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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2일 경기도 화성의 한 리조트에서 열린 경기지역 기초의원 연수회 입소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중도'라는 말처럼 정치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말도 드물다. 어떨 때는 우파적인 정책을, 또 어떨 때는 좌파적인 정책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도'는 이미지만 있을 뿐 실체가 없다.

지난 6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내가 중도"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7일, 이념 성향으로 볼 때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매우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박근혜 전 대표가 '중도'면 민주노동당은 뭐냐. 어제 탈당한 열린우리당 사람들도 중도라고 했으니, 박 전 대표와 합치면 되겠다." - 박용진 민주노동당 대변인

"기독교인이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중도일 수 없듯이 한국인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즉 우파와 좌파 사이에서 중도일 수 없다. 반공우파 이념 위에서 건국된 대한민국에선 '나의 이념은 중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 순 없다." -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

고진화 "정체성 논란 시나리오의 암호명은 '어느 여인의 미소'"

한나라당의 이념·정체성 논란이 한창이다. 유석춘 참정치운동본부장으로부터 탈당을 요구받은 고진화 의원은 7일 "몸통과 실체를 밝혀야 한다"며 정체성 논쟁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 시나리오의 '암호명'은 "어느 여인의 미소"다.

"(1단계는) 특정인을 대상으로 색깔론 공격을 퍼붓고, (2단계는) 그것을 통해 이념 논쟁을 확산시켜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3단계는 양비론을 전개하면서 상황을 유야무야하게 만들고, 4단계는 지역주의와 보수체제를 강화해서 어떤 세력과 함께 하고…. 어떤 분은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단계에는 한 여인이 웃지 않겠느냐'고 말을 한다."

정체성 논쟁의 배후로 박근혜 전 대표를 지목한 셈이다. 기자들이 정체성 논란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입장을 물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박 전 대표는 '기획설', '배후설'에 대해 모두 부인했다.

다시 박 전 대표의 정체성 문제로 돌아오자. "내가 중도"라는 박 전 대표의 답변에 기자들은 "당내에서는 중도로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고 반문했다. 본인이 '중도'라는 박 전 대표의 인식은 확고했다. "내용을 잘 모르면서 그렇게 얘기한다"는 것이다.

"당 대표 시절 여러 현안에 대해 당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렇게 내가 걸어온 노선이 바로 중도이다. 그동안 당의 총의를 모아 헌법적 가치와 국익의 관점에서 정책과 노선을 결정해 왔으며,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적이 없다."

박 전 대표가 '중도'에 집착하는 배경이 뭘까?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가 지난해 12월 실시한 유권자 성향 조사결과가 그 해답 중 하나이지 않을까?

여의도연구소가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8∼9일 남녀 유권자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회안정과 변화 중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안정'(31.9%)보다 '변화'(38.2%)를 선택한 사람이 더 많았다. 차기정부의 이념성향에 대해서도 '진보적이어야 한다'(39.8%)와 '중도여야 한다'(31.8%)는 응답이 '보수여야 한다'(17.3%)는 응답을 압도했다.

대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과 큰 격차로 뒤지고 있는 박 전 대표로서는 유권자들의 인식 흐름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발표한 박 전 대표의 경제 정책을 살펴보면, 다시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 없다.

지난 5일 발표한 경제 정책 기조는 '작은 정부, 큰 시장', '대기업 규제 철폐', '감세 정책' 등으로 요약된다. "정부의 운영 시스템을 정상화해서 규제를 풀고 민간의 자율성을 살려 시장을 활성화하면 좋은 일자리가 생기고 선진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 전 대표가 "녹음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 같다"는 비야냥을 들으면서도 당 대표 임기 2년 3개월동안 줄곧 외쳐왔던 내용이다. 경제문제 뿐만 아니라 대북문제, 사회현안 등에서도 박 전 대표의 보수성을 명확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표는 정말 보수다"

▲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는 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기독교인이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중도일 수 없듯이 한국인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즉 우파와 좌파 사이에서 중도일 수 없다"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충고했다.

