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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그니 표류기2 '이랏사이마세 도쿄'
ⓒ 미다스 북스
27세 남자는 결혼한 지 한 달만에 어학 연수차 일본으로 떠났다.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전산과를 택한 남자가 꿈을 위해 나선 도전이었다.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부인은 전세방을 뺐다.

남자가 택한 길은 애니메이터. 일본 최고라고 하는 지브리 스튜디오 작화 부문 초봉이 18만엔(한화 136만원), 게다가 정규 작가가 되기가 하늘의 별따기일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무모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는 살아남았다. 일본의 모 회사에서 애니메이터(원화작업)를 하고 있고, 그동안 책을 두 권이나 냈다. 남자의 이름은 '당그니' 김현근(34)이다. 그가 최근 낸 책이 <이랏사이마세 도쿄>(미다스 북스)다. 이 책은 <당그니의 일본 표류기1> 후속 책. '이랏사이마세'는 '어서 오십시오'의 일본말이다.

만화로 그린 일본 여행서인 이 책은 재미있는 만화책이기도 하고, 도쿄 여행서이기도 하다. 또한 간단한 생활 일본어를 알려주는 교습서이기도 하다. 저자가 욕심이 많아서인지 온갖 내용들이 들어 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만화를 올린 바 있는 그의 이번 작품엔 이른바 '게릴라' 정신이 가득하다. 명함 한 장 들고 불쑥 뛰어든 일본 연수길, 익숙지 않은 식당에서의 아르바이트, 무작정 애니메이션 학교를 찾아 떠난 도쿄 여행 등 그의 일본행은 한 마디로 '대책 없음'이다.

그 점이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가진 것이라곤 '살아 남겠다'는 도전의식뿐이었던 저자의 모습은 이 책의 배경인 도쿄의 발전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현재 일본 인구의 5분의 1이 살고 있는 거대도시 도쿄는 500년 전만 해도 시가지에 100호 정도만 있는 쇠락한 마을이었다. 에도강과 아라카와강, 나카가와강 하구에 세워진 이 습지 도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부임하면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 점에서 저자가 발을 디딘 초창기 도쿄는 500년 전 에도(도쿄의 옛 지명), 당그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다소 비약인 듯도 하지만…)를 연상케 한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저자의 일본 유학기는 '여행'이라기보다는 '고난'에 가깝다. 책 부제가 '일본표류기'인 것도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러한 저자의 처지는 역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꿈을 갈망하는 이들에겐 쉽게 공감을 얻을 것이다.

일본은 '있지'도 '없지'도 않다

▲ 저자는 '이랏사이마세 도쿄'를 통해 한 일 양국의 문화를 차분하게 비교한다.
ⓒ 미다스 북스
<이랏사이마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아주 차분하게 일본을 진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 주눅 든 상태로 '일본은 대단한 나라'라고 흥분하거나, 아니면 지나친 우월감에 빠져 '일본은 없다'라고 큰소리치지 않는다. 두 나라의 문화, 역사 등을 곁들이며 일본의 특징을 담담하게 풀어낼 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 오는 일본 전철. 동네 구석구석까지 전철이 깔려 있으며, 전철 내 휴대폰 사용은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한 공간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일본 전철이 우리나라보다 우수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휴대폰마저 제대로 받을 수 없는 답답함을 이야기하고, 임산부석 자리 양보가 거의 없는 일본 전철을 이야기하면서 양국 문화의 차이점을 이야기한다.

한때 일본의 문화의식이 탁월한 사례로 TV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일본의 정확한 정지선 문화도 다뤄진다. 책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정지선을 '칼같이' 지킨다. 여기서 저자는 '단순히 질서의식의 차이일까?'라고 질문을 던진 뒤, 일본의 교통문화를 차분하게 풀어낸다.

