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고바우 영감' 김성환 화백의 작품 '판잣집 지붕들'. 이 그림 속에는 '고바우 영감'이 숨어 있다.
ⓒ 김성환
‘고바우 영감’ 김성환(73) 화백이 최근 펴낸 <고바우 김성환의 판자촌 이야기>(열림원)를 펴든 순간 무척 반가웠다.

2000년 9월 29일 1만4139회를 끝으로 50년을 살아왔던 신문지 밖으로 걸어 나가 우리들 곁을 떠나갔던 그였다. 오매불망하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하루도 만나지 않으면 왠지 허전함을 느끼게 했던,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울분으로, 삶에 고단한 우리들을 울리고 웃기던 그였다.

그런 그였기에 오랜만에 전해진 소식이 어찌 반갑지 않으랴. 그래서 버선발로 마중은 못하더라도 따뜻한 차 한 잔 사이에 놓고 도란도란 사는 얘기라도 듣고 싶었다.

그때 그 시절의 정겨운 풍경들

▲ '고바우 영감'을 그렸던 김성환 화백.
ⓒ 조성일
“책이 나오고 3일 만에 재판을 찍었다고 출판사가 그럽디다. 아직도 잊지 않은 독자들이 있다는 것이 무척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김성환 화백은 만화 연재가 끝난 지도 어느덧 5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식지 않은 인기가 실감나지 않는다는 듯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에 어린아이처럼 한껏 고무돼 있었다. 그의 붓끝에 따라 전국민이 웃고 울던 전성기 때의 인기를 생각하면 ‘새발의 피’지만 말이다.

<고바우 김성환의 판자촌 이야기>에는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우리의 그 때 그 시절의 정경이 담겨있다. 고바우의 해학 넘치는 붓끝으로 오롯이 되살려낸 1950~1960년대 피난행렬과 청계천 판자촌의 모습이다.

<문화일보> 2000년 9월 29일치에 ‘고별인사’를 하고 피 말리는 매일매일의 마감 족쇄에서 풀려난 김성환 화백은 만화 말고도 예전부터 해오던 풍속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 <문화일보> 2000년 9월29일치에 1만4139회로 실린 고바우 고별만화.
ⓒ 김성환
“피난지 대구, 부산은 물론 환도 후 서울에서도 1970년대 중반까지는 ‘판자촌 시대’가 이어져왔습니다. 당시 종군화가로 전선을 누비며, 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신문만화를 통해 세상을 보았던 이 소중한 기록들을 그냥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까웠습니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내 기억 속에, 내 자료 속에 있는 것들을 토대로 그때의 모습을 그렸죠.”

하필이면 판자촌? 그가 특별히 판자촌을 그리는 이유는 자신이 직접 판자촌에서 살아봤기 때문이라고 김 화백은 말했다.

“1951년 군 트럭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해 늦가을쯤 대구로 올라와 동천시장 한구석 판자촌에서 살았습니다. 네 평 정도 되는 단칸방이었는데, 풀빵장수 아저씨, 미장공 할아버지 등 집도 절도 없는 모르는 사람 다섯 명이 함께 있었죠.”

그때의 소중한 기억들이 김 화백에게는 여전히 아릿하게 남아있다.

“어느 날 밤 문득 잠에서 깼는데, 천장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것이 보여 개똥벌레가 들어왔나 했는데, 그건 밤하늘에 무수히 떠 있던 별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구멍 뚫린 천장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던 것이죠.”

이런 기억도 있다. 그가 어느 날 혼자 판잣집 방에 있는데, 만삭이 된 양공주가 와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방을 잠깐 빌리자고 하더란다. 주인이 그가 있어서 안 된다고 하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비워주고 밖으로 나왔었다고 했다.

