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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테마신문 1호 중계----오마이뉴스는 12월 7일 부정기부정형간행물인 게릴라테마신문 1호를 발행했습니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의 특별호외 형식으로 발행된 이 테마신문은 오는 12월 9일 있을 민가협주최 콘서트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집중조명하고 있습니다. 이 신문은 타블로이드 16면으로 10만부를 발행했으며 아래 민가협 남규선 총무의 글은 그곳에도 실려 있습니다)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이 공연은 89년 12월 28일, 세종대 대양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88년 5번에 걸친 사면조치로 1천여 양심수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기에 양심수 문제는 한시름 놨다는 ‘환상’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89년 새해 벽두부터 농성중인 노동자들이 잡혀가기 시작하여 그 한 해 동안 1천 명에 가까운 양심수가 생겨났다.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 씨는 외국에 나가 ‘양심수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보통사람들은 88년에 양심수가 다 풀려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통사람의 시대’에 생겨난 양심수 얘기를 공연을 통해 하고자 했다.

정태춘, 안치환, 예울림의 노래들이 무대를 달구었다. 성악가 정은숙(세종대 교수) 씨는 처음으로 이 무대에서 민중가요를 불렀다. 그 노래들 사이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양심수의 이름이 울려퍼졌다.

10살 성오가 그린 아빠의 얼굴

홍성담, 임수경, 문규현, 양승균…….
이 공연 내내 불려진 양심수의 이름은 1천명에 이르렀다. 노래와 양심수의 이름 하나하나로 구성된 아주 단순한 공연이었으나 공연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무대 뒤에서 이 이름들을 불러준 사람은 초대 연출가였던 문호근 씨였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었다.

그 이듬해 가을. 우리는 공연을 다시 한번 해 볼까 생각했다. 다시 문호근 선생을 만났고 ‘양심수란 누구일까, 감옥이란 어떤 곳이고 어떻게 살아갈까’를 형상화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10년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남주 시인이 나레이터가 되고 배우 원창연 씨가 수인이 되었다. 두번째 공연에서는 잠깐 감옥에서 나온 문익환 목사가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불렀다. 이때 갑자기 무대 뒤에 있던 안치환이 뛰어나와 노래를 거들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화음이 어우러졌다.

에피소드 하나. 두번째 공연 포스터를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누군가 “양심수의 자녀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보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 보게 했다. 며칠 후 가져온 성오(장기수 이헌치 씨의 아들)의 그림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누가 그려주지 않았나 했으나 이내 의문은 풀렸다. 81년 아빠가 잡혀갈 당시 만삭의 엄마마저 끌려간 탓에 보안사에서 태어난 성오는 아빠 얼굴도 모르고 10살이 되었다. 하루종일 일터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혼자서 집을 지키는 성오. 그 긴 시간동안 성오는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린 성오의 그림은 오랫동안 양심수 공연의 상징이 되었다.

91년이 되니 더 많은 양심수가 생겨났다. 세번째 공연에서는 정태춘·박은옥과 한돌, 이무하의 포크가 한데 어우러지는 따뜻한 무대를 하나 만들었다. 또한 잊을 수 없는, 다시는 볼 수 없는 명장면, 김광석과 안치환이 함께 부른 ‘솔아 솔아’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 주었다.

세번째 공연 마지막 순서에 장기수 선생들이 무대에 올라왔다. “39년 살고 나온 선생이십니다. 37년 살고 나온 선생이십니다. 저는 19년밖에 안되는 권낙기입니다.” 수십 명의 장기수들이 산 감옥의 햇수는 무려 1천년이 넘었다. 관객들이 모두 일어섰다. 모두 기립해서 박수를 쳤다. 누가 일어나라고 한 것도 아니고 누가 박수를 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한 해가 갔다.

출연료는 어떻게 하지요?

92년, 새 정부가 들어섰다. 이 정부는 스스로를 문민정부라 불렀다. 많은 기대 속에 적어도 양심수 문제는 해결되리라 믿었지만 실망뿐이었다. 그 해 가을, 민가협은 목요집회를 시작했다. 문민정부에서도 인권개선은 쉽게 이뤄질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장기전’을 하기로 한 것이다.

93년, 공연장을 한양대 올림픽체육관으로 바꿨다. 이 공연에서 우리는 당시 유행하던 ‘토크쇼’라는 형식을 도입하게 되었다. ‘별들의 이야기’라는 이름의 이 토크쇼는 ‘스타급’ 양심수들을 초청하여 이들의 입을 통해 양심수 얘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공연에는 들국화가 나와 ‘사노라면’을 불렀다. 전인권 씨를 섭외하며 “출연료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했더니 그는 “그건 당신이 할 말이 아니다”며 “내가 먼저 출연료를 받지 않겠다고 말해야 했다”고 대답했다.

