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가... 울고 있었다

'나는 범'과 같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경찰에게서 카메라를, 몽둥이를, 무전기를 빼앗던 괴팍스런 그가 말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떨구었다.

굳은 땅이라도 꺼질듯한 긴 한숨...
한낮의 뙤약볕도 그의 한숨보다 덥진 않았으리.

ⓒ 오마이뉴스 노순택

주름진 두 눈에서 소리 없이 흘러나온 눈물에는 지난 세월 투쟁의 현장을 함께 지켰던 절친한 친구 '서 로베르또' 신부와의 이별인사가 끈끈하게 녹아 있었다.

그의 동생 문규현 신부도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눈물이었다. 2000년 8월 1일 명동성당 앞 들머리... 땡볕이었다.

문. 정. 현.

1966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사제서품을 받은 이래 그의 삶은 늘 낮은 곳을 향해 서 있었다. 감옥에 갇히고, 몽둥이로 얻어맞고, 차에서 떨어지는 등 갖은 고통을 겪으며 그의 육신은 쇠락해 갔지만, 방향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그가 저항자의 고난한 삶을 걷기 시작한 것은 유신의 칼날이 '민주'의 목을 깊숙이 찔러 숨조차 마음껏 내쉬기 어려울 때다.

갖은 고문과 조작 속에서 재판 하루만에 8명의 목숨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1975년 인혁당 사건. 독재의 검은 손아귀는 이들의 시신마저 내버려두질 않았다. 그 때, 온몸으로 이들의 시신을 지키고자 나섰던 이가 바로 문정현이다. 이 때 그는 크레인 위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손엔 지팡이가 쥐어져 있다.

그로부터 1년 뒤, 문 신부는 명동성당에서 '3.1 구국선언'에 참여한 대가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인번호 1003번'이 그의 이름이 됐다.(지금은 나라의 대표가 된 김대중 대통령도 이 사건으로 함께 옥살이를 했다.)

그가 당시 한 외국언론사와 가졌던 인터뷰는 그의 인생이 어떤 행로를 걸을 것인지를 예측케 한다.

"나는 사제입니다.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서는 데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미대사관 문앞 길바닥에 주저 앉은 문 신부, 쪽문으로 관계자가 나타나자 호통을 쳤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유신독재가 총성 속에 막을 내리고...

1980년대 후반에는 통일운동의 기운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가 빠졌을 리 없다. 문 신부는 국가보안법 철폐와 통일운동의 대열에 앞장섰다. 그러던 가운데 1988년 5월, 문 신부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찾아온다.
올 한 해 그는 매향리에 매화향기를 돌려주기 위해 땡볕을 마다 않았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문 신부가 전주 중앙성당에서 직접 영세했던 서울대생 조성만씨가 스물넷의 꽃다운 젊음을 뒤로 하고 '조국통일'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에서 할복투신한 것이다. 조성만 열사의 희생은 문 신부에게 잊지 못할 상처와 다짐으로 남았다.

1989년 여름에는 금단의 땅, 북한에 어린 학생 하나가 발을 내딛었다. 임수경이었다. 그는 통일의 소중한 씨앗이 될 지도 모를 이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성만 열사의 아픔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을 터이다.

그의 제안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상임위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됐고, 미국에서 공부 중이던 그의 동생 문규현 신부가 임수경을 보호하기 위해 비밀리에 평양으로 파견됐다.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1980년대의 격동기, 되돌아보면 그의 육신은 언제나 길바닥 위였다.

이런 그의 삶을 반증이라도 하는 것일까. 1990년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보안사 사찰카드에는 그에 대한 정보가 빼곡하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카드번호 169번 문정현. 전북지역 대표적 문제인물. 외고집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반항적이나 신도들로부터 존경받음. 저돌적 성격으로 '깡패신부'라 불리움. 1976. 12. 29 ∼ 1977. 12. 31 대통령 긴급조치위반. 불순구호 제창...."

그랬다. 그는... 깡패였다, 그것도 저돌적인 강패였다, 꼴통이었다.
'고상함'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다. 적어도 그에게서 주의 말씀은 교회에 있지 않았다. 깡패 속에, 쓰레기 속에, 꼴통 속에 있었다. 그는 십자가의 예수를 '저 낮고 추운 그늘'에서 찾고자 했다.


"젊은이들 말이 맞았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군사독재의 찬바람이 물러가고 1993년에 문민정부가 '거창하게' 출범했지만, 그는 "변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민초들의 삶은 여전히 암울했고, 국가보안법은 칼날을 휘둘렀으며, 통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이즈음 문 신부는 '주한미군'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사고와 근본적인 모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 땅의 낡고 썩은 모순에 맨몸으로 맞서 싸워온 그였으니, 그 길 한가운데서 '주한미군'이라는 괴물과 맞닥뜨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지금도 그는 고백한다.
"젊은이들의 말이 맞았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한 한반도에서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문 신부는 90년대를 꼬박 미군문제 해결에 바쳤다. 특히 주한미군으로 하여금 이 땅을 유린할 수 있도록 마당을 깔아준 '소파(SOFA, 한미주둔군지위협정)'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판단, 정면대결을 선포했다.