"17대 국회가 처음 열릴 때, 제가 '국가보안법은 이미 사문화된 법이니, 우리가 먼저 전면 폐지나 대체입법을 주장하든지, 최고로 양보해도 개정안을 내 정국을 끌고 가자'고 했더니, 그때는 의원들 대부분이 동조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현 지도부(박근혜)가 들어서고 '국가보안법의 '국' 자도 못 고친다', '당의 운명을 건다', 이렇게 나가니까 당내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 2005년 1월 24일 <한겨레>에 실린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의 발언

"최근 몇 년 사이에 상식이 무너지고, 비정상이 정상인 것으로 느껴지는 일들이 너무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파간첩을 민주인사라고 찬양하고 6.25때 적화통일이 됐어야 한다는 사람을 정권이 나서서 두둔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파업과 집회를 무제한 허용하고, 병역거부를 허용하겠다고 합니다." - 2006년 1월 박근혜 대표의 신년사 중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적 가치의 테두리 내에서 불공평한 것을 바로잡는 게 개혁이지, 그 자체를 흔들고 무너뜨리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사이비 개혁'이다. 최근 간첩단 사건을 봤을 때 만약 (보안법이) 싹 없어졌다면 어땠을지 아찔한 생각이 든다. 사학법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문제인데 전교조 얘기를 듣고 많은 전문가가 위헌이라고 하는 법을 날치기까지 했다. 이게 개혁이냐.

지금은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나도는 판이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공조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달러가 들어가는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등은 중지해야 한다. 물론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확실하게 나온다면 확실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겠지만 지금 그런 상황이 전혀 아니다." - 2007년 1월 1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중에서


박 전 대표의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를 두고 강원택 숭실대 교수는 "정말 보수다.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한 것 같다"고 평가했고, 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은 "30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것과 무엇이 다른지 여전히 불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수구 인식에 강한 거부감... 진보도 포용 가능"
"DJ에게 했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왜 못하나"


▲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지난 5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집권할 경우 재임 기간 평균 7%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념 성향은 분명 '보수'인데, 그는 왜 '중도'를 얘기하고 있을까?

이와 관련 박 전 대표측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의 출발선은 보수이지만, 수구꼴통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며 "국가안보 문제는 확고한 보수성을 유지하지만, 사회·문화 분야에서는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 진보도 포용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유동성이 강한 수도권 30~40대와 호남권 유권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과 달리, 박 전 대표는 충성도가 높은 저소득, 저학력층이 지지 기반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박 전 대표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정책적 차원에서 접근하기 전에 어려운 사람, 소외 계층에 대한 박 전 대표의 따뜻한 마음과 진실성을 읽어야 한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와는 접근 방식과 버전이 다르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 본인은 '사심'이 없기 때문에 깨끗한 산업화 세력의 주자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고, 따라서 유능한 민주화 세력과 손을 잡겠다는 의지가 '중도'로 표출됐다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표의 '중도'론에 "한계와 허점이 더 많다"는 지적도 있다.

김형준 국민대 정치대학원 부원장은 "박근혜 전 대표는 누가 뭐래도 보수의 색채를 강화시켜 왔는데, 별안간 중도라고 하면 사람들이 헷갈린다"며 "정체성은 현 시점에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항상 역사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앟으면 자기 딜레마에 빠지고, 정체성의 부조화가 온다"고 말했다.

"유신체제 속에서 아버지가 했던 일들, 그 가치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과감하게 참회하고 인혁당 사태로 고통받은 사람들과 껴안고 울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했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왜 못하나. 그것을 못하면서 자꾸 시장경제 얘기만 하니까, 헛 도는 것이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는 "경제 정책에서 '반값 아파트'를 제시했다고 홍준표 의원을 진보라고 보지는 않는다"며 "공공개혁, 언론개혁, 경제질서 등 한국의 젊은 사람들은 바꿀 게 더 많다고 본다. 진보적인 시각이 더 많다"고 분석했다.

박 대표는 특히 "박 전 대표는 가장 폭넓게 광폭(廣幅) 정치를 할 수 있었다"며 "아버지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영호남 문제나 남북 문제, 계층 간의 문제를 다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나에 대한 정치공세", "법에 따라 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한, 진보정책 몇 개 가져와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내가 중도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측 관계자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 현재 진행되는 흐름은 정권 차원의 정치 공세이기 때문에 함구하고 있을 뿐, 언젠가는 털고 가겠다는 것이 박 전 대표의 뜻"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명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은 "정치공세라 하더라도 (박 전 대표는) 앞으로 대통령이 되시려는 분이니, 싫으나 좋으나 피할 수 없는,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 할 과제"라며 "자신의 마음을 국민에게 말하고 이해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 위원장은 한나라당 대선후보에 대한 검증 작업을 벌이겠다고 피력한 바 있다.

'중도'의 깃발을 치켜든 보수 정치인 '박근혜'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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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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