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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재평가를 두고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룬 만화가 출간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 시대의 창

'박. 정. 희.'

이 이름 석자가 여전히 이 땅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때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부강한 대한민국을 건설한 위대한 지도자"로, 때로는 "일제 식민지 시기 자발적으로 일본군(만주군) 장교가 되어 항일운동을 탄압한 민족반역자이며, 5·16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고, 장기집권을 통해 유례없는 공포정치를 펼친 독재자"로 평가된다.

이 두 극단의 평가 중 어느 것이 진실일까.
이 물음에 답이 될 책이 나왔다. <만화 박정희>(전2권, 시대의창 펴냄)가 그 책이다.

13일 <만화 박정희>의 글쓴이 백무현(43 · 서울신문 시사만평 작가)과 그린이 박순찬(37 · 경향신문 시사만화 '장도리' 작가) 화백을 서울 중구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랑방으로 찾아가 만났다. 두 화백은 출간일(5월 16일)에 열릴 기자회견 준비모임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아직도 '살아 있는 권력'

"박정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입니다. 추종자들이 '한강의 기적'이란 주술로 박제된 유신 체제에 정당성의 생명을 불어넣으면 죽은 박정희는 곧 부활합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박정희의 성과를 굳이 폄훼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그가 남긴 '역사'에 대해서 바르게 말하고자 할 뿐입니다."

책을 낸 소감을 말하는 <만화 박정희>의 글쓴이 백무현 화백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알고 있는 벽과의 예견된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일 터이다.

몇몇 신문에서 출간 사실을 기사화한 탓인지 대뜸 욕설부터 해대는 항의전화가 벌써부터 회사로 걸려오고 있다고 백 화백은 밝혔다.

"기쁩니다. 너무나 이질적인 사이인 '무거운' 주제 박정희와 '가벼운' 매체 만화가 결합하여 한 독재 권력의 상상력이 빚어놓은 화려한 포장과 허상을 벗겨내고 실체를 발굴하여 진실을 전달할 수 있어서입니다."

기쁘다고 소감을 말하는 그린이 박순찬 화백의 얼굴도 웃음기 없기는 백 화백과 다를 바 없었다.

힘겨운 작업에서의 해방과 또 다른 싸움을 시작하는 기자회견 사이의 짧은 망중한임에도 두 화백 주위를 맴도는 긴장감은 팽팽하다. 아주 미세한 힘만 가해도 툭하고 튕겨져 나갈 이 긴장감을 지탱해주는 힘은 '무미건조한 진실을 전달'하려는 두 화백의 용기뿐이다.

▲ <만화 박정희>를 들여다보면 등장인물들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경향신문 시사만화 '장도리' 작가 박순찬 화백이 이 책의 그림을 맡았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만화'라는 낱말을 입에 올릴 때만 잠깐 웃음기를 머금던 박 화백에게 박정희의 진실을 하필이면 만화로 전달하려 했느냐고, 만화가에게 왜 만화를 그렸나는 식의 우문을 던졌다.

"요즘 인기 끄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덕화가 전두환 역을 하는데 아주 실감나게 하잖아요. 그렇지만 이덕화의 연기가 아무리 똑같이 한다하더라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화는 사실 그대로를 그려낼 수 있잖습니까. 만화는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5월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시사만화작가들의 모임인 뉴스툰(회장 백무현), 도서출판 시대의창(대표 김성실)이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출간 사실을 세상에 알린 이후 백무현·박순찬 두 화백이 '매일 만나 사귀면서' 내놓은 옥동자 <만화 박정희>는 애초 예정된 출산일(2004년 8월 15일)을 9개월이나 넘긴 산고 끝에 나왔다.

"작업을 하다 보니 애초 계획대로 박정희의 일대기를 한권으로 담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부득불 계획을 바꿔 두 권으로 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저희들의 역부족도 한몫했죠."

