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협회가 주관하는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가 26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소격동 서울아트시네마(아트선재센터 지하) 서른일곱번째 상영회를 갖는다. 이번 상영회에서는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 특별전 2'를 볼 수 있는데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합쳐 서른 한 편이다.

ⓒ 조중현
아직도 애니메이션, 하면 우리가 어릴 때 보았던 <캔디>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혹은 <독수리 5형제>와 같은 TV 용 시리즈물이나 <마징가 Z>니 <태권 V>와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만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베를린 영화제 수상 뒤로 유명해지면서 이른바 '재패니메이션'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지만, 이런 장편 애니메이션은 세계의 다른 한편으로 가면 찬밥 대우를 받기도 한다.

즉, 프랑스나 독일 같은 서유럽권에서는 애니메이션 하면 단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며 이런 애니메이션들은 일종의 "예술 작품"으로 분류된다. 독일과 프랑스의 공동 예술 채널인 '아르테(Arte)' 같은 방송에서 보여주는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자칫 그 길이 때문에 마치 본 방송들 사이에 낀 시간 '땜질용' 그림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작품의 질을 보자면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또한 늘 일정한 시간에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정 시청자들도 확보해 놓고 있어 만약 방송사가 이런 애니메이션 보여주기를 중단한다면 꽤 욕을 먹을 터이다.

ⓒ 이성강
독일의 독립 영화 전용관이라 할 수 있을 '지역 영화관(Kommunales Kino)'에서는 본 영화를 보여주기 전에 단편 애니메이션을 꼭 한편씩 보여주곤 한다. 많은 경우 사회적 이슈가 되는 문제를 다루는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데 예를 들어 극우파를 비아냥대는 애니메이션이라든지 실업률 높은 독일의 상황을 재치있게 표현한 것들이다. 이런 애니메이션을 한편 보며 왁자하게 웃고 나서 본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왠지 영화 보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는 생각이 들며, 게다가 함께 웃었던 다른 관객들과 이제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한시적이나마 '공동체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보았던 단편 애니메이션들 역시 그런 느낌을 주었다. 대개 영화제에는 하루에 네편, 다섯편의 영화를 줄줄이 보는 열혈팬들이 많아서 영화 시작 전의 몇분의 암전을 휴식 시간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 시작 전에 보여주는 단편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감았던 눈을 번쩍 뜨게 해주는 상큼한 매력이 있다.

ⓒ 윤재우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 특별전 2'를 소개하는 글에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단편 애니메이션들이 유럽에서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강조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면에서 유럽보다는 일본이나 미국의 입김을 더 강하게 쐬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단편 애니메이션에 대한 평가나 지원이 그리 양호한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단편 애니메이션을 일생의 업으로 삼아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장인 정신의 소유자들은 극히 드물고, 혹은 전무하다시피 하며 많은 경우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나면 산업으로서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생산'하는 회사에 들어가 거대한 회사의 구성원이 되거나 웹디자인 같은 쪽으로 직업을 찾게 된다.

그런 탓에 한국의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이번 기회는 매우 소중하다. 이번 상영회는 크게 보아 두개의 섹션, 곧 '한국으로부터의 현실과 풍경들'과 '세계를 바라보는 개인적 원근법들'로 나뉘어져 있다. 첫번째 섹션은 다시 두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섹션 1은 90년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섹션 2는 90년대 후반에서 최근까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섹션 1에 소개된 작품들은 다른 곳에서 상영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더욱 이번 상영의 의미가 크다. '한국으로부터의 현실과 풍경들'이, 제목 그대로 한국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거릴 일상의 사소한 풍경으로부터 거대한 역사적 담론까지를 다루었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개인적 원근법들'은 한국적 특성을 벗어나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모습들을 그렸다.

