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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여행을 위해 찍으신 여권 사진
ⓒ 심준보
내 이름은 박금순입니다. 촌스러운 이름이라 영 쑥스럽지만 내 얘기니 이름 석 자 안 밝혀서야 되겠습니까? 참고로 내 여동생은 '금녀'라는 더 촌스러운 이름입니다. 금녀보다야 금순은 유행가 제목으로도 유명세를 탔을 정도니 조금은 낫지 않나 싶습니다.

학력을 말하는 것은 언제나 부담이 됩니다. 명색은 국졸이나, 졸업식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조차 없습니다. 시골 태생으로, 농삿꾼 집안의 맏딸이다 보니 학교 가는 날 보다는 집안일과 농사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스무 살에 간 시집

나는 스무 살에 시집을 갔습니다. 중매가 성사되고 정작 당사자인 나는 신랑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짙은 화장에 눈조차 뜨기 어려웠지만 어찌 내 남자 될 사람의 신상이 궁금하지 않았겠습니까? 곁눈질 해가며 얼핏 본 신랑은 마르기는 왜 그리 말랐으며, 초례상에서 받아 든 술 한 잔에 취기마저 풍기는 꽤 멋없는 사내라는 생각에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집안끼리의 약속인 걸 어쩌겠습니까? 속으로 밀려드는 슬픔을 뒤로하고 20년 정든 고향을 떠나는 발걸음은 정말로 죽고 싶을 만큼 아득한 느낌이었습니다. 가마를 타고 골짜기를 휘휘 돌아가는 내내 울었던 기억은 지금도 선연합니다.

▲ 오래된 사진이라 명확하지는 않지만 처음 본 신랑이 맘에 안 들어 못내 실망스러워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지는 결혼식 사진입니다.
시부모님, 시아주버님 내외와 자식들, 시집 안 간 시누이들로 대가족을 이룬 시댁의 아침은 커다란 무쇠솥에 밥을 짓는 일로 시작됐습니다. 강원도 삼척군 신기면 대평리 그리고 버들골이라는 골짜기에 위치한 시댁이 농사 짓는 땅은 거의 화전이었습니다. 화전이라고 해도 오랜 노력으로 상당히 많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아침의 일과가 끝나면 곧바로 농사일로 들어갔습니다.

전공인 농사일은 이미 이골이 난 터라 신혼 내색 없이 바지런을 떨었습니다. 집안일이며 농사일이며 척척 해내는 스무 살 며느리가 대견했는지 시어른들의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특히 시아버님의 며느리 사랑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어립니다. 고추 당초 보다 매운 게 시집살이라고 해도 그 시절 어른들 모시고 살던 때가 언제나 그리워만 집니다.

분가 그리고 출산

바쁘게 1년여를 보내던 어느 날, 첫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그 무렵 남편은 농사일보다 도시로 나가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여러 곳에 연줄을 대고 있었습니다. 시아버님의 친척뻘 되시는 분의 도움으로 남편의 직장이 결정되어 뜻하지 않던 분가가 이뤄졌습니다.

수저 두 벌과 보리쌀 반 말이 이삿짐의 전부였습니다. 단칸 셋방을 얻어 또 한 번의 신접살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남편의 첫 봉급은 칠천원이었습니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대략 3천여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단촐한 살림이고 자식도 없는 터라 큰 돈 드는 일은 없다해도 갖춰지지 못한 살림살이는 무던히 돈을 필요로 했습니다. 임신 3개월째라는 사실 보다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다행히 사글세를 사는 주인집이 보리농사를 짓는데 추수기가 도래해 인부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인집 할아버지는 앳된 새댁이 무슨 일을 할까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농사일로 초등학교 졸업장을 갈음한 농사꾼의 딸 아니겠습니까? 보리 추수쯤이야….

이때부터 나는 용정 동네에선 소문난 품앗이꾼이 되었습니다. 논일이며 밭일이며 가리지 않고 품앗이를 다녔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내 손을 거치지 않은 논밭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농사일은 사시사철 있는 것이 아니어서 농한기에 할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정착한 마을인 용정은, 주소지로는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용정리입니다. 바닷가에 인접해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바닷일은 생소했지만 노동 만큼은 자신 있던 터라 동네 아낙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일이 뜸한 시기면 으레 바다로 나갔습니다. 미역과 돌김 등을 채취해 건조하는 일이었습니다.

일 욕심은 타고난 기질인가 봅니다. 둘째를 임신 중이던 하루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바닷일을 마치고 모래사장을 되짚어 집으로 오고 있는데 산기가 느껴졌습니다. 이러다가 바닷가에서 출산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덜컥 나 잰 걸음으로 줄달음했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첫 애가 돌이 지난 뒤 말귀가 트이고 부터는 신통하게도 어미 없이 혼자서도 잘 놀았습니다. 마음 편히 일하라는 뜻인지 울지도 않고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열쇠 숨겨둔 곳을 알려주라는 말도 곧잘 이행했습니다.

▲ 초등학교 입학식 때 모자가 같이 찍은 사진입니다. 이때 어머니 나이가 28세 였습니다.
첫애가 5살 되던 해 둘째를 낳았습니다. 딸아이였습니다. 이 시절은 분가 후 우리 가정에 첫 낭보가 날아든 때이기도 했습니다. 일개 선로반원이지만 남편은 당당히 시험에 합격해 준공무원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셋째 역시 4년 터울의 딸이었고 제 형이랑 꼭 10년 차이가 나는 사내인 막내, 이렇게 4남매를 두었습니다.