독립군 토벌했던 다카키 마사오

"바리캉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던 거나 선배 개그맨이 후배 개그맨의 '군기'를 잡겠다고 폭력을 행사한 거나 모두 박정희 시대의 산물입니다. 26년 전에 죽었지만 지금도 그 망령이 이렇게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잖습니까. 이 '전근대적인 박정희'를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겁니까. 우리나라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이젠 '영웅' 신화로 만들어진 박정희와 결별해야 합니다."

인터뷰가 점점 무르익어 <만화 박정희>의 책 속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서, 백무현 화백은 왜 하필 지금 박정희를 얘기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백 화백은 친일청산문제가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친일문제의 상징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 박정희이기에 박정희에 대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보려는 시도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 <만화 박정희>의 글쓴이 백무현 화백. 그는 현재 서울신문 시사만평 작가로 활동중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박정희 일대기를 씨줄로, 한국 현대사를 날줄로 하여 만들어진 <만화 박정희>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새로운 사실도 몇 가지 들어있다.

가령, "부인과의 불화로 인한 도피 심리와 만족스럽지 못한 교사 생활, 또한 권력과 출세욕이 함께 작용"하여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고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로 간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창씨개명한 박정희의 일본 이름)는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는 명령을 받고 벽력같은 목소리로 "요오시(좋다)!"라고 했다는 재미언론인 문명자의 증언이 그것이다.

또 최근 일본 문부상이 '자기네 땅'이라고 망발을 해 논란이 됐던 독도문제도 있다. 독도가 한일협정 회담 당시 협상의 막바지에서 걸림돌로 작용하자 일본 오히라 외상의 "국민정서상 도저히 양보할 수 없다"는 배수진에 한국 측 협상 대표였던 김종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놈의 독도… 오히라 외상! 독도가 한일 국교를 지배하는 요인이라면 차라리 이 조그만 섬을 폭파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기자는 이 발언을 일본 오히라 외상이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측 대표인 당시 김종필 안전기획부장의 발언이었단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강원도 평창에서 일어났던 '이승복 사건'에서 이승복이 죽기 전에 했다는 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선일보의 '작문'일지도 모른다는 의혹, 박정희의 배꼽 아래 이야기, 정수장학회 사건, 김형욱 실종사건 등 지금 우리 사회를 달구는 '뜨거운 감자'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인물은 물론 배경, 소도구조차 사실적으로 묘사

이 책을 들여다보면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고 태어나 훈도(교사)가 되었다가 '출세와 야망’에 불타 '칼의 권력'의 좇아 일본군 장교가 되었던 얼굴, '일본패망'이라는 청천벽력을 맞아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국내로 들어와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동지들을 배신하는 얼굴, 한국전쟁으로 다시 군인의 길을 걷는 얼굴, 쿠데타로 권력을 강탈한 얼굴, 그리고 군복을 벗어던지고 양복을 입은 절대 권력의 얼굴 …, 박정희의 얼굴은 그때그때 모두 다르다.

그 뿐 아니다. 이 책 각권 앞에 따로 '진열'한 주요 등장인물(각권 64명씩 모두 128명)들의 묘사 역시 거의 사실에 가깝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작업의 지난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 박순찬 화백은 '그리고, 고증하고, 지우고 또 그리고, 수정하고'를 반복하던 때를 회상하며 "사실적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던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실적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커서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대부분 제가 실제로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 그런 과거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다 게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박순찬 화백은 '그리고, 고증하고, 지우고 또 그리고, 수정하고'를 반복하던 때를 생각하곤 몸서리를 친다. 그런데 그에게 가해진 압박은 그뿐이 아니었다.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무였지만 당시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물론이거니와 권총이나 담배 같은 소도구 하나에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고 수없이 자료를 찾고 '그리고, 고증하고, 지우고 또 그리고, 수정하고' 반복했단다.