그러나 이는 다시금 한국이라는 나라를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바라보는, 마치 수십년간 한국에 살던 사람이 외국에 나가 살게 되면서 한국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그런 시각을 보여주는 셈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애니메이션 특별전은 크게 보아 '한국을 그린 애니메이션 작품 상영회'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 손정현
단편 애니메이션을 두고 하는 비판 중에 "너무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냐"는 것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 개인의 이야기가 민족이라는 큰 집단의 삶을 대표할 수도 있듯이, 한편 한편을 볼 때는 개인적이고 일상적으로 보이던 단편 애니메이션들을 이렇게 모아서 줄을 지어 세워 보니 큰 줄거리가 보인다. 이번 애니메이션 특별전에서 그 큰 줄거리를 찾아내는 일, 그것이 바로 당신의 몫이다.

웃고 즐기는 와중에 후딱 스무편을?

보도 목적을 핑계대고, 독립 영화 협회의 고마운 배려에 의해 몇편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미리 볼 수 있었다. 비록 극장에서와 같이 큰 화면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휴식 시간없이 연속해서 보느라 눈이 다소 충혈되었지만, 애니메이션 영화들에 취해, 영화를 본 장소가 독립 영화 협회 사무실이라는 것도 잊고 미친년처럼 혼자 낄낄대고 웃느라 업무 방해까지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정말 무렴한 일이었다.)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 몇편을 아래에 소개한다.

<Bank> 감독 조중현/1998년/4분 32초

조중현 감독은 회화를 공부한 사람인 듯하다. 화면 하나하나가 데생을 보는 듯했는데, 4분 32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나름의 반전을 숨기고 있는 이 영화는 극영화가 연출해 내려면 다소 힘들 화면을 애니메이션의 힘을 십분 활용하여 잘 그려냈다.

ⓒ 전승일
<넋> 감독 이성강/1995년/3분 15초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히고... 그리고? 그 뒤의 일에 대한 따뜻하고 소박한 감독 나름대로의 상상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대단히 철학적일 수도 있는 소재를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섞어 다소 가볍게 만들어주면서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단편 애니를 완성해 냈다. <마리 이야기>를 만든 이성강 감독 작품이다.

<예전엔> 감독 윤재우/1998년/5분 43초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은 나...'의 쓸쓸한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좀 슬픈 이야기가 전개되겠거니,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다름아닌 한 무더기의 똥이며 그 똥이 선글라스까지 끼고 담배 연기(사실은 악취?) 내뿜으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보고 있으면, 감독의 재치가 한 무더기 느껴진다. 거기에 다가온 낯선 존재, 똥파리... 냄새나는 영화라 그런지 여운도 남는다.

<하교길> 감독 손정현/1998년/3분 40초

이번 애니메이션전에서 상영되는 애니 모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특히 <하교길>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 우리 애니라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단발머리 소녀, 만원 버스, 전봇대, 선 하나, 점 하나에서도 우리 것이라는 느낌이 들며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한 소녀의 하교길에 동반하여 그 소녀를 위로하고픈 생각이 든다.

ⓒ 박현주
<사랑해요> 감독 전승일/1997년/8분 24초

아이들의 그림 일기가 펼쳐진다. 꽃밭의 꽃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나 싶더니만 갑자기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장면들을 담은 다큐멘타리 필름들이 섞여 나온다. 이승만 정권, 6·25의 기억으로부터 박정희를 지나 광주 민주화 항쟁에 이르기까지, 거칠고 어두운 실사 필름과 단순한 그림 일기톤의 대비가 강렬하다. 민가협의 도움을 받은 애니메이션 필름이다. 양심수 자녀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이용했다고 한다.

<Egg Egg> 감독 박현주/1999년/7분

이 애니를 보다 보면 저절로 "에그 에그" 소리가 나온다. 냉장고 속 계란들이 어찌나 깜찍한지,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한 토막만 소개하자면, "존재의 이유를 알다"라는 자막이 나온 뒤 계란들이 동화책에서 본 장면대로 병아리가 되기 위해 쿠션 아래 오종종 모여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정도 온기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계란들, 전기 난로 앞에 모여 앉는데, 그 중 성급했던 계란 하나가 전기 난로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가 그만 삶은 계란이 되어 버린다. 이어지는 자막, "시행착오 속에 성숙해지고". 계란들이 어떻게 성숙해지는지는 직접 한번 보시길...
2002-10-23 19:3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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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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