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이 모든 것을 말하는 스포츠 세계. 하지만 한계를 뛰어넘어 꿈을 위해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 그에겐 성적이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꿈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2년간의 깊은 부상을 털고 전국 피겨 랭킹전에서 3위를 차지한 최지은 선수가 바로 그런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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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28일 열린 2006 회장배 피겨스케이팅 랭킹대회(아래 랭킹대회)는 국가대표(4명) 선발전으로 치러졌다. 아울러 동계 유니버시아드와 동계 아시안게임에 참가할 선수 선발전도 겸했다. 이번 대회준비를 위해 23일 수요일 오후부터 대전에 내려온 선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하고 있었다. 연습과 관련된 내용 이외에는 어떤 대화도 현장에서 오고가지 않았다. [24일 연습 현장] "송아지 끌려 나가듯 운동하러 다닌 적도..."
 24일 대전 남선공원 체육관에서 연습하는 최지은 선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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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를 사흘 앞둔 24일 오전 9시 30분. 대전 남선공원 실내 링크장에 신혜숙(49) 코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자, 자, 스핀, 다리 똑바로 펴고!" 링크장엔 선수들의 땀방울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선수들 틈, 한쪽 링크에서 트리플(공중에서 3회전 또는 3회전 반을 도는 점프)과 럿츠(lutz, 후진 밖으로 돌기에서, 활주할 때 빙면에 접하고 있는 프리 레그 끝으로 뛰어올라 공중에서 완전히 1회전하는 점프) 연습에 전념하고 있는 최지은(19·세화여고 3) 선수를 찾을 수 있었다. 국가대표인 최 선수는 아직 어리지만 피겨스케이팅 국제무대에서 이미 베테랑으로 평가받는 선수이다.
 쇼트프로그램을 연습하는 최지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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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만난 최 선수는 실력만큼 세심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바쁜 연습에 지칠 만도 하지만 환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연습이 힘들지 않을 수 있나요? 하지만 다 이겨내는 거죠." 말은 담담하게 하지만 하루 4시간의 강도 높은 훈련은 결코 쉽지 않다. 최 선수는 가끔 너무 힘들어 울기도 하고, 소가 끌려 나가듯 운동하러 다닌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연기에 '감히 아름답다'는 표현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수많은 피와 땀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최 선수의 피와 땀은 국가대표 발탁으로 이어졌다. "중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어요. 솔직히 그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죠. 그냥 잘해야만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어요." 세계 최고의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되고 싶다던 16살 소녀의 바람은 꿈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너무나 큰 시련이 최 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련은 최 선수의 꿈과 자신감을 빼앗아갔다. 악령 같이 찾아온 부상, 2년간의 재활 훈련 "중3말에 부상을 당했어요. 그때는 주변 분들이 제 얼굴에서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대요. 만날 아팠으니까요. 이 악물고 경기에 나갔지만 기권하는 경우가 수두룩했어요. 그렇게 무리하게 출전하다 보니 부상이 더 악화됐지요." 3년 전 최 선수에게 갑작스런 부상이 찾아왔다. 훈련 중 골반을 크게 다친 것. 점프, 스핀 등 다리를 많이 움직여야 하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에게 하체 부상은 선수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다. 16살 소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가 찾아온 것. "답답했죠. 초음파 검사를 해도, MRI(자기공명 영상진단)를 찍어도 결과가 안 나왔으니까요."
 항상 표정이 밝던 최지은 선수. 하지만 부상은 선수생명 자체를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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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으로 경기 중 기권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성적은 떨어졌고 세계 최고의 피겨스케이터가 되겠다던 꿈은 멀어져 갔다. 비관적인 전망이 쏟아졌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려웠지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었다. 기약 없이 길고 긴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하루하루 악착같이 견뎌냈다. 2년이란 긴 시간을 최 선수는 그렇게 견뎌냈다. 그 끝에서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완치는 아니었지만 통증이 멎은 것. "아직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에요. 오른쪽 다리 스트레칭이 안 되고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의지 덕분일까? 길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최 선수는 다시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6년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열린 국제빙상연맹(ISU) 주니어 그랑프리 부다페스트에서 3위에 입상한 것. 최 선수는 쇼트프로그램(점프, 스핀, 스텝 등 정해진 6~7가지를 넣어서 2분간 연기)에서 13위에 그쳤지만, 다음날 열린 프리스케이팅에서 1위를 기록하며 종합성적 3위라는 대역전극을 펼쳤다. 집념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체격도 커지고 체중도 늘어나 피겨스케이터로서 부담을 느낄 수 있는 19살이지만 꿈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것을 최 선수는 증명해보이고 싶은 듯했다. 최 선수는 그런 꿈을 안고 국내 최고의 피겨스케이터들이 모이는 랭킹대회를 준비했다. [27일 쇼트프로그램] 대회 개막! <로미오와 줄리엣> 선율에 맞춰 날다
