국회에 드러눕는 한이 있더라도 이 법안은 막아야 합니다."
김배곤 부대변인은 민주노동당의 절박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20억 없으면 출마하지 말라?

▲ ⓒ 오마이뉴스 이종호
오후 5시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단독 출마한 권영길(61) 대표가 경희대 노천극장 맨 꼭대기로 올라갔다. 권영길 대표는 더운 날씨에다 긴장한 탓인지 연신 쏟아지는 땀을 닦아내리느라 손수건을 얼굴에 가져갔다.

'대선 투쟁∼ 짝짝∼짝짝, 승리하자∼짝짝∼짝짝'
'대통령은∼짝짝∼짝짝, 권∼영길∼짝짝∼짝짝'

사회자가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권영길을 소개하자 경희대 노천극장에 모인 2000여명의 민주노동당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권영길'을 연호했다.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선 이들은 오른팔을 높이 추켜들고 '동지가'를 불렀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보았다…."

권영길 대표도 오른손을 불끈 쥐고 당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보이면서 연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부유세신설 · 모병제 등 공약 제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의 공약은 그가 건설하겠다고 제시한 평등·복지·평화·통일 세상과 맞닿아 있다. 9월 8일 발표된 권영길 후보의 공약을 살펴보면 평등, 복지, 평화, 통일 네 가지 핵심 개념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 고민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우선 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부의 재분배를 강조했다. 빈부격차의 해소와 각종 사회복지를 확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10억원 이상의 자산 보유자들에게 부유세를 신설 부과하겠다고 약속했다. 봉급생활자와 영세상인들에게만 촘촘하게 적용되는 과세를 부유층에게 적절히 나눈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이와 함께 노동자의 60%에 육박하고 있는 비정규직 등 취약노동계층의 소득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키기 위해 헌법과 근로기준법이 정하고 있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연대임금제 정책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안을 제시했다.

한편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정전협정을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이 함께 참여하는 평화협정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지나친 군사력 경쟁을 막기 위한 군축의 일환으로 군사예산의 대폭 감축과 단계적으로 징집제도를 모병제로 전환하겠다는 방침도 수립했다. 무엇보다 남북의 화해·협력 증진을 위해 남북기본합의서와 6.15공동선언 이행을 기초로 남북간의 민족통일추진기구 구성을 추진하자고 제의했다.

이 밖에 복지공약은 △사회복지예산20% 수준으로 대폭 증액 △무상의료의 단계적 실험을 큰 틀로 삼아 전반적인 사회복지시스템을 강화하고 공공성 중심의 보건의료체계를 수립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교육제도 역시 무상의무교육 확대와 공교육 내실화를 통해 저소득층에까지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핵발전소 추가건설 중지 및 단계적 폐지, 근로조건 악화 없는 주5일제 전면 실시, 자주적인 WTO농업협상대응, 호주제 폐지 등 각각의 분야에 걸쳐 민주노동당이 기존에 내세웠던 정강정책을 바탕으로 공약을 만들어냈다. / 박수원 기자
총 당권자 1만 2877명 가운데 모두 8032명(투표율 62.8%)이 투표해 7297명(90.8%)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대표가 마침내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권영길 후보가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청중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사랑하는 당원동지 여러분! 저는 오늘 평등과 통일의 세상을 만들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를 민족과 역사 앞에서 엄숙히 수락합니다."

그러나 이어진 권영길 후보의 연설은 예정에 없던 내용이었다. "국민여러분과 당원 여러분께 특별연설을 하겠다"고 운을 뗀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50년간 이 나라를 지배한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 보수 정치를 청산할 정당입니다. 그런데 보수정치권은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축제일에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중앙선관위는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의 참여를 봉쇄하기 위해 원내교섭 단체 후보에게만 참여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선거 기탁금을 5억원에서 20억으로 조정했습니다. 저는 이 폭거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입법 저지를 위해 목숨 건 투쟁을 전개하겠습니다."

권영길 후보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국민들과 민주노동당원들에게 '앞으로 어떤 대통령이 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은 평등·복지·평화·통일의 세상입니다. 저는 평등사회를 만드는 대통령, 서민복지를 구현하는 대통령, 평화를 만드는 대통령, 통일을 준비하는 대통령, 신기술 시대를 여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 권영길은 재벌들, 부자들의 돈을 가져다가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부유세를 신설하겠으며, 봉급생활자, 영세상인들만 쥐어짜는 세금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겠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흘린 땀의 댓가가 땀흘린 사람에게 돌아가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차별공화국을 평등의 나라로 만들겠습니다."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이 끝나자 당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연설을 마친 권영길 후보는 노천극장을 돌며 당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학생 당원들 옆에 나란히 앉았다.