95년, 민가협 10주년이 되었다. 일곱번째 공연은 윤민석씨가 음악을 제작하고 임종석 씨가 나레이터가 되어 다큐멘터리 영상물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N.EX.T가 출연을 했다. 출연 여부를 묻는데 처음엔 매니저 임빈 씨가 바빠서 안되겠다고 했다. 그래서 속으로 “싫으면 그만이지 뭐”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한 10분 후쯤 출연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신해철 씨한테 야단 맞았다며. 공연을 준비하는 자세는 매니저나 N.EX.T나 무척 진지했다. 신해철은 무대에 나와 “왜 이제서야 불러줬나. 그동안 못 부른 노래까지 다 해야겠다”며 3곡이나 불렀다.

96년은 <외투>라는 작은 영화를 하나 만들었다. <초록물고기> 프로듀서로 정신없이 바쁜 여균동 감독을 찾아가 제안을 하여 감독을 갈등하게 만들었다. 그는 현실적 조건으로는 거절을 해야 하는데 대학 1학년 때 ‘좋은 학교’ 가는 통에 어머니 속을 썩인 기억이 문득 떠올라 ‘코가 뀄다’고 말했다.

그 해 내내 모든 대학내 공연이 원천봉쇄 되었다. 한총련 8.15대회를 전후하여 대학에서는 집회든 공연이든 뭐든 할 수가 없었다. 한양대 체육관에서 4년째 하는 공연이고 대학공간에서 8년째 하는 공연이지만 이 해만큼은 현실이 달랐다. 대학당국은 난감해 했다. 그러나 공연 당일 오전 11시 50분. 기적이 일어났다. 야당의원들이 여당의원들을 설득시키고야 만 것이다.

공연 당일 새벽 공연장 원천봉쇄 소식을 듣고 사무실로 몰려든 100여 명의 도우미들은 원천봉쇄 상태에서도 어떻게 공연할까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짜다가 이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모두 얼싸안고 울었다. 그러나 정오가 지나 1시가 되고 2시가 되고 시간은 가는데 경찰병력은 철수하지 않았다. 경찰제지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정태춘 씨는 교문 앞에서 포스터를 치켜들고 서 있었다. 조금 후 윤도현 밴드와 노찾사가 그 옆에 섰다.

15분 전의 기적

오전부터 공연장 주변을 서성이며 교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관객들도 하나 둘 그 옆에 섰다. 포스터를 치켜들고 무언의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났다. 금세 한양대 주변은 이 인파로 도로까지 꽉 차버렸다. 공연 15분 전. 마침내 교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 교문이 열리기까지 오전부터 몇 시간을 기다렸던 관객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1만여 관객들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97년 12월 23일 아홉번째 공연을 앞둔 장충체육관 앞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관객의 행렬…. 음악평론가 강헌은 매표소 앞에서 난감했다고 한다. 매진이 되었기 때문이다. 겨우 표 한 장을 구해 돌아온 그는 “IMF사태로 대학로 공연장이 텅텅 비었는데 이 공연은 어찌된 건가"하고 놀라워 했다. 아마도 그날이 50년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진 직후였기에 저마다의 가슴에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새 희망이 돋아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최백호의 무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권이니 양심수니 하는 공연의 취지에 맞는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그지만 관객은 그가 함께 한다는 자체만으로 환호하고 열광하며 우뢰와 같은 박수로 반겨주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 자리에 오니 나도 꽤 괜찮은 가수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했다.

98년의 10주년 공연은 초대연출가 문호근 씨와 김정환 씨가 공동연출을 했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은 어느 때보다 컸다. 준비의 막바지에 이르러 문호근 씨는 10년 공연의 정점을 찍었다.

이 공연을 통해 석방시킨 양심수들과 아직도 감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45년 감옥살이 김선명입니다.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이제 석방됩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대에 등장한 양심수들이 자신의 무대를 마칠 때마다 관객들은 감격했다. 이 날 무대에 서려면 누구든 수의를 다시 입어야 했다. 무대 뒤에서 장기수들이 수의를 다시 입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45년간이나 입어야 했던 옷을 다시 입히다니! 그래도 김선명 씨는 “편해. 차라리 속옷처럼 편해”라고 말했다.

10년 공연동안 가장 큰 기억 하나. ‘사랑과 평화’의 드러머는 공연 전 날 부친상을 당했다. 그러고도 그는 공연에 참가했다. “음악하는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음악은 없다”라던 그와 ‘사랑과 평화’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포스터를 들고 다시 거리로 나서는 이유

그리고 또 겨울이 닥쳤다. 99년 열한번째 공연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양심수, 시, 노래, 밤, 그 이름 곳곳에 스민 눈물과 절망과 고통을 또 어찌 반복한단 말인가.

돌아보면 그저 눈물이 난다. 도망가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은, 그래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길 바랬다. 그러나 현실은, 다시 떠올리라고 다시 준비하라고 채찍질을 한다.

무얼 했다고, 그동안 무얼 했다고 건방지게 10년 운운 하냐며. 그래서 그 밤을 다시 떠올리고 다시 그 밤을 준비한다.

2000년 겨울, 열두번째 공연을 준비하는 오늘도 이 거리 저 거리 포스터를 들고 매서운 바람을 가르고 다니는 수백 명의 도우미들, 공연기사 쓰고 표까지 팔러 다니는 기자들, 모두 다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고 함께 해 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희망이 일구어낸 작은 공연이 바로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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