시나리오 역시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만화책'으로는 이례적으로 이 책 2권 맨 뒤에 두 쪽에 걸쳐 실은 '참고문헌' 목록이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백무현 화백은 리영희 교수의 책을 통해 벼려진 역사관을 견지하며, 여러 텍스트 중 특히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월간 말),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조선일보사), 김충식의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동아일보사)를 꼼꼼히 검토했다. 또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정운현 오마이뉴스 전 편집국장 등에게 수시로 자문을 구해가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다.

"박정희는 기회주의자"

백무현·박순찬 두 화백 모두 현직을 갖고 있어서 회사일이 끝난 직후 두 사람의 회사 중간쯤에 위치한 서울 광화문의 뉴스툰 사무실에 갇힌 채 '올드 보이'가 되어야 했다.

그 후유증으로 인해 두 화백의 머리숱은 적어졌고, 특히 박순찬 화백은 혹시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의심 되어 병원에서 진찰까지 받아야 했을 만큼 스트레스를 겪었다.

"박정희 삶만큼 만화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집권 기간 동안의 영상을 떠올려보면 그 이미지는 정말 만화입니다. 그 만화 같은 박정희의 허상을 만화로 벗겨낸다는 것은 짜릿합니다. 만화 작가로서 박정희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박순찬 화백의 인터뷰 마무리 발언을 이어받아 백무현 화백이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 백무현·박순찬 화백은 <만화 박정희>를 통해 굴절된 한국 현대사를 되짚어보고 논란을 빚는 친일행각과 군부독재의 실상을 고발하는 등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언론인의 냉철한 눈으로 박정희를 보았는데, 그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박정희의 아우라는 곡학아세를 일삼아온 지식인들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에 올라 우상으로서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백 화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 화백이 기자의 질문 기회를 봉쇄하고 다시 말을 받았다.

"이 책에서 말한 저희들의 시각이 문제라고 생각하신다면 저희들의 시각이 잘못됐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납득할 수 있도록 저희들을 설득해주십시오."

백무현·박순찬 두 화백은 <만화 박정희>를 통해 "왜곡된 역사나 날조된 신화보다 더 서글픈 것은 세뇌당한 영혼이다"라며 지금 이 땅에 드리워진 왜곡된 역사나 날조된 신화에 세뇌당한 서글픈 영혼들에게 씻김굿을 시작했다.

자, 이제 이 기사의 들머리에서 던졌던 박정희에 대한 극단적인 두 평가 중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지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백무현·박순찬 두 화백은 <만화 박정희>를 통해 후자라고 힘주어 말했다.

백무현·박순찬 화백은 누구인가

<만화 박정희>를 펴낸 백무현·박순찬 화백은 둘 다 종합일간지에서 만평이나 만화를 그리는 현직 작가이다.

<서울신문>에서 시사만평을 맡고 있는 백무현 화백은 국문학을 전공하고 취재기자로 활동하다 만평작가로 전업했다. 1988년 <평화신문> 창간 때부터 만평을 연재했고 <언론노보> <월간 말> <노동자신문> 등 진보적 매체가 그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특히 백 화백은 1996년 8·15해방에서부터 전두환·노태우 구속까지 50년사를 다룬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사>(전3권)를 내면서 역사물을 다룬 경험을 축적했고, 2002년에는 언론개혁 시사만평집 <언론, 딱 걸렸어>를 내기도 했다.

박순찬 화백은 대기과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 출신 시사만화 작가다. 대학 시절 만화동아리에서 활동하며 학생운동을 하던 박 화백은 그의 나이 스물여섯에 <경향신문>에 입사, ‘장도리’를 연재하면서 종합일간지 최연소 시사만화가 기록을 만들어낸 장본인다. 2000년 '경향대상'을 받았고 <뉴스메이커>에 '패러디만평'과 '세상그리기'도 연재했다. / 조성일 기자

만화 박정희 1~2 세트 - 전2권 - 왜곡된 신화, 영웅인가 기회주의자인가

백무현 지음, 박순찬 그림, 민족문제연구소.뉴스툰 기획, 시대의창(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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