당원들 손에 쥔 주황색 풍선이 노천극장을 가득 메웠고, 각양각색의 플래카드가 대회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당신의 힘을 보여주세요', '미국에 NO할 수 있는 권영길'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 민주노동당 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권영길 후보와 부인 강지연 씨가 축하공연에서 '꽃다지'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최순영(48) 부대표는 권영길 후보의 수락연설이 끝나자 축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후보와는 아주 다릅니다. 따라서 이번 대선은 1997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동자, 서민이 우리나라 국민의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당원인 우리들이 대선 때 구슬을 꿰어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보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이날 노천강당에 모인 2000여명의 당원들은 이번 대선에서 기꺼이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은 6.13지방선거에서 국민들이 보내준 8.13%의 지지를 12월 대선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며 민주노동당 전도사로 나설 것을 약속했다.

2만 여명의 민주노동당원들은 이제 한 사람의 이웃을 더 만나기 위해 동네 골목골목을 다니며, 민주노동당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주인이 된다'는 신념을 부여잡고 세상을 바꾸는 길, 권영길 대통령 후보와 함께 그들의 첫 걸음이 시작됐다.

"재벌과 부자가 가져간 돈 서민들에게 나줘주겠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인터뷰

▲ 민주노동당 16대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권영길 씨.
ⓒ오마이뉴스 이종호
여유가 있었다. 긴장한 탓에 땀은 많이 흘렸지만 지난 97년 국민승리21 대통령 후보 권영길과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권영길은 달랐다. '재수생' 대통령 후보라서 그런지 30여분 가량 진행된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도 막힘이 없었다.

권영길 후보는 신중하다. 무슨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 심사숙고하는 편이다. 주변의 다양한 의견을 여러 각도로 경청해 최종적으로 일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권영길 대표가 결정된 9월 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는 12월 대선에 맞춰 대폭 개정된 선거관련법안을 발표했다. 이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권영길 후보는 대통령 선거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와 있다.

권영길 후보는 "중앙선관위는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축제일에 폭거를 저질렀다"면서, "국회입법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절박한 심정을 표현했다.

그를 만나 중앙선관위 결정에 대한 입장과 대통령 후보로서의 포부를 들어봤다.

- 중앙선관위가 오늘(8일) 발표한 선거관련법안에는 군소후보 난립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20억의 기탁금을 명시했다. 권영길 후보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조항인데.
"바로 저지투쟁에 돌입할 것이다. 이는 폭거다. 만약 우리가 요구하는 내용을 국회에서 외면된다면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 시민사회단체들과 광범위한 연대를 모색할 계획인가.
"물론이다. 시민사회단체들과의 연대 뿐 아니라 일반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겠다. 이번에 발표된 선거관련법안은 일반국민들 조차 상식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안이다. 국민들이 지지를 보내줄 것이라고 믿는다."

- 중앙선관위가 발표한 선거관련법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하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선거에 참여할 지 말아야 할 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사활을 건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국민승리21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5년 전과 비교해 어떤 점이 달라졌나.
"국민승리21 후보로 나섰을 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했고, 총선과 지자체 등 큰 선거를 치렀다. 국민들이 민주노동당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1997년과는 확실히 다르다."

- 대통령 선거에 임하는 출사표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재벌들과 부자들이 가져간 돈을 서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

- 당원들 가운데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투표율이 예상보다 낮았는데.
"아무래도 단독후보이다 보니 관심이 적었던 것 같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당원들의 의사를 수렴해 대선에 임할 생각이다."

- 지난 8월 21일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면서 유세를 진행했다. 전국투어를 하면서 느낀 점이 많이 있을 것 같다.
"전국을 돌며 유세를 하면서 국민들의 기대를 느낄 수 있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과 사표 심리를 방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 권영길 대표의 대통령 출마선언으로 진보진영 내부에 경선이 어렵게 됐다는 비판이 있다.
"지금 상황에서 경선이 진행될 수 있을지 여부를 점치기는 어렵다. 경선이 진행된다면 어떻게든 단일화를 이뤄낼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 사회당이나 녹색평화당과의 후보 단일화 문제는 어떻게 되나.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 결정된 만큼 통합 논의를 포함해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적극적으로 모색해 나가겠다."

- 사표 심리가 이번 대선에서도 발동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사표심리가 발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표가 의미 있는 표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굳어졌다고 본다."

- 이번 대선에서 얼마나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목표치가 얼마라고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번 대선은 2004년 총선을 준비하기 위한 당의 중심 부대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중심부대를 형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대선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 박수원 기자


▲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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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에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14년 10월부터 영국에 3년간 살다가 돌아와 오마이뉴스 정치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