“지금은 거의 잊혀져가고 있지만 절대빈곤의 시대 판자촌의 모습은,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다는 증거물이자 역사입니다. 근대화의 상징으로 복개됐던 청계천이 지금 다시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지만 판자촌이 없는 청계천의 모습은 뭔가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는 지난 해 6월 이런 기록들을 담은 그림들을 모아 ‘판자촌 시대’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작년 전시회를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애초 800부 정도 준비했던 전시도록이 매진되어 재판을 찍는 소동을 벌이면서 1000부 이상이 팔리는 대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도록만 본 한 실향민이 꼭 자신의 얘기를 화폭에 담아놓은 것 같다며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부인을 졸라 그의 그림 ‘1·4후퇴’를 실제로 사갈만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아주 시원했습니다!”

▲ 김성환 화백이 즉석에서 그린 고바우 영감.
ⓒ 김성환
그에게 있어 이번 작업은 아무래도 ‘고바우’ 만화를 그만두면서 겪어야 했던 일종의 금단증상을 극복하는 과정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그는 극구 부인하지만 말이다.

“‘고바우’ 연재를 끝내고 나서는 솔직히 시원해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매일매일 겪는 스트레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보는 독자들이야 그런 사정을 모르니까……. 그런 지옥에서 해방되는데 왜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한 그는 회한이 밀려오는 듯 잠시 마주앉은 찻집 허공을 쳐다보았다.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모양이다. 한참 있다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 책에 실린 그림에 숨은 그림으로 고바우를 그려 넣었어요. 찾아보는 재미도 있잖아요. 제 그림의 의미는 무엇보다 해학과 감동이라고 봅니다. 아까 말한 실향민의 눈물도 감동이죠. 감동만한 공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 기사 맨 앞에 있는 그의 그림 ‘판잣집 지붕들’에서 숨어있는 ‘고바우 영감’을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답은 이 인터뷰 기사의 맨 끝에 달아놓겠다.)

당시 서슬 퍼렇던 시절, 많고 많았던 필화 사건 같은 재밌는 무용담들이 그에게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이 인터뷰에서 다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이 한 가지 얘기로 만족하자.

그가 개인 사정으로 만화를 하루만 쉬어도 독자들은 그에게 무슨 변고가 일어난 것처럼 온갖 억측을 해대기 일쑤여서 여론에 무척 민감하던 당시 정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연재만은 쉬지 말아 달라고 그에게 사정을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박정희 정권 시절 어느 날 남산에 불려갔다 왔다. 최종길 교수가 투신했던 이른바 중앙정보부 6국이었다. 4박5일간의 ‘외출’이었는데, 독자들 사이에 난리가 났음은 당연지사.

<뉴스위크>는 그가 지하 감옥에 있으면서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으로 반 페이지나 되는 분량의 기사를 준비했다. 닉슨 대통령을 사임케 한 <워싱턴 포스트>의 그 유명한 돈 오버도퍼 기자도 혹시 중앙정보부에서 맞지 않았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한 대도 맞지 않았다.

▲ 유명화가들이 그림을 그려 보내온 편지봉투를 들여다보고 있는 김성환 화백.
ⓒ 조성일
“거기서 뺨이라도 한 대 맞을 요량으로 수사관들의 질문에 일부러 반말로 응대했어요. 그런데 나를 다그치던 그들이 밖으로 나가 한참 회의를 한 후 들어와서는 자기들끼리 조심하자고 합디다.”

한 대도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외신들은 기사를 내보지 않아 문제가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불행히도’에 작은따옴표를 했던 것은 그가 만약 그때 한 대라도 맞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법을 써보고 싶어서다.

“그때 두들겨 맞았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박동선 사건만큼 파장이 컸을 겁니다. 당시 고바우가 해외에서도 꽤 유명했거든요.”

"요즘 시사만화 홀대하는 것 같아 씁쓸"

그렇다. 당시 고바우의 명성은 정말 대단했다. 1955년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조선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를 거치면서 반세기 동안 서민들과 동고동락한 시사만화의 대명사 고바우. 그런 고바우가 바라보는 요즘 시사만화는 어떨까?