1998년에는 그의 옥중동지가 대통령에 올랐지만, 그는 권력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문 신부가 걷는 길은 여전히 험난한 가시밭이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1997년부터 '군산 미군기지 우리땅찾기 시민모임'을 이끌며 지금까지 거르지 않고 '금요집회'를 강행하는가 하면, '불공정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상임대표, '매향리 폭격장폐쇄 범국민대책위' 상임대표 등의 직책을 마다않고 전국을 누볐다.

특히 2000년의 대규모 저항운동으로 기록될 매향리폭격장 폐쇄투쟁의 선봉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저돌적인 '깡패정신'은 경찰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가 됐다.

급기야 9차 소파개정을 앞둔 올해 9월에는 미국 워싱턴과 뉴욕 등을 항의방문,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한미간 소파의 불평등을 미국시민에게 알리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가 겪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난해 8월 집회도중 미공군 제8전투비행단 소속 미군들에게 수갑 채워진 채 연행돼 조사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같은 해 군산해고노동자 복직을 위한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협심증을 얻었다.

얼마 전부터 문 신부는 협심증과 경추 디스크로 고생하고 있다. 경찰이 강하게 압박해 오면 맥없이 쓰러질 정도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깡패같은 괴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그는 예순한 살의 노인.
연일 집회 참석으로 인한 육신의 혹사는 그에게 고스란이 고통으로 다가왔다. 얼마 전부터 왼쪽어깨와 팔이 심하게 아파오는가 싶어 병원을 찾았다가 '경추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절대안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칫 무리하면 전신마비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2000년... 12월의 바람이 매섭던 어느날

그를 만났다. 그는 미대사관 옆 길가에 놓인 쓰레기차 위에 올라가 있었다. 경찰은 그의 바지가랑이를 잡아끄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예의 그 일갈 호통이 이어졌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예끼, 이 놈 새끼들아. 내가 너희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 줄 알어. 예이 나쁜 놈들아.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렇게 꽁꽁 에워싸는 거냐, 이놈아. US Troops! Out of Korea! US Troops! Out of Korea!"

그가 나타나면 경찰들은 수군거린다

"깡패신부가 나타났다"고.
그가 나타나면 경찰은 오중십중으로 그와 동료들을 에워싸고 '고착작전'을 펼친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허나 전북 익산의 작은 교회에 가보시라, 자애로운 아버지 문정현을 만날 수 있다.

소값파동과 농가부채로 농촌경제가 날로 피폐해 가던 1986년, 그는 한 농가에서 감나무에 줄로 묶인 장애아를 발견했다. 아이의 부모는 들에 일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아이 주변엔 개밥처럼 밥그릇이 나뒹굴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일 이후 그는 교회 옆 창고를 개조해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여러 정성을 모아 '작은 자매의 집'을 열었다. 현재 30여 명의 중복장애아들이 문 신부를 아버지처럼 여기며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이런 그를 깡패라고?

오마이뉴스는 문정현 신부의 인생 자체가 뉴스였음을 잘 알고 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더욱이 올 한 해 그는 '뉴스 한 복판'에 있었다. 그를 만난 건 늘 뜨거운 아스팔트거나, 폭격의 굉음이 울리는 매향리, 또는 쓰레기차 위였다.

그의 뉴스는 땀에 찌들고 때론 피가 튀었다. 그래서 어둡고 무거운 뉴스였다. 하지만 그 뉴스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뉴스였다.

오마이뉴스는 문정현 신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는 그에게 차마 '축하'의 인사를 건네지는 못했다. '축하'라는 말을 꺼냈다간 호통을 듣기 십상이란 걸 잘 알고 있다.

다만 여기 서 있는 노 신부에게, 그리고 그와 함께 2000년의 꿋꿋한 싸움을 전개했던 벗들께 따뜻한 고마움의 인사를 바칠 뿐이다.

문정현 신부가 독자들께 보내는 영상메시지 - 최경준 기자

이런 그의 투쟁을 심상찮게 느낀 것일까. 급기야 주한 미 부대사가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면담을 요청했다.(왼쪽)
ⓒ 오마이뉴스 노순택

절친했던 그의 친구 서 로베르또 신부. 직장암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주한미군 범죄 근절과 매향리 사격장 철폐를 위해 싸웠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덧붙이는 글 | 문정현 신부를 '오마이뉴스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결정하고 취재를 하는 도중, 따뜻한 이메일 한 통이 편집국으로 날아왔다. 뉴스게릴라 고태진 님께서 자신의 원고료 10만9천원을 '문정현 신부께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문정현 신부는 12월 21일 열리는 '오마이뉴스 송년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고태진 님이 보태주신 큰 정성은 이때 문 신부께 전달될 것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