 27일 열린 2006 회장배 랭킹대회 쇼트프로그램. 6번으로 출전한 최지은 선수가 멋진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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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 쇼트프로그램 경기 중 신혜숙 코치와 최지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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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후 2시, 드디어 랭킹대회가 시작되었다. 선수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링크 안으로 들어섰고 현란한 연기가 이어졌다. 이윽고, 장내방송이 6번 최지은 선수의 출전을 알렸다. 귓가에 울리는 작은 선율이 링크장에 흐르고 최 선수의 연기가 시작됐다.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에 맞춘 가볍고 경쾌한 움직임. 최 선수는 토우점프(스케이트의 앞쪽 끝으로 뛰어오르는 점프), 트리플, 레이백 스핀(등을 뒤로 젓혀 하는 스핀) 등 어려운 스핀과 점프를 무리 없이 해냈다. 뜨거운 함성 속에 최 선수의 연기는 마지막을 향해갔다. 그런데 3회전 점프를 하던 최 선수가 작은 실수를 범했다. 2회전 밖에 하지 못한 것. 다행히 그 외에는 별다른 실수 없이 쇼트프로그램을 마쳤다. 기술 부문과 연기 부문에서 감점돼 최 선수의 점수는 43.52. [28일 프리스케이팅] 1등만큼 값진 3등... 도전은 계속된다
 28일 열린 2006 회장배 랭킹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12번째로 출전한 최지은 선수가 연기를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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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2등 이내 진입을 우선 목표로 하고 있었다. 2위까지만 동계 유니버시아드와 동계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대회에는 각 3명의 선수가 참가하는데 그 중 1장은 국제대회에서 이미 좋은 성적을 올린 김연아 선수의 몫. 쇼트프로그램 경기 결과 선두권은 4명으로 좁혀졌다. 선두 신예지, 2위 신나희, 3위 최지은, 4위 김나영. 이들의 점수 차이는 채 10점 안쪽이어서 28일 프리스케이팅 결과에 따라 순위가 뒤바뀔 수 있었다. 드디어 13번 최지은 선수가 링크에 들어섰다. 몇 바퀴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최 선수는 연기를 시작할 때를 기다렸다. 잠시 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 중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최 선수의 연기도 시작됐다. 모두 숨죽이며 연기를 지켜봤다.
 프리스케이팅에서 몇 번 실수한 최지은 선수. 경기 후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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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점프. 그런데 '아차'! 큰 실수다. 점프 후 균형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진 것. 최 선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신 코치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힘내, 조금만 더! 잘할 수 있어." 코치의 말에 힘을 얻은 듯 연속 점프에 성공한 최 선수. 연기는 후반으로 치달았다. 여기서부터는 체력과의 싸움이다. 부상과 스케이팅 교체로 문제가 있던 최 선수에게는 쉽지 않은 후반이다. 하지만 최 선수는 자신과 싸우며 연기를 진행했다. 남은 것은 마지막 3회전 점프. 최 선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점프. "아!" 관중석에서 외마디 탄식이 터져 나왔다. 3회전 점프를 완성하지 못하고 1회전에 그친 것. 연기를 마친 최 선수의 얼굴에서 눈물이 글썽거린다. 하지만 관중은 최선을 다한 최 선수에게 박수를 보냈다. 관객들이 던진 초콜릿을 들고 링크 밖으로 나온 최 선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부상을 악착같이 이겨내며 오랫동안 준비한 대회였기에 설움이 한 번에 북받친 듯하다. 최 선수의 점수는 113.53. 120점대이던 평소보다 많이 못 미치는 점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종합 1위. 쇼트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신예지(19·광문고3) 선수가 14번째로 링크에 들어섰다. 신 선수는 흠 잡을 데 없는 연기를 선보이며 129.78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신 선수가 1위로 올라섰고, 최 선수는 2위로 내려앉았다. 남은 것은 마지막으로 출전한 16번 신나희(17·경명여고1) 선수. 이 선수의 성적에 따라 최 선수의 동계 유니버시아드와 동계 아시안게임의 출전 여부가 결정된다. 음악에 맞춰 깔끔한 연기를 선보이던 신 선수가 점프 도중 넘어지는 실수를 범했다. 신 선수의 연기가 끝나고 경기가 종료되었지만 2위의 향방을 알 수 없었다. 다들 심사 결과를 조심스럽게 기다릴 뿐.
 2006 회장배 랭킹대회 시상식. 1위 신예지, 2위 신나희, 3위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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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가 발표되었다. "와." 신나희 선수 쪽에서 나온 함성이다. 119.24, 2위다.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 신나희 선수가 동계 아시안게임 출전권을 따냈다. 최 선수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결과였다. 하지만 시상식에서 만난 최 선수는 아쉬움을 털고 성숙하게 소감을 밝혔다. "오늘은 마음도 몸도 피곤해서 푹 쉬고 싶네요. 하지만 선수로서 제 삶에서, 이번 경기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늘 좋은 성적만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하려고요." 최 선수는 시상식에서 담담하게 3등상을 받았다. 목표했던 동계 아시안게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표 선발권을 얻진 못했지만 부상을 이겨내고 얻은 3위이기에 우승만큼 값진 성적이었다. 꿈의 문턱에서 좌절해야 했던 최 선수. 하지만 ISU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선전한 것처럼, 오랜 부상을 이겨냈던 열정으로 최 선수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앞으로 더 멋지게 성장할 최 선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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