“요즘 신문들은 시사만화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디다.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고바우가 공식적으로 퇴장한 이후 4단 컷이 아예 없어진 신문도 꽤 여럿인 것 같아요. 시사만화는 없어도 별 영향이 없다는 생각에서 액세서리로 취급하는 것 같고, 홀대도 하나의 유행풍조인 것 같고…….”

요즘 신문들의 시사만화에 대한 대접을 보는 고바우의 심기는 불편했다.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다싶으면 너도나도 앞 다투어 달려들다가도 어느 한 신문이 없애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모두 무관심하게 팽개치는 풍조를 개탄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문의 편집책임자들이 만화적 표현에 대한 간섭을 줄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검열이란 외부적 간섭에다 편집책임자들의 내부적 간섭이 겹쳐 이중고를 겪었지만 지금은 외부적 간섭은 없어졌지만 내부적 간섭은 여전히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마음껏 표현하도록 내버려둬야 합니다. 시사만화는 창의성이 생명입니다.”

시사만화가가 외국처럼 독립된 프리랜서 작가가 아니라 신문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의 신분이기에 편집책임자들이 자신의 부하로 여기는 풍조에서 간섭에 나온다고 고바우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사만화의 본질적 역할을 강조했다.

“시사만화는 약자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또 권력자의 무분별한 전횡을 막는 감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문의 경영자들이 정치가들과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그들에 대한 표현이 자꾸 신경 쓰이니까 간섭하게 되죠.”

올해 책 세 권 더 낼 터

▲ <고바우 김성환의 판자촌 이야기> 표지
ⓒ 열림원
고바우는 올 한해 무척 바쁜 일정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우선 지금까지 해오던 판자촌 작업을 계속할 작정이다. 이미 서대문 판자촌 그림에 착수했단다. 20호(보통 그림 한 호의 크기는 엽서 두 배 정도 크기)짜리인데, 적어도 3개월 이상 매달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40호 되는 대작의 경우 보통 6개월을 매달려야 한단다. 적어도 네다섯 번 덧칠을 해야 하고, 그림에 대한 고증도 해야 하고,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는 이래저래 시간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단다.

그리고 유명화가들부터 받은 그림이 들어있는 편지봉투를 모아 책으로 엮는 일을 비롯, 그동안 틈틈이 써온 에세이를 모아 <고바우 편편상(片片想)>이란 제목의 수필집, <국방일보>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고바우 잡학백과> 등 세 권의 책을 펴낼 예정이다.

경기도 분당에 살고 있는 고바우 영감은 그림 도구를 사거나 친구들,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 인사동으로 나들이한다고 했다.

소외된 사회를 비추는 따스함, 부조리한 세태를 꼬집는 해학, 촌철살인의 번뜩이는 재치가 넘치던 고바우 영감. 그는 이제 고바우 영감에서 벗어나 파스텔화를 그리는 화가의 삶을 살면서 여전히 우리 이웃으로 남아있었다.

시인 고은의 시 ‘고바우 김성환’을 인용하면서 이 인터뷰 기사를 갈무리 한다.

“고바우는 / 1950년 이래 / 우리와 더불어 살아왔다 / 그 뭉뚝한 머리 / 굽은 안테나 머리카락 한 올로 / 우리와 더불어 살아왔다 // 우리와 더불어 살아왔다 함이란 / 그가 우리보다 / 조금도 앞서지 않고 / 결코 뒤지지 않음이니 // 언제나 우리와 더불어 살아왔다 / (……) / 우리의 희로애락 / 우리의 진실 / 우리들의 싱그러운 익살과 비판으로 / 어느덧 반세기에 다가서서 // 그가 우리를 어꾸수하게시리 우리이게 했다 / 아직도 지치지 않는 고바우로 / 고바우 김성환으로”

(* 앞의 숨은 그림 찾기 답은 그림 왼쪽 맨 위 전봇대가 있는 판잣집 창문을 보시라.)

▲ 인사동 거리를 구경하는 김성환 화백.
ⓒ 조성일

고바우 김성환의 판자촌 이야기

김성환 지음, 열림원(2005)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