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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
ⓒ 연합뉴스
추기경의 근심, 백성의 걱정. <조선일보> 2004년 1월31일자 사설 제목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연로한 추기경이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걱정"하고 있어서다. 신문시장을 독과점 한 세 신문사도 '추기경의 근심'을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옳다. 김수환 추기경의 진단처럼 이 나라의 풍경은 기실 참담하다. "우리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근심은 조선일보 사설을 빌리자면 "그동안 마음 속으로 삭이고만 있던 백성들의 걱정"이기도 하다. 세계적 지성들이 '야만의 땅'으로 손가락질하고 있지 않은가. 노동자·농민·빈민·젊은이들이 줄이어 자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참으로 생게망게한 일이다. 추기경의 근심은 엉뚱한데서 비롯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추기경은 '한 리서치'를 근거로 들며 "미국이 주적(主敵)이 됐다"고 개탄했다.

"군장성에게서 사병들 가운데도 반미 친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나라의 전체적 흐름이 반미 친북 쪽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걱정스럽다"고 강조했단다.

두루 알다시피 김 추기경은 원로가 드문 한국사회에서 노상 '원로'로 꼽혀왔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서울 명동성당이 지닌 상징성―언젠가부터 시나브로 빛바래가고 있지만―과 추기경이라는 '권위'가 이어졌기에 더욱 그랬다.

실제 민주화운동에서 김 추기경의 모습이 과대 평가된 대목이 많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다 알면서도 침묵해왔다. 그만큼 이 땅의 '영혼'이 가난해서였다. '낮은 데'로 임하는 종교인들이 적어서였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평가, 과장된 대목 많다

하지만 가톨릭 추기경의 말에 이제 더 침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이 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로 불거졌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일보 사설을 보라. "추기경의 지적들이 듣는 이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원로 종교인으로서의 통찰력이나 예지의 덕분만은 아닐 것"이라고 추어올린 뒤 다음과 같이 십분 '이용'한다.

"여느 사람이 그런 걱정 한 가닥을 들추기만 해도 반민족이니 반개혁이니 하는 돌팔매를 받기 일쑤여서 그저 안으로만 삭이며, 입 없는 사람 흉내나 내며 사는 것이 보통사람의 세상살이였던 셈이다. 그래서 추기경의 평범한 세상 걱정이 많은 국민들에게 '나라에는 역시 원로가 필요하구나'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만은 아니다. 이미 중앙일보도 "나라의 전체 흐름이 반미 친북"이라고 1면 머리로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추기경의 발언은 사실과 뒤틀려 있다. 추기경이 근거로 든 '리서치 조사'를 보자.

리서치앤리서치가 전국 성인 8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조사에서 '우리나라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어디인가'란 질문에 미국(39%)이란 응답이 북한(33%)보다 조금 많게 나타났다.

이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미국 조지 부시정권의 이라크 침략전쟁과 '평양 폭격' 위협이 반영된 결과라고 보아야 옳을 터이다. 이 여론조사에서 '주적'이란 설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서치 결과 '위협적인 국가'로 북한보다 미국이 앞서

그렇게 자극적인 해석으로 몰아간 것은 다름 아닌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이 여론조사를 부각해 보도한 다음날, 사설 제목을 "미국이 한국의 主敵이란 말인가"라고 달았다. 논리의 비약이고 감정적 선동 아닌가.

문제는 조선일보의 선동을 꾸짖어야 마땅할 '원로 종교인'이 되레 확대재생산하는 데 있다. 과연 이 나라의 주류가 '반미-친북'인가. 아니다. 현실은 정반대다.

여전히 이 땅의 주류는 '친미-반북'이다. 그래서다. 두 여중생의 원혼은 아직도 잠들지 못하고 이 땅을 배회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총알받이로 우리 젊은이들을 내몬 바로 그 신문들이 언죽번죽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젊은이들을 내몰고 있다.

명토박아 두자. 김수환 추기경이 강조하는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라도 이 땅에서 미국의 불장난을 막아야 한다. 남과 북을 잿더미로 만들 전쟁 가능성을 참으로 줄이려면, 그리고 미국과 진정으로 대등한 관계를 원한다면, 이제 겨우 싹트기 시작한 반미운동은 지금보다 더 퍼져가야 한다.

반미운동 없이 '대등한 한미관계'나 '용미'는 한낱 말장난이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이 땅에서 불장난을 저지를 확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엄정한 상황이기에 더 그렇다. 추기경의 말을 에멜무지로 넘길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추기경에 대한 '거짓 예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겨레의 생존권이다. 추기경의 근심을 '백성'이 걱정하는 진정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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