그 시절엔 유난히 쌀이 귀했습니다. 궁핍한 살림이었지만 남편 도시락에 보리밥을 싸주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솥 밑에는 보리쌀을 깔고 위에는 쌀을 한 줌 되게 솔솔 뿌려 밥을 지었습니다. 위만 살살 걷어내 남편 도시락 싸주고 첫애 퍼주고 나면 거무스름한 보리밥은 내 몫이었습니다.

이런 내 행동을 지켜보던 남편이 “난 괜찮으니까 고루 섞어서 퍼”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부부의 정이 뭔지 어렴풋이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열정에 찬 연애나 사랑은 없었지만 세월따라 농익는 그 시절 부부의 정은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만 갔나 봅니다.

4남매를 위한 행복한 노동

4남매는 내 삶의 의미였고 노동의 힘이요, 원천이었습니다. 4남매가 커가면서 더더욱 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내 배는 곯아 터져도 생떼 같은 내 새끼들 배마저 곯릴 수는 없었습니다. 분가 후 처음 시작했던 농사일과 바닷일은 내 행복한 노동의 서막이었습니다.

세월이 변화되면서 논밭이던 곳이 도로로 바뀌고 집이 들어서고 하면서 품앗이 대상은 상대적으로 적어 졌습니다. 배운 것이라곤 농사일 밖에 없던 나는 급기야 막노동 일에 나서게 됐습니다. 처음하는 노동일은 고역이었지만 농사일로 다져진 공력이 어디 가겠습니까?

꽤 긴 세월, 노동일을 하면서 나이를 먹다보니 조금씩 힘에 부쳤습니다. 또 노동일은 가족의 아침을 챙기기도 전에 나가야 했고 일이 계속되는 것도 아니어서 계속 다른 일들을 알아보는 번거로움도 컸습니다. 무엇보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들 건사도 문제였습니다.

집에서 하는 일을 찾은 것이 삼베일이었습니다. 질기고 성긴 삼을 입으로 발기발기 찢고 손과 무릎으로 이어, 가늘고 긴 실을 만들고 이것을 베틀로 짜는 일이었습니다. 거칠고 독한 삼줄기를 다듬는 입은 헤어지고 헤어져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일을 할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자화자찬이지만 내가 삼아 놓은 삼베는 올도 곱고 가늘어 장에 내다 팔아도 족히 몇 만 원은 더 받는 상등품이었습니다.

그 후엔 오징어를 조미하는 냉동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이곳이 나의 첫 정규 직장이기도 했습니다. 냉동공장 일을 하던 중 손가락이 절단되는 일을 당하고 조금 쉬었습니다. 그러나 커가는 자식들을 위해 다시 일을 찾았고 철강관련 하청업체에 다시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홈쇼핑에 자반이며 갈치 등을 납품하는 생선가공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진 것 없는 살림이었습니다. 무던히 몸을 놀려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느니 내 몸 부서져라 일을 해서 변통하는 것이 마음만은 그렇게 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노력으로 이방인으로 정착한 마을에서 토박이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준보네’하면 어느 누구라도 반색할 만큼 인심도 얻으면서 말입니다.

또 시골마을에서는 드물게 4남매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습니다. 요즘이야 대학 나온 것이 뭐 대수야 되겠습니까마는 못 배운 탓에 몸 부서져라 일해야만 했던 부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제 앞가림 할 만큼 교육 시켰다는 뿌듯함은 내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보람입니다.

사별 그리고 그 후

2000년도에 남편을 먼저 보냈습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 했을 만큼 잔정은 없었지만 세월 따라 무르익었던 속깊은 정은 사랑 보다 큰 감정이었음을 먼저 보내고서야 새삼 깨달았습니다.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습니다.

자식들 앞에서 펑펑 울 수도 없었고 슬픔은 고스란히 속으로 가라앉아 나를 더 늙고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야 차치하고라도 아직 출가조차 하지 못한 멀뚱멀뚱한 4남매 그리고 대학생인 막내를 생각하면 앞길이 까마득했습니다.

산전수전 겪으며 자식 다 키우고 출가도 못 보고 먼저 간 사람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마는 남은 사람 역시 아득하기는 매일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평생의 노동을 자식 위한 행복으로 여겼기에 또한 내 몸이 아직 일을 할 만큼 건강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다시 생업을 위한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남편 잃은 이듬해 첫째를 장가보내던 날은 하염없이 눈물이 나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도 내 남은 과제의 하나는 해결한 셈이니 어깨는 조금 가벼워졌겠지요. 올 2월엔 막내가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들어도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객지에서의 대학생활을 잘 마쳐준 막내가 기특하게만 여겨집니다.

나는 오늘도 내 남은 과제들을 잘 갈무리하기 위해 열심히 생선을 다듬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일을 전전하며 오로지 자식 위한 일념으로 살았습니다. 그 수많은 노동은 바로 내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면 수저 두 벌과 보리쌀 반말이 이룩한 성과 치고는 스스로 대견함을 느낄 만하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이야 노후 대비 운운하지만 나는 체력이 소진돼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고 거동마저 불편해 내 손으로 조석이라도 해결할 수 없을 지경이면 자식들 신세를 질 생각입니다. 그때가 되면 얼마를 더 살겠습니까? 그 정도는 내 희망이 되어준 4남매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하는 믿음은 내 남은 생의 작은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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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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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세상임을 스스로도 확인하고 또 그런 세상임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소외 내지는 비인간화라는 말이 이미 도배되어 있는 이 세상이 아직은 살만하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또 알려주는 일에 작은 땀을 보태고 싶다. 그런 영광된 일들이 벌어지는 현장이 심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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