일본은 골목골목이 매우 좁아서 정지선을 지키지 않을 때 다른 차량이 우회전이나 좌회전을 할 수 없다는 것. 즉 안 지키려고 해도 안 지킬 수가 없는 게 일본 정지선 지키기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동차 문제는 그 나라의 총체적인 문화적 인프라와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여러 상황을 곰곰이 분석한 뒤 글로 풀어내는 저자의 글쓰기 방식은 어떤 사안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태도는 '일본 속 한류' 점검에서 빛을 발한다. "한류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라고 애매하게 말하는 저자는 한류를 말하기 전 '일류'를 먼저 이야기한다. '문화'를 일방적인 수출·수입이 아니라 '교류'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저자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게다가 그는 항상 일상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훌륭한 자양분이 되고 있는 사무라이 역사를 논하면서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고달팠을까'라고 질문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단순화' '일반화'를 조심스러워하고,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문화를 파악하는 저자의 태도가 놀랍기만 하다.

"지금도 일본 서점에는 전국 시대의 걸출한 무장들의 전략·전술부터 막부 말기의 난세를 그린 책들로 가득하다. …일본 문화에 빠진 청소년들이, 한국 역사는 별 볼일 없는 이야기가 많지만 일본 역사는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무라이라는 게 실은 사람 죽이는 킬러였다는 거. 이야깃거리로는 재미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생각해보라." - 205쪽

실수 만발 주인공 캐릭터 재미있어

▲ '이랏사이마세 도쿄'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 주인공 캐릭터가 가장 코믹하다.
ⓒ 미다스 북스
만화라는 측면에서도 <이랏사이마세…>는 꽤 재밌다. 만화가 재미있기 위해서는 캐릭터와 줄거리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우선 캐릭터의 경우 개성이 뚜렷하다. 주인공 당그니는 철없고, 실수투성이에다, 덜렁댄다.

어느 정도 철이 없냐 하면, 남편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 들어온 부인을 보자마자 음식 보따리부터 챙길 정도다. 게다가 남편의 학비를 대기 위해 전세방을 빼겠다는 부인에게 "그러면 생활비는 어떻게 할 거냐"면서 오히려 한 술 더 뜬다. 식당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기구를 부수고, 식단을 외우지 못해 잘못된 음식 주문을 받는 등 실수 연발이다. 만화의 재미를 위해서 과장했겠지만, 이러한 주인공 캐릭터는 꽤 재밌다.

또한 유학생들의 일본어 숙달을 위해 전국시대에나 입는 갑옷을 입고, 일절 자국어를 못 쓰게 하는 기숙사 주인아저씨도 만화스럽다.

하지만 그 외 캐릭터들은 다소 아쉽다. 주인공과 함께 극을 이끌고 가는 조연급 캐릭터가 없고, 갈등과 화해 등 각 보조 캐릭터들과의 드라마도 없다. 책 한 편에 이런 이야기를 담긴 힘들겠지만, 어차피 <당그니 표류기>가 연작으로 나오는 만큼 이러한 재미까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줄거리의 경우 당그니가 꿈을 좇아가는 과정을 쭉 담고 있다. 이번 책은 도쿄의 모 애니메이션 학교(동방학원전문학교) 원서를 받는 것에서 마무리된다. 따라서 2권 내용은 뭘 할까 고민하다가, 마침내 진로를 정하는 것이 끝이다. 이후 책에선 학교에서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배우고 졸업한 뒤 모 회사에서 업무를 시작하는 내용이 나올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맨몸으로 일본에 뛰어든 당그니의 일본 여행은 당그니의 일상이 더 비참할수록, 끝이 더 화려할수록 독자들의 흥분을 자아낼 것이다. 하지만 당그니가 그 길을 택할 것 같진 않다. '당그니'란 별명이 단지 이름이 '근'으로 끝나 붙은 별 의미 없는 것이나, 우연히 영어에 관련된 글을 쓴 사람 글에 댓글을 달다가 '일본 표류기'를 시작한 것처럼 그는 지극히 자신이 '싱거운 삶'을 살아왔음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지금 일본의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근무하며 <건담SEED> <이누야사> <아톰> <마이히메> <고찌카메> <아이실드21> <듀얼마스터차지> <제가페인> <메이져(NHK)> <가고일> 등의 제작에 참여(원화작업)했고, 그의 홈페이지(www.dangunee.com) 방문자수는 100만명(6월 13일 하루 방문자 5만5206)을 넘는다.

그리고 그가 낸 책은 서울의 한 대형서점에서 아주 잘 보이는 위치에 놓여 있다.

태그:#당그니, #도쿄, #만화, #이랏사이마세